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 김선주(42·대전) 씨는 얼마 전에 대형마트에서 20㎏ 한 포대에 6만2천 원을 주고 명품 브랜드의 햅쌀을 구입했다. 그런데, 밥을 지어 보니 윤기가 없고 좁쌀 씹히는 느낌이 들어 자세히 보니 밥알이 잘게 깨져 있었다.
김 씨는 "명품 쌀이라고 해서 믿고서 비싼 돈을 주고 구입했는데 성한 쌀은 거의 없고 싸라기가 30% 이상 담겨져 있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올해 우리나라 쌀농사는 흉년이다. 9월부터 많은 비가 내리면서 벼 작황이 나빠져 쭉정이와 싸라기(잘게 부서진 쌀), 분상질립(하얗게 변색된 쌀)이 예년에 비해 많이 생겼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농협과 민간RPC(미곡종합처리장) 등 국내 쌀 유통업체들이 싸라기와 분상질립을 완전미와 섞어 시중에 판매하고 있다.
주부 김 씨가 구입한 명품 브랜드 햅쌀도 싸라기와 분상질립이 기준치 이상 섞인 불량 제품일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국내에서 불량 포장 쌀이 멀쩡하게 유통되고 있는 것은 정부의 쌀 등급 기준이 애매하게 규정돼 있기 때문으로, 고스란히 소비자들만 피해를 보고 있다. 자칫 내년 가을 수확기까지 밥맛 떨어지는 싸라기밥을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
◇ 흉년에 싸라기만 남았다…도정 수율 68%벼를 도정하면 가장 먼저 왕겨가 벗겨지고 현미만 남게 된다. 다시 현미 표피(미강)를 깎으면 우리가 흔히 먹는 백미가 된다.
이 때, 현미를 깎는 양에 따라서 현백률 96%(7분도), 92%(10분도), 90%(12분도) 백미로 각각 구분되며, 소비자들이 보통 시중에서 구입하는 쌀은 10~12분도 백미다.
이처럼 도정 공장에서 백미가 만들어지면 둥근 그물망에 쏟아 붓고 완전미를 걸러내게 되는데 1.7㎜ 망을 통과하지 않고 남아 있는 일정 크기의 백미 가운데 평균 길이의 3/4 미만인 것을 '싸라기'라고 한다.
결국, 벼를 도정하면 왕겨와 미강, 싸라기, 분상질립 등이 제거되고 전체 무게의 68~72% 정도만 남게 되는데, 바로 이 것을 도정 수율이라고 한다.
벼 작황이 좋아 풍년일 경우에는 도정 수율이 70~72%에 달하고 올해처럼 작황이 안 좋을 때는 68~70% 정도가 나온다.
농민들로부터 벼를 매입한 뒤 도정해서 쌀을 판매하는 농협과 민간RPC 입장에서는 도정수율이 높으면 높을수록 이득이다.
◇ 집단급식소·삼각김밥·편의점 도시락…쌀을 믿어도 돼나?현행 양곡관리법에서 정하는 '쌀 등급 기준'은 싸라기가 최대 3%, 분상질립이 2%까지 섞인 포장 쌀에 대해서 '특'으로 표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한 싸라기가 최대 7%, 분상질립이 6%까지 섞인 포장 쌀은 '상'으로 표시할 수 있으며, 싸라기가 20%, 분상질립이 10%까지 섞인 포장 쌀은 '보통'으로 표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와 별도로 최하 등급인 '등외'가 있다. '등외' 등급을 받은 포장 쌀은 싸라기가 50% 이상 섞였든, 분상질립이 30%가 넘든 상관이 없다.
문제는 국내 쌀 유통업체들이 이런 '쌀 등급 기준'을 악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올해처럼 작황이 안 좋아 싸라기와 분상질립이 많이 나올 경우 더욱 심하다.
곡물 유통업계에 따르면, 국내 상당수의 대형 급식업체와 가공식품업체들이 최근 쌀값 하락에 편승해 농협과 민간RPC 등 포장 쌀 납품업체에 대해 납품가격을 낮추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곡물 유통업체를 운영하는 박민기 대표는 "현재 쌀 20㎏기준으로 급식업체와 가공식품 업체등에 2만7천원에서 2만8천원에 납품하고 있다"며 "산지에서 3만3천원에 구입해서 이 가격에 정상적으로 납품한다는 것 자체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처럼 급식업체들이 납품가격을 후려치기 해 놓고 정작 자신들이 회사 식당이나 골프장, 하청업체 등에 판매할 때는 5만원 초반 가격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박 대표는 따라서 "납품업체 입장에서는 납품가격을 맞추기 위해 싸라기와 분상질립을 더 많이 섞을 수밖에 없다"며 "결국 집단 급식소와 간편식 이용자들만 비싼 돈을 내고서 맛없는 밥을 먹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가능한 것은 '등외' 표시한 포장 쌀의 경우 완전미와 싸라기, 분상질립의 혼합비율이 정해져 있지 않아, 쌀 납품업체들이 납품가격에 맞춰 얼마든지 혼합비율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집단급식소와 가공식품업체에 공급된 포장 쌀은 현장에서 곧바로 소비되기 때문에 정부 단속에서도 잘 적발되지 않는다. 이렇기 때문에 애꿎은 소비자들만 골탕 먹는 불합리한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다.
◇ 완전미에 싸라기 혼입…유명 브랜드 쌀로 둔갑더 큰 문제는, 대형 마트에서 판매하는 유명 브랜드 쌀의 경우도 이처럼 싸라기 섞어 팔기가 성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형마트에 쌀을 납품하는 일부 농협과 민간RPC들이 쌀을 도정하는 과정에서 싸라기를 제대로 걸려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보통 농협이나 민간RPC들이 둥근 그물망에다 쌀을 쏟아 붓고 돌리면서 싸라기를 걸러내는데, 시간이 지나면 그물망에 쌀가루 등이 끼면서 망 사이가 좁아지기 때문에 작은 싸라기도 그물망에 걸러지지 않고 완전미와 함께 섞이게 된다"고 전했다.
이처럼 그물망 위에 남은 싸라기는 완전미와 섞여서 '특'이나 '상'급 포장 쌀로 둔갑해 시중에 유통되고 있다.
박 대표는 "사실 소비자들이 쌀을 구입할 때 포장지에 표시된 등급도 살피지 않는데, 포장지 안에 들어 있는 쌀의 모양과 크기까지 꼼꼼하게 따지는 소비자는 거의 없다"며 "이렇기 때문에 이런 섞어 팔기가 묵인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농식품부 관계자는 "올해 싸라기가 많이 나오면서 불량 쌀이 대량 유통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며 "대형마트와 급식업체 등을 대상으로 섞어 팔기 행태를 불시에 단속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