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 25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그림자들의 섬' (사진=시네마달 제공)
지난해 8월 개봉한 다큐멘터리 '그림자들의 섬'(감독 김정근)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30년을 다룬 영화다. 대한조선공사에서 시작해 지금의 한진중공업이 되기까지, '노예'에 가까운 대접을 받았던 노동자들이 민주노조를 설립한 후 자기의 존엄성을 찾아가고, 정부와 사측의 지난한 탄압에도 여전히 노조 사수를 위해 투쟁하는 나날들이 담겼다.
숱한 독립영화 스타 감독을 탄생시킨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그림자들의 섬'은 개봉 직후 "인간의 역사가 끊이지 않는 계급 투쟁의 역사임을 다시금 확인시켜주는 정교한 수작"(서울독립영화제 조영각 집행위원), "화석화된 기억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적인 노동현장의 문제를 끄집어내는 아름다운 연대기"(씨네21 우혜경) 등 호평 받았으나 관객수는 전국 4443명에 머물렀다.
'작은', '독립영화'였기에 상영관 확보도 쉽지 않았던 '그림자들의 섬'은 19일 오후 4시, 서울 종로구 인디스페이스에서 모처럼 관객들을 만났다. 정부가 작성한 블랙리스트에 올라 영화진흥위원회의 제작 지원 등에서 배제되는 등 고초를 겪다 폐업 위기를 맞은 배급사 '시네마달'을 응원하는 '시네마달 파이팅 상영회'의 7번째 영화로.
영화 상영 후 마련된 GV(관객과의 대화)는 '그림자들의 섬'을 만든 김정근 감독과 더불어민주당 은수미 전 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광화문 촛불집회 사회자로 더 유명한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의 진행으로 이루어졌다.
◇ 돈도 안 되고, 유명한 감독 되기도 힘든데 왜 '노동다큐'를 찍을까
'그림자들의 섬' 한 장면 (사진=시네마달 제공)
'그림자들의 섬'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30년을 다루는 만큼, 과거부터 현재를 아우르는 다양한 '기록' 영화에 나타나 있다. 김정근 감독은 "한진중공업(노조)이 기록의 중요성을 매우 중시했던 조직이라 큰 사건이 터지는 전후로 해서 독립다큐 제작자분들께 의뢰해서 촬영을 하고 있었더라. 그걸 토대로 재구성한 결과물이다. 기록이 잘 되어 있는 게 큰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김 감독은 영화 제작을 위해 입수한 많은 분량의 과거 기록과 스스로 5년 동안 찍은 장면들을 영화 안에 잘 살려냈다. 그것도 98분이라는 길지 않은 분량 안에.
김 감독은 "5년 동안 찍었다. 5년의 시간을, 쌓은 두께가 아니라 너비를 보여주는 게 중요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덜어내는 게 쉽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잘한 것 같다"고 밝혔다.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출신이자, 19대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내 을지로위원회에서 상가세입자 권리보호·생활임금제 도입·정규직 확대 등을 추진해 온 은수미 전 의원은 앉자마자 김정근 감독에게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질문했다. 노동문제에 관심 갖는 게 쉽지도 않고 돈도 안 되고 유명한 감독 되기도 힘든데 왜 '계속' 하는지.
김 감독은 "이런 건 팩트폭격 아니냐"라며 웃었다. 김 감독은 "저는 기계를 만드는 인간, 배, 철도 이런 것에 엄청 관심이 있다. 그런 거대하고 경이로운 구조물을 만드는 것을 '작은' 사람이 한다는 게 궁금하고 재미있었다. 앞으로도 노동자들 얘기를 쭉 찍을 것 같다"고 전했다.
차기작 역시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그는 대량해고와 징계를 겪고 있는 부산지하철 노동자를 다룰 예정이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켜진 '부산 촛불'을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 "노조 생각만 하면 가슴 아파… 저 사람들이 배 좀 부르면 안 되나"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디스페이스에서 '그림자들의 섬' GV가 진행됐다. 왼쪽부터 천주교인권위원회 김덕진 사무국장, 더불어민주당 은수미 전 의원, 김정근 감독 (사진=김수정 기자)
'그림자들의 섬'은 개돼지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던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대우'를 요구하며 민주노조를 설립한 것, 한때 노조 간부가 기침하는 것에도 회사가 쩔쩔 맸다는 풍문이 있을 정도로 노조가 강했던 것 등 '밝은' 면도 다루고 있지만, 많은 부분이 힘겨운 투쟁을 그리는 데 할애돼 있다.
노동자들이 직접 선출한 노조위원장이었던 박창수는 원인 불명의 변사체로 발견됐고 경찰은 병원 벽을 뚫고 시신을 탈취해 갔다. 2003년에는 좀처럼 노조에 힘이 실리지 않자, 김주익 노조위원장이 크레인에 올라갔고 129일이 되던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픈 장모와 장애인 딸을 두어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동료들을 배신했던 곽재규 조합원은 김주익의 죽음 이후 자신도 50m 도크 위에서 뛰어내렸다.
죽음의 행렬은 계속됐다.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조직차장이었던 최강서 씨는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 직후인 2012년 12월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민주노조 사수. 158억 죽어서도 기억한다. 손해배상 철회하라. 태어나 듣지도 보지도 못한 돈 158억, 죽어라고 밀어내는 한진 악질 자본"이라는 유서를 남긴 채.
그러나 '그림자들의 섬'에 등장하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무지막지한 액수의 손해배상 청구소송 등을 포함한 노조탄압에 앞장서 온 회사와 '불법 시위' 운운하며 거든 정부만을 원망하고 문제삼지 않았다. 노조의 힘이 강해졌을 때 보다 지혜롭게 닥쳐 올 위기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했던 자신들을 비판했다. "투쟁의 성과가 (조합원) 모두의 권리가 되어야 하는데 소수 집행부의 권력이 되었다"는 김진숙 지도위원의 말이 대표적이다.
은 전 의원은 "노조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프다. (영화를 보면) '우리가 배불렀었어요'라는 표현이 나온다. 저는 저 사람들(노동자)이 배 좀 부르면 안 되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저렇게 열심히, 목숨을 걸면서 일하는 사람들이 30년 일해서 1억 좀 벌면 안 되나. 불평등은 점점 더 심화되는데 (기업은) 이 책임을 노조에게만 떠넘긴다"고 지적했다.
은 전 의원은 이같은 배경에 한국에만 있는 '이기주의적'인 노조법 조항이 있다고 말했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29조는 "노동조합의 대표자는 그 노동조합 또는 조합원을 위하여 사용자나 사용자단체와 교섭하고 단체협약을 체결할 권한을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는데, '노조와 조합원'으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한 일터에서 일하는 다른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장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차단돼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노조는 노동자의 이익이 아니라 조합원의 이익을 위해서만 교섭하도록 되어 있다. 정규직 노조가 (사내) 비정규직을 위해 교섭을 하면 불법이라 소송을 당한다. 우리나라의 노조법은 이기주의적이다. 너, 네 새끼, 네 가족을 위해서만 살라는 관행이 30년 넘은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민주노총, 한국노총 모두 비정규직 문제에 취약하고 조합원 조직률이 낮은 이유다. 비정규직 조직률은 1.8%고, 금속노조 산하 조합원 중 비정규직 비중이 3%를 넘지 않는다. 정규직 이기주의 법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며 "모두가 배 좀 부르고, 하루 8시간 1주 5일 일하면 중산층으로 살 수 있는 정도, 그걸 '희망'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그 정도 되는 사회가 되기 위해 각자가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이문세의 '사랑이 지나가면'이 등장한 까닭
'그림자들의 섬' 한 장면. 김진숙 지도위원은 아저씨들(한진중공업 노동자들)과 따뜻한 곳에서 발을 말리던 풍경이 가장 돌아가고 싶은 때라고 말했다. (사진=시네마달 제공)
'그림자들의 섬'에는 귀에 익은 유행가가 흘러나온다.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합니다 / 목이 메어와 눈물이 흘러도 사랑이 지나가면"이라는 가사로 유명한 이문세의 '사랑이 지나가면'이다.
김 감독은 "노무현 대통령 인권변호사 시절의 기억을, 참여정부 시절의 사람들이 기억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동자 편에 섰던 사람들이, 노동탄압을 하는 장면… 또 다시 노조를 탄압과 진압의 대상으로 보는 묘한 아이러니를 표현하고 싶었다. 힘주어서 만든 부분이라 (관객들도) 눈여겨 봐주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GV 참석자들은 '블랙리스트' 파문으로 폐업 위기에 몰린 시네마달을 위한 격려를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은 전 의원은 "저는 다양한 의견이 세상을 살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제가 국회 있을 때에도 인권이나 존엄 이야기를 하면 새누리당 의원들로부터 월북하라는 소리를 들어 왔다. 오직 하나의 목소리만 지배하는 사회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국회에서 경험한 것"이라며 "살아있는 목소리가 저는 우리 사회를 바꿔낸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사람, 다양한 열정, 다양한 희망, 다양한 욕망이 뻗어나가는, 꿈을 꾸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저도 가자마자 (시네마달) 후원하고 SNS에 공유하겠다. 힘내십시오, 여러분. 우리가 이길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덕진 사무국장은 "이런 좋은 독립다큐 영화를 제대로 감동을 느끼면서 보는 일이 쉽지 않다. 서울조차 전용 상영공간이 5개 이하다. 현장에서 카메라 든 감독들이 계속 작업할 수 있게, 그런 이야기들이 진솔하게 왜곡되지 않고 충분히 전달되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작품을) 제대로 만나게 해 줄 수 있는 공간과 배급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