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오후 서울광장, 광화문사거리를 비롯한 서울 도심에서 탄핵 반대 태극기집회가 열린 가운데 한 보수단체 회원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탈을 쓰고 서 있다. (사진=박종민 기자)
이제 광장에는 촛불만 타오르는 것이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그의 비선실세 최순실 씨가 중심이 된 국정농단 사태에 분노한 시민들이 '이게 나라냐'라며 지난해 말부터 들었던 촛불은 여전히 건재하지만, 복병이 나타났다. 박근혜 대통령(과 그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까지)을 숭배하고, 박 대통령을 비판하는 세력들을 '빨갱이'이자 '처단해야 할 세력'으로 보는, 이른바 '탄기국'(대통령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 무리다.
'맞불'이라는 표현이 온당하지 않을 만큼 그저 촛불집회를 방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 줌 극우세력들이 뭉쳤던 자리는, 국정농단 사태가 '미해결'된 상태로 장기화되자 점점 커져 나갔다. 정확한 셈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아는데도, 탄기국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들이 200만이라고 말했고 급기야 지난 1일 삼일절을 맞아 열린 대규모 집회에는 500만이 나왔다고 주장했다.
2일 오후 8시, 서울 종로구 교남동 레드북스에서 '냉소 사회'의 저자 김민하와의 대화 행사가 열렸다. '냉소 사회'는 정치평론가인 김민하 기자가 우리 일상부터 정치까지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냉소주의'라는 관점으로 분석한 책이다. 이날 '저자와의 대화'에서도 언론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태극기 부대'에 대한 분석이 나왔다.
김 기자는 "오늘(2일) 대부분 신문에 난 기사들이 태극기였다. 왜 그들은 500만이나 왔다고 주장할까. (그들 말대로) 500만이나 오는 그 동력은 무엇인가"라며 "우리는 사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않는다. 노인 500만 명이 나왔는데 (원인을 알아내는 건) 국가적 과제가 아닐까. 저는 왜 나왔는지를 많이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 기자는 태극기를 들며 탄핵을 반대하는 시민들 역시 박 대통령이 잘못했다는 것은 대개 인정하는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박근혜가 잘못했다고는 한다. 최순실 같은 저질스러운 사람들과 왜 친하게 지냈는지 모르겠고 그걸 수습하지도 못하고 정치도 못해 무능한 것은 맞는데 탄핵 당할 만큼 잘못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탄핵하면 나라가 어떻게 되느냐는 게 그들이 하는 가장 '논리적인 반론'"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런 사고는) 왜 '우리를 무시하느냐'로 요약할 수 있다. (노인들이) 카톡을 보고 있으면 아들, 사위, 며느리가 뺏어간다. (집회에 나오면) 어버이연합에서 5만원 주냐 이런 걸 묻는다. 기자가 '이 집회 왜 오셨어요?'라고 하면 '내 돈 내고 왔다!'고 얘기하는 이유"라고 전했다.
김 기자는 "저는 사적인 루트로 많이 들었는데 아버지 어머니 세대들은 (박근혜 탄핵 주장을) 자기 세대에 대한 부정으로 생각한다는 거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나왔다는 말"이라고 밝혔다.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레드북스에서 '냉소 사회'의 저자 김민하 기자가 '저자와의 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김수정 기자)
그러면서 "우리가 어떻게 이 나라를 만들었는데, 어려움도 없이 자란 젊은 세대들이 대통령이 그거 조금 잘못했다고 탄핵해서 이 모양 이 꼴을 만들어놨다. '왜 우리를 무시하느냐'는 얘기다. (촛불집회에 나온 사람들은) 대통령이 탄핵돼야 하는 이유를 이미 말했다. 범죄혐의에 연루돼 있고 나라의 권력을 공익적으로 사용 안했다고. 그런데 '왜 우리를 무시하냐?'라고 하는 게 정상적인 대화인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왜 무시하냐? 라는 말은 그게 내 잘못이냐, 라는 거다. 다시 말하면 누군가는 당신들(탄기국) 잘못이라고 했다는 거다. 고령층이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를 대통령을 만들어서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라는 건데, 사실 그들이 박 대통령을 만들었고 박 대통령이 잘못했으니 책임 있는 건 맞다. 고령층 유권자는 박근혜를 지지하고 청년층은 문재인을 지지했다는 구도가 있으니, (박근혜가 잘못했다고 하면) 내 잘못이라고 얘기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탄기국 무리는 지금 일어난 이 모든 일이 '나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를 설명하는 온갖 근거를 동원하기도 한다. 고영태가 호스트바 출신이고, 고영태와 최순실 관계가 틀어지면서 고영태가 태블릿 PC를 JTBC에 갖다바쳤고, 정치병에 걸린 손석희-홍석현이 작당을 해 이 태블릿 PC 건을 엄청 키웠고 그걸 가지고 탄핵까지 갔다. 이 음모에는 검찰, 특검, 헌법재판소, 국회, 조중동, 야당까지 합세해 권력을 뺏어갔다는 것이 그들에게서 '통용'되는 주된 주장이다.
김 기자는 "이런 이야기를 500만 명의 애국시민들이 진지하게 믿을까? 어떤 언론에서 애국시민들이 음모론을 작당하는 녹음파일 등을 공개했다고 치자. 그럼 그들은 음모론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회개한 다음 촛불의 품으로 돌아올까? 아니다. 음모론의 '진의'는 중요하지 않다. 500만 중 490만 정도는 (사실인지 여부는) 상관없을 거라고 본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이게 다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속고' 있을까"라고 물었다.
지난해 출간된 김민하 기자의 '냉소 사회'
김 기자는 "믿을 수 없는 수준의 이야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러는 이유는, (촛불 시민들이) 이미 자신들을 기만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저들이 맨날 속이고 거짓말하고 인터넷에서 여론조작하고 있는데 우리라고 가만 있어야 되느냐. 이 나라는 죄인이 되면 바로 죽는 나라인데,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 되어 무조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되나. 아니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촛불을 무조건 이겨야 된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만고에 속는데 이번 판에 우리가 (사람들을) 속이는 게 그렇게 나쁜 거냐, 하는 마음과 동시에 '박정희주의'를 지키고 싶은 그런 마음인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선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했고, 정치적 자유나 삶의 여러 권리들을 빼앗긴 상태에서도 견디고 잘 살아왔는데 박정희주의를 복권시킨 박근혜가 탄핵이나 당하고… 태극기 시민들은 매우 억울하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안 억울한 사람이 없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억울하다. 이때 '억울함'이 개개인의 감정 수준이라면 괜찮다. 제도와 체계가 억울함, 부끄러움, 내가 열등한 사람이라는 의식을 강요하고 있다는 게 문제"라고 바라봤다.
그러면서 "(어떤 현상이나 원인을 설명할 때) 논리, 관념, 이념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태도가 '냉소'고, 그런 사회가 '냉소 사회'라는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