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국 연방대법관, 이른바 노터리어스 RBG의 악명은 몇 마디 위대한 말과 잘 고안된 카리스마, 뜻밖의 팬덤으로 어느 날 갑자기 얻어진 게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긴즈버그의 생애 곳곳에 뚜렷한 흔적으로, 세밀한 무늬로 새겨진 ‘악명 높은 시대’와 맞물려 특별한 조화를 이룬다
신간 '노터리어스 RBG'는 이 책은 베일에 가려졌던 그의 삶을 날것 그대로, 세밀하게 펼쳐놓는다. 변호사 시절 대법관들 앞에서 “여성도 헌법상 동등한 인민이며, 남성과 마찬가지로 평등한 시민적 지위를 누려 마땅하다”고 주장한 지 40여 년, 대법원 수장으로 여든이 넘도록 그의 이름은 의미가 퇴색되기는커녕 점점 더 단단하고 견고한 힘으로 개인들을 연결시킨다.
그러나 RBG도 처음부터 그럴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유대계 집안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는 동안 반유대주의를 정서적으로 체험했고, 대학에 들어갔을 땐 매카시즘의 광풍이 캠퍼스를 휩쓸었다. 코넬대를 졸업한 뒤 하버드대 로스쿨에 단 아홉 명뿐이던 여성 신입생 가운데 한 명으로 입학한 그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화장실도, 도서관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없었다.
또 컬럼비아대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했으나 원하는 일자리를 구하는 데 애를 먹어야 했다. 1963년 여성으로서는 두 번째로 럿거스대 로스쿨 정교수로 취임했고, 1972년에는 컬럼비아대 최초의 여성 종신교수가 되었다.
그사이 학생들의 요청으로 ‘여성과 법’을 주제로 한 강의를 개설했는가 하면, 1972년에는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에 여성권익증진단Women’s Rights Project, WRP을 공동 창립하는 등 꾸준히 여성의 권리 신장을 위한 활동을 이어갔다.
1980년 지미 카터 대통령의 지명으로 워싱턴 D.C. 연방항소법원 판사로 취임했으며, 1993년 빌 클린턴 정권 때 연방대법원 대법관에 임명됐다. 변호사 시절부터 연방대법관을 역임하는 동안 임금차별, 부당한 처우, 이중 잣대, 임신중절 금지, 사회보험 등 여러 분야에서 젠더 평등과 여성 및 남성의 해방을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사실상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당선을 의미한 부시 대 고어 사건 판결에서 “역사의 심판을 받고야 말 것”이라는 소수의견을 낭독해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연방대법원에서 민주주의와 젠더 평등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했다.
수많은 청년 페미니스트와 진보주의자가 그의 이름으로 자유와 평등을 외쳤고, 그가 내놓는 소수의견에 열광했다. 같은 무렵, 로스쿨 재학생이던 셔나 크니즈닉은 긴즈버그에게 바치는 텀블러 블로그 ‘노터리어스 RBG’를 만들어 그에 관한 기록과 그를 기리는 전 세계 청년 예술가들의 작품을 아카이빙하며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이름을 재조명했다. 이제는 타투에서 웹툰, 핼러윈 코스프레와 (제작 예정인) 할리우드 영화에 이르기까지 법정을 넘어 대중매체에서도 RBG의 이름이 중요한 가치의 상징으로서 오르내린다.
RBG의 인간관계는 어땠을까. 그는 법정에서 줄곧 견해를 달리했던 보수파 대법관 스캘리아와 사석에서 둘도 없는 친구였다. 법 해석은 달랐지만, 그에게서 인간적 매력을 발견했던 것이다. RBG는 그를 ‘니노’라고 부르며 늘 사이좋게 지냈는가 하면, 이따금씩 오페라를 함께 보러 가거나 쇼핑을 다니기도 했다. 한편 처음 대법원에 들어갔을 때부터 유일한 여성 동료로 함께한 샌드라 데이 오코너는 그에게 ‘큰언니’ 같은 존재였다. 둘은 대법원 내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공유했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동시에 응원하며 오코너가 은퇴할 때까지 함께했다. 함께 재직한 10년 동안 법률적 판단이 매우 엇갈렸지만, RBG는 이런 차이도 기쁘게 여겼다. 여성도 ‘다양한’ 견해를 지닌다는 사실을 두 사람이 몸소 보여준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RBG의 진정한 버팀목은 따로 있었다. 과묵한 RBG와 정반대인 장난꾸러기, 그러나 누구보다 RBG를 잘 알았으며, 저명한 세법 전문 변호사이자, 뛰어난 요리사였던 RBG의 ‘퍼스트 젠틀맨’ 마틴 긴즈버그다. 두 사람은 마틴이 타계하기까지 54년간 부부로 함께했고, RBG는 그를 “평생의 파트너”라고 불렀다. 마틴은 학부 졸업 후 RBG에게 여성의 입학이 가능했던 하버드대 로스쿨에 함께 진학할 것을 제안했다. RBG가 연방대법관이 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힘썼고, 암 투병으로 자신은 음식을 입에 대지 못할 때조차 그를 위해 음식을 만들었다. RBG는 마틴 덕분에 적어도 결혼생활에서만큼은, 상대방보다 열등한 존재로 대접받지 않고 완전하고 동등한 인간으로 사랑과 우정을 영위했다.
“나는 처음부터 아내가 하는 일을 지지했다. 아내 역시 내가 하는 일을 응원했고.
이건 희생이 아니다. 가족이다.”
_마틴 긴즈버그
“인생을 통들어 마티에게 받은 가장 중요한 조언은,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마티는 나에게 이런 느낌을 선물하는 사람입니다.”
_RBG
모든 개인이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에 한 발 더 다가서고자 할 때 온갖 종류의 차별, 특히 젠더 규범이란 정말이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음을 역사는 증명한다. RBG는 그 역사를 만들어온 인물이다. 당당히 승리를 거두었을 때는 물론, 탐탁지 않은 부전승과 생산적 패배를 겪었을 때도 사람들은 “나는 반대한다”는 그의 선언에 위안을 받고, 열광했으며, 비슷한 사례가 발생할 때마다 그의 말을 인용했다.
△리드 대 리드 사건 - 유산 관리인으로서 여성의 경제권
유산을 관리하는 데 있어 남성이 여성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아이다호 주 법률에 대한 위헌 소송. 해당 법은 온정적 성차별주의에 입각해 여성과 미성년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노동 기회에 있어서도 제한 규정을 두었다.
△스트러크 대 국방장관 사건 - 임신부에 대한 차별
임신을 이유로 강제 전역을 명받은 여성 장교가 차별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하자 “모든 여성이 임신하는 것은 아니므로 성차별이라고 볼 수 없다”고 판시한 사건. 여성은 임신과 경력 유지(임신 중단) 중 한 가지를 선택하라는 압력을 받아야 했다.
△와인버거 대 비젠펠트 사건 - 남성 전업주부에 대한 차별
홀아버지였던 스티븐 비젠펠트는 전업으로 아들을 돌보고자 했으나 ‘여성’, 즉 ‘홀어머니’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회보험으로 양육비를 청구할 수 없었다. RBG는 해당 사건을 변호해 승리로 이끌며 성차별이 어느 쪽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양날의 검임을 입증했다.
책 속으로 이러저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RBG에게 대법원에 여성 대법관이 몇 명이면 충분하다고 보는지 묻곤 했다. 그럴 때마다 대답은 한결같았다. “아홉 명입니다.” (…) 텔레비전 뉴스 앵커 마이크 월리스는 인준청문회에서 서너 명 혹은 더 많은 여성 대법관과 함께하기를 기대한다던 RBG의 발언을 상기시키며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대체 그분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RBG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말한 그들은 애석하게도 여기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통령이 그들을 지명하지 않았고, 상원이 인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성을 선택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정치 지도자들에게 물어보셔야죠.” RBG는 2007년 1월 인터뷰에서 자신이 오코너와 함께 대법원을 지키는 것이 사람들에게 암묵적 메시지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여성이 두 명이구나. 그런데 두 사람이 비슷하지 않아. 항상 같은 편에 서는 것도 아니야. 그렇지만 어찌됐건 여성이 둘이야.”
_8 당신의 말이 나를 홀리네{RELNEWS:right}
아이린 카먼 , 셔나 크니즈닉 지음 | 정태영 옮김 | 글항아리 | 272쪽 | 2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