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태 전 더블루K 이사. (사진=박종민 기자)
검찰이 확보했던 이른바 '고영태 녹음파일'의 녹취록이 박근혜 대통령 측 요청으로 헌법재판소에 제출됐지만, 정작 이를 먼저 증거로 제출한 쪽은 국회였다.
헌재는 국회 측이 고 씨 측근 김수현 고원기획 대표의 컴퓨터에서 압수된 녹음파일 2천여 개 가운데 검찰이 작성한 29개 녹취록 내용의 일부를 14일 증거로 채택했다.
녹취록에는 박 대통령이 최순실 씨 없이는 아무 일도 못 한다거나 박 대통령 퇴임 뒤 최 씨와 함께 거주할 사저를 지으려 한 계획이 담긴 대화 내용이 담겼다.
국회 측 증거제출서에 따르면, 지난 2015년 4월 고영태 씨는 김종덕 문체부 장관의 정책보좌관이었던 최철, 김수현 씨와 만난 자리에서 "VIP는 이 사람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해"라고 말했다.
VIP는 박 대통령, '이 사람'은 최순실 씨다.
고 씨는 또 "진짜 뭐 하나 결정도, 뭐 글씨 하나, 연설문 토시 하나. 다 어쨌든 여기서 수정을 보고 새벽 늦게라도 다 오케이 하고, 옷도 무슨 옷을 입어야 되고, 배경을 어떻게 해야 되고"라고 말했다.
이어 윤전추 청와대 행정관 등을 지칭하는 듯 "헬스장 트레이너를 비서로 꽂아놨으니 거기서 무슨 일을 보겠어. 잘 못하지"라며 "일이 안 돼. 그래서 소장이 다 봤던 말이야"라는 고 씨 발언도 녹취록에 등장한다.
또, "VIP가 신임해봤자 VIP가 쳐낼 놈들은 다 소장(=최순실) 말 한마디만 다 까내는 거야", "VIP가 믿는 사람은 소장밖에 없어"라는 게 고 씨의 발언 내용이다.
최 씨의 박 대통령 연설문 수정·의상 관여와 국정·인사 개입 과정이 고 씨 입을 통해 설명되는 것이다.
국회 측은 "최 씨가 박 대통령의 의상, 말씀자료 등 국정의 세세한 부분까지 관여했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걸 알 수 있다"고 증거로 제출한 이유를 밝혔다.
최 씨가 고 씨에게 진보성향 인사에 대한 정보를 알아오도록 지시한 정황도 녹취록에 담겼다.
지난해 6월 류상영 전 더블루K 부장이 김수현 씨에게 전화를 걸어 박 대통령이 퇴임한 뒤 최 씨 등과 함께 거주할 집을 짓기 위해 장소를 논의하는 내용도 있다.
류 씨가 "아방궁이 될 텐데"라고 하자, 김 씨는 "그러니까, 원래는 VIP, 최…(중략)…한 십여 채 지어가지고 맨 앞, 끝에 큰 거는 VIP…(중략)…맨 끝에가 VIP가 살 동이고"라고 말했다.
애초 이 녹취록은 고 씨가 측근들과 함께 재단을 장악하고 사익을 추구하려 한 정황이 담긴 것으로 전해져 박 대통령 측이 헌재에 확보를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검찰이 헌재에 넘긴 녹취록이 오히려 최 씨의 국정농단 실체를 더욱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국회 측이 판단하면서 증거로 제출했다.
박 대통령 측 역시 녹음파일과 녹취록 분석을 통해 유리한 대목을 정리한 뒤 헌재에 제출한 것으로 전망된다.
2300여 개 녹음파일은 김수현 씨가 고 씨 등과 나눈 대화와 함께 이번 사태와 큰 관련이 없거나 가족 등과 나눈 통화, 영어회화 녹취 등도 수백여 개 포함돼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