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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의 맛] 들어는 봤나, 국내 1호 쇼콜라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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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사의 맛] 들어는 봤나, 국내 1호 쇼콜라티에

    초콜릿 전문점 '카카오봄' - 고영주 사장

    외식시장의 전설로 불리는 사장님들이 들려주는 '장사의 철학', 그들의 이야기가 "장사나 해 볼까?" 생각하는 창업 꿈나무들과 장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700만 자영업자들에게 장사의 대한 마음을 새롭게 다지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칼럼을 시작한다. [편집자 주]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

     

    100년 간 아무런 변화가 없는 프랑스의 작은 마을. 바람이 몹시 부는 어느 우중충한 날, 한 여성이 딸과 함께 홀연히 나타나 초콜릿 가게를 연다. 보수적인 마을 사람들은 낯선 이들에게 경계심이 많았지만 일단 초콜릿을 맛보고 난 후에는 그 매력에 빠져들고 만다. 그리고 그들의 삶이 바뀐다. 활기를 되찾은 노인은 뜨거운 사랑을 갈구하고 불화가 끊이지 않던 이웃은 다시 화해한다. - '초콜릿'이란 영화 속 내용이다. 내게 초콜릿 가게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다. 현실의 이미지가 없으니 영화를 통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내가 현실에서 처음 만난 초콜릿 가게는 '카카오 봄(CACAO BOOM, 네델란드 말로 '카카오 나무'라는 뜻)'이다. 2천 년 대 중후반 홍대인근에 살 때다. 당시 그 골목은 번화가와는 거리가 먼, 꽤 외진 골목이었고, 초콜릿 전문점이라는 건 생소한 시절이었고, 나는 초콜릿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동네 슈퍼에서 밀크 초콜릿이나 먹던 내가 진짜 초콜릿 맛을 알 리가 없었다. 물론 지금은 초콜릿 애호가가 다 됐지만. 여하튼, 그 시절에는 초콜릿 가게가 나에게 그다지 매력적인 장소가 아니었다.

    하지만 '카카오봄'은 달랐다. 까만 초콜릿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미니 콘칭 머신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 가게에서 초콜릿을 직접 만들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고, 진열된 초콜릿들은 '나 수제야'를 온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디스플레이용이 아니라 그야말로 먹음직스러운 초콜릿이었다.

    침샘이 찌르르 소리를 내면서 자극이 되어 몇 개 사려고 초콜릿을 집어 들었다가, "헉!" 가격표를 보고 조용히 내려놓았다. 너무 비쌌다. 망설이다가 가장 저렴한 초콜릿을 골랐다. 그것도 비싸다고 생각했지만 먹고 나서는 돈이 아깝지 않았다. 물론 초콜릿 몇 개에 몇만원 하는 고가의 초콜릿을 골랐다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지금은 초콜릿을 좋아하고 그 재료에 대한 가치를 알게 됐지만 나는 아직도 고가의 초콜릿을 내 돈 주고는 사 먹지 못한다. 초콜릿은 나를 위한 작은 사치다. 가격 대비, 맛 대비 적정 수준에서 소비하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이다. 미식가가 되기에 나는 여전히 가난하다. 아니, 인색한 것일까?

    ◇ 들어는 봤나, 국내 1호 쇼콜라티에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

     

    '카카오봄'에 가면 키가 크고 짧은 커트 머리를 한, 점원인 듯 점원 같지 않은 사람이 손님을 맞이한다. 다른 점원과 마찬가지로 앞치마를 두르고 있고, 특별하지 않은 날에도 가게를 지키는 그 사람이 한국 쇼콜라티에 1호 고영주 사장이다.

    '쇼콜라티에(chocolatier)'는 초콜릿의 프랑스어인 쇼콜라(chocolat)에서 파생된 용어다. 영어로는 초콜릿 아티스트(chocolate Artist)라고 불린다. 고영주 사장은 프랑스어를 몰라 '초콜릿티어'란 호칭을 썼다고 하는데, 지금은 새로운 호칭을 만들어냈다. '초코리언(chocolian)' - 초콜릿별에서 온 초코리언들이 만드는 초콜릿이라니, 이 얼마나 초콜릿스러운가.

    '카카오봄'은 벨기에 초콜릿을 표방한다. 벨기에는 초콜릿으로 유명한 나라다.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자랑하는 고디바(Godiva), 길리안(Guylian), 노이하우스(Neuhaus) 모두 벨기에 초콜릿이다. 벨기에에는 아주 작은 동네- 우리로 치면 면 단위-에도 초콜릿 전문점이 4-5정도 있다. 대를 이어 수백 년간 초콜릿 가게를 운영하는 집도 많다.

    벨기에 사람들은 얼마나 초콜릿을 많이 먹기에 그렇게 초콜릿 가게가 많은 걸까?

    "벨기에 사람들은 핏속에 초콜릿이 흐르는 거 같아요. 평소에는 평범한 초콜릿을 먹고, 특별한 날에는 장인이 만든 비싼 초콜릿을 지인에게 선물합니다. 아기가 태어나도 초콜릿 꾸러미를 나눠주고, 유치원에서 생일파티를 할 때도, 친구들과 나누는 티타임 중에도 늘 초콜릿이 있어요."

    8년간 벨기에에서 생활했던 고영주 사장의 말이다. 집을 방문하는 손님들도 하나같이 초콜릿 상자를 들고 오는 걸 보고 처음엔 우리나라처럼 휴지나 세탁비누 같은 실용적인 선물로 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했단다.

    벨기에는 초콜릿을 국가산업으로 키우기 때문에 외국인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런데 고영주 사장은 어떻게 벨기에 초콜릿을 배우게 됐을까?

    "남편 따라 벨기에로 이민을 가서 8년을 살았어요. 대학 과정이 아니면 유학생을 받아주지 않는 나라인데, 저는 합법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비자가 있었죠. 그래서 배우게 됐어요. 학비도 거의 무료였어요. 생각해 보면 참 운이 좋았어요."

    한국에서 유치원 교사로 일하던 그는 1994년 벨기에로 유학을 가는 남편을 따라 갔다가 초콜릿의 매력에 폭 빠졌다. 벨기에 초콜릿은 한국에서 먹어본 초콜릿과는 맛 자체가 달랐다. 맛도 맛이지만, 벨기에 사람들이 초콜릿을 즐기고 대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초콜릿 전문점 '카카오봄' 고영주 사장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

     

    고영주 사장은 2000년 6월 벨기에 PIVA호텔학교에 들어갔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1년 과정 초콜릿 전문 교육이 있는 곳이란다. 보통 6개월 이하 혹은 제과제빵 과정 중 일부 강좌로 초콜릿을 가르치는 곳과는 차별화된 학교다. 그는 이곳에서 초콜릿 전문 과정을 수료했지만 워킹 비자가 없어 벨기에에서 실무경험을 갖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서른 중반쯤 한국에 귀국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수제 초콜릿이 있다는 사실 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때가 2001년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서울 등 수도권에서만 커피전문점 스타벅스가 막 기지개를 펴고 있을 무렵이었다. 디저트로 치즈케이크를 먹었던 것도 그 이후 일이다.

    유학 가는 남편을 따라 벨기에에 가서 초콜릿 기술을 배워 온 재원이자 대한민국 1호 쇼콜라티에. 돈 많은 사모님의 유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아니었다.

    고영주 사장은 벨기에에서 이혼의 아픔을 겪고 아이들만 데리고 귀국했다. 지금이야 흔하디 흔한 일이고 당시에도 이혼이라는 게 특별한 시절은 아니었지만, 경력이 단절된 30대 중반의 여자가 아이를 키우면서 살아가기란 그리 수월치 않았다.

    당시 그는 집도 절도 없는 무일푼인데다 양육을 도와줄 조력자도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아이들은 시댁에서 데려갔고 그는 생계를 이어 갈 일자리를 찾아야만 했다.

    "그 시절 제 유일한 꿈은 그게 어디든, 반 지하든 옥탑방이든 아이들과 한집에서 사는 것이었어요."

    한국에서 초콜릿 수요를 찾지 못하고 헤매던 그는 구사일생으로 일자리를 얻게 됐다. 부산 파라다이스 호텔의 초콜릿 전문가 자리였다. 서른을 훌쩍 넘긴데다 경력도 없는 아줌마가 어떻게 호텔에, 그것도 초콜릿 전문가라는 생소한 직업으로 취업 할 수 있었을까?

    당시 그 호텔에는 벨기에인 총지배인이 막 부임한 상황이었다. 초콜릿의 나라에서 왔으니 초콜릿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겠지만, 그만큼 그의 입을 만족시키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영주 사장은 불가능할 것 같은 그 일을 해내고 당당히 대한민국 1호, 쇼콜라티에가 됐다.

    "내가 찾아가서 초콜릿티어가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고 그들을 설득했죠. 결국 없던 자리를 만들어냈어요. 호텔의 초콜릿 제조실에 첫발을 내딛던 순간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제게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으니까."

    ◇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

    일본인들이 많이 오는 호텔이라 초콜릿은 그런대로 잘 팔렸지만 일부 특정인만을 위해 초콜릿을 만들어야 하는 현실이 아쉬웠다. 더 많은 사람들이 초콜릿을 즐길 수 있었으면, 내기술을 전파해서라도 수제 초콜릿 시장이 형성되었으면, 우리나라에도 질 좋은 초콜릿과 함께 초콜릿 즐기는 문화를 전파했으면 하는 소망들이 생겼다.

    소망은 갈수록 커져 결국 1년 6개월 후, 2003년 홍대 인근에 조그마한 초콜릿 공방을 오픈하게 된다. 당시 주변의 반응은 이랬다. '미.쳤.구.나!'

    초콜릿만 파는 가게를 한다니 부정적으로 보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고영주 사장은 초콜릿이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음식이고, 거기엔 분명 힘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가게를 오픈한 것은 아니었다. 시장 조사를 해보니 오프라인 매장에서 초콜릿만 팔아서는 임대료를 내기도 버거울 판이었다.

    "호텔이나 큰 베이커리 카페는 구색이 필요하죠. 고급스러운 수제 초콜릿도 몇 개 있어야 폼이 나니까요. 그렇다고 쇼콜라티에를 고용하기에는 부담스러우니 그걸 파악해서 납품하면 되겠다고 판단했어요."

    예상은 적중했고, 떼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그런대로 짭짤했다고 한다.

    2006년 드디어 고영주 사장이 꿈꾸던 초콜릿 가게 '카카오봄'이 오픈했다. 오래된 얘기도 아닌데 우리나라에는 초콜릿 전문점이 전무후무하던 시절이었다. 모두가 반대만 하는 불안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벨기에 초콜릿 가게를 마음 속 롤 모델로 삼고 그 막막한 시간을 견뎌왔다.

    그녀가 지금 행복한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초콜릿 맛을 즐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이들과 한집에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초콜릿은 그것을 가능케 해준 마법의 음식인 것이다.

    몇 년 전, 한국에도 벨기에를 대표하는 초콜릿인 고디바가 상륙했다. 다들 벨기에 초콜릿을 표방하는 '카카오봄'이 망할 거라며 걱정했다. 하지만 고디바가 들어온 후, 오히려 손님이 더 많아졌다. 초콜릿이 너무 비싸다고 칭얼거리던 손님들은 '카카오봄' 초콜릿이 더 맛있다고 칭찬하기 시작했다. 분명 고디바보다 싸고 맛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단언컨대, 고영주 사장의 초콜릿은 한국인의 입맛에 더 잘 맞다. 왜? 한국인이, 한국 제철식품으로 만들었으니까. 물론 카카오는 예외다. 중남미나 아프리카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라 유럽의 가공 공장을 통해 수입할 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푸랄린(praline)'- 설탕에 졸인 견과류. 17세기 프랑스 외교관이자 설탕 제조업자인 플레시 프랄린(Cesarde Choiseul du Plessis-Praslin, 1598-1675) 백작의 요리사가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아몬드, 헤이즐넛 등 견과류와 크림, 술, 버터, 초콜릿 등으로 속을 채운 한입 크기의 초콜릿을 의미하기도 한다. 벨기에의 초콜릿 명가 노이하우스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 에는 다양한 재료가 섞이는데 가급적 우리 제철 농산물을 쓴다. 예를 들어 '카카오봄'의 대표 메뉴인 '딸기 트리플'은 논산 딸기를 제철에 사서 동결 건조시켜 1년 내내 사용한다. 그밖에도 녹차 등 다양한 우리 농산물과 초콜릿을 접목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 초콜릿을 즐기는 또 하나의 문화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

     

    유명 수입산 초콜릿이 국내에 밀려 오고 있고, 대기업도 질 좋은 초콜릿을 쏟아내고 있다. 어느새 초콜릿 전문점들도 많이 생겨났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고영주 사장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보다 중요한 건 기술이죠. 하지만 저는 단순히 기술자로 남고 싶지는 않습니다. 초콜릿을 하나의 문화로 정착시키고 사람들과 초콜릿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을 나누고 싶어요."

    이것은 그의 꿈이기도 하다. 더불어 호호 할머니가 되어서도 본인 손으로 직접 초콜릿을 만들어 사람들과 즐거움을 나누고 싶다고 재차 강조한다.

    고영주 사장이 '카카오봄'을 오픈한 지 올해로 10년이 됐다. 그 사이에 수도권을 중심으로 수제 초콜릿도 많이 대중화 됐다. 그 중심에 '카카오봄'과 그가 있다.

    돈도 많이 벌었냐는 다소 민망한 질문에 '카카오봄'의 유명세만큼 많이 벌지는 못한다는 게 그의 하소연이다.

    "하지만 지금껏 월세 안 밀리고 직원 월급 안 밀리고 주고 있으니 만족합니다."

    '카카오봄'은 얼마 전 이태원 경리단길 초입에 2호점을 오픈했다. 삼청동에 있던 가게가 이전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왜 이전 했는지에 대한 질문에 그는 "장사가 너무 안돼서"라고 했다. 가게 위치로 모두들 강남을 지목했지만 고영주 사장은 왠지 그곳은 낯설었고 낯선 동네에서 장사할 자신이 없었다.

    "저는 한적하고 걷기 좋은 동네를 좋아해요."

    장사를 한적하고 걷기 좋은 동네에서 한다니, 이것 참….

    "저는 정말 장사에는 소질이 없나 봐요."

    어쩌면 당연하다. 그는 초콜릿 장사가 아니라 초콜릿 장인이니까.

    요즘은 미식가들이 많다. 미식에 대한 찬양도 끊이지 않는다. 물론 비싸다고 해서 미식은 아니다. 미식이란 그 음식이 내게 기쁨과 즐거움을 줄 때 가능하다. 딱 한입만으로도 정신적 허기를, 외로움을,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고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하는 음식이 미식이다.

    딱 한입 크기의 초콜릿이 고영주 사장의 바람대로 우리 모두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했으면 좋겠다.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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