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안산시 단원구 화랑유원지 내 세월호 합동분향소 (사진= 구민주 기자)
2014년 4월 16일 제주도로 향하던 세월호가 전라남도 진도 해상에서 침몰했다. 수학여행을 가던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 250명과 11명의 교사를 비롯한 304명의 승객이 희생됐고, 온 국민이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
그로부터 1,000일이 지난 2017년 1월 9일.
세월호 참사라는 비극을 겪었던 단원고는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상처를 치유하며 한 발씩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멈춰버린 유가족들은 오직 진실을 밝히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들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
◇'기억하고 추모하며' 일상으로 돌아 온 단원고세월호 참사로 수백명의 학생과 교사를 떠나보내야 했던 단원고는 1,000일 지난 지금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이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존치된 기억교실의 이전문제를 두고 갈등의 중심에 있었던 단원고.
사회적 합의를 통해 지난해 8월 기억교실은 안산교육지원청 별관으로 임시이전 됐고, 희생 학생들이 물려준 교실에는 현재 그들의 후배들인 1~2학년 학생들의 교실이 됐다.
임시 교실로 쓰였던 음악실과 고사본부실, PC실 등 특별실도 복구됐고, 건물 밖 컨테이너로 나와 있던 교장실과 심리 상담실도 겨울방학 동안 정리 될 예정이다.
단원고는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사진= 구민주 기자)
참사 당시 선배들의 희생 소식으로 충격에 빠졌던 1학년 학생들은 어느덧 졸업을 앞둔 3학년이 됐다.
수능과 기말고사로부터 해방된 학생들은 홀가분한 듯 수업이 끝나자 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차며 뛰었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거나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등 또래 학생들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단원고에서의 마지막 학교생활을 추억하기 위해 학교 곳곳에서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는 학생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하지만 희생된 선배들과 선생님들에 대해 기억하고 추모하는 마음만은 그대로였다.
김모(19)군은 "체험활동도 활성화 되고 학교 분위기도 예전보다 좋아져, 옛날 모습을 찾아가는 게 보이는 것 같다"면서도 "핸드폰에 세월호 참사를 저장해 놓고 챙기는 친구들도 있다. 졸업을 하고 나서도 단원고 학생으로서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단원고 측은 세월호 참사를 학교의 역사로 간직하고, 교육 정상화를 위한 노력을 이어나가겠다는 입장이다.
또 희생학생들의 학적처리와 명예졸업, 추모조형물 조성과 연례 추모행사 등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단원고 관계자는 "희생학생들과 재학생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우수한 단원고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며 "각종 추모사업 등을 통해 희생학생들을 기억하고, 다시는 그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는 계기로 삼겠다"고 말했다.
◇멈춰진 시간..."부모이기 때문에 끝까지 싸울 것"
고(故) 정동수 군의 아버지 정성욱(46)씨가 합동분향소 자료실에서 세월호 인양 타임라인을 정리하고 있다.(사진= 구민주 기자)
지난 4일 오전 고(故) 정동수 군의 아버지 정성욱(46)씨는 전날 3~4시간의 짧은 잠을 자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위해 안산에 있는 정부합동분향소를 찾았다.
참사 이후 정씨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세월호 인양 과정을 살피는 데 매달리고 있다.
합동분향소 한 켠에 마련된 자료실에서 세월호와 인양에 관련된 자료를 수집‧분석하고 정리하며 하루를 보낸다.
이날 역시 정씨는 수색 종료 시점부터 세월호 인양과정에 대한 내용 하나하나를 꼼꼼히 정리하고 있었다.
수십장에 달하는 종이에는 2년 8개여 월 간 진행돼 온 인양작업에 대한 내용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찾아내려 했던 1,000일의 시간. 끼니를 거르고 제대로 잠들 수 없어 건강마저 나빠졌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까지 밝히겠다"는 마음 하나로 버텼다.
정 씨는 "우리는 아직도 2014년 4월 16일을 살고 있다. 진상규명이 되면 그때부터 시간은 간다고 생각한다"며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다. 부모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안산교육지원청 별관에 위치한 기억교실 한켠에 붙여져 있는 추모 쪽지들 (사진= 구민주 기자)
같은 날 오후 2시,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합동분향소에 위치한 유가족 식당을 찾은 고(故) 임경빈 군 어머니 전인숙(44)씨.
전 씨는 콩나물 무침, 어묵 볶음, 김치, 된장국 등 유가족들이 직접 차린 반찬과 밥을 뜨며 쏟아지는 전화를 받기 바빴다.
그는 매주 토요일에 진행되는 집회와 1,000일 추모행사는 물론, 전국을 돌며 진행되는 간담회와 토론회 등의 일정을 조율하고 참석하고 있다.
평범한 회사원, 주부, 부모로 살았던 그는 세월호 참사 이후 조금은 모자란 투쟁가, 운동가가 됐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진상규명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지만, 아이들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아프다", "힘들다" 소리는 할 수도 없다.
전 씨는 "순간순간 아이가 생생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 시간만 되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다"며 "아이들을 보냈다라는 생각보다 아이들과 함께 바른 세상, 안전한 세상을 같이 만들어 나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김은지(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전 단원고 스쿨닥터는 지난 1000일간 단원고의 구성원들이 주변으로부터 많은 도움은 물론 상처도 함께 받으며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겪었다고 설명했다.
김 전 스쿨닥터는 "이제는 누가 좋아져야 한다기보다 세월호 참사로 영향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같이 좋아져야 한다"면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의미를 잘 새기며 성찰할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가는 노력들이 필요할 것 같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