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이상한 학자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나라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왕명을 받들어 여러 명의 학자가 몇 년의 세월을 매달린 국가 프로젝트였던 우리나라 사서보다 이웃나라 사서를 더 신봉한다.
그들이 신봉하는 사서는 기년부터 틀리기 일쑤인, 말하자면 사서의 기본도 갖추어져 있지 않은 허접한 수준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사서에 나온 내용만을 믿고, 우리 사서를 믿지 않는다.
이쯤 되면 고대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눈치 챘을 것이다.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암묵적인 합의(?)가 되어 있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사회학자로도 명망 있는 지은이 최재석 고려대 명예교수는 신라왕실의 왕위계승과 관련하여 한국 고대사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다가 깜짝 놀랐다.
고대 한일관계사에 대한 연구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연구(?)랍시고 해놓은 엉터리 주장들을 그대로 답습한 것은 물론, '실증사학'이라는 등의 찬사까지 받으며 버젓이 정설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학자의 양심상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태를 좌시할 수 없었던 지은이는 고대 한일관계사의 진실에 대해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우리의 정사인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내용이 서로 다르면 '일본서기' 내용을 따르고 '삼국사기' 내용을 믿지 않는,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이 만연하고 있는 사태를 비판하는 논문을 발표한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인 1985년의 일이었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과연 조작되었는가'라는 제목의 이 논문에서 지은이는 '삼국사기'가 푸대접을 받고 있는 상황을 비판했으나, 그의 비판은 묵살되고 지은이는 학계에서 '투명인간'이 되었다.
이번에 출간된 '삼국사기 불신론 비판'은 평생을 학자의 양심에 비추어 역사적 진실을 밝히고자 애써온 구순의 노학자의 아마도 '마지막 투쟁'의 결과물이다.
1985년의 논문을 토대로 하고 지금까지의 학문적 성과를 반영하여 '삼국사기 불신론'을 향한 생애 최후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고대 한일관계사를 왜곡한 대표적인 일본인 식민사학자 8명(쓰다 소키치, 마에마 교사쿠, 오타 아키라, 이마니시 류, 스에마쓰 야스카즈, 이케우치 히로시, 미시나 쇼에이, 이노우에 히데오)의 주장을 분석했다.
항목별로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그들의 주장이 견강부회에 불과하다는 것을 낱낱이 밝혀낸다.
책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1부에서는 식민사학자 8명의 엉터리 주장을 개괄적으로 비판한다.
먼저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소개하고 불신론을 주장한 학자들의 계보, 그리고 그들이 불신하는 대목과 터무니없는 근거까지를 낱낱이 분석하면서 그들이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를 대하는 이중적인 잣대를 비판한다.
2부에서는 그중에서도 특히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식민사학의 대들보라 부를 만한 2명의 식민사학자인 스에마쓰 야스카즈의 '한국고대사론'과 이마니시 류의 '신라상고사론'에 대해 한층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학문이 아니라 제국주의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정치선전에 불과한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이 왜 오늘날까지 면면히 살아 있을까?
지은이는 "일본이 1945년 패전 후에도 이런 비학문적인 정치선전을 계속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국인 학자들의 책임이 크다"고 일갈한다.
이유는 단순하고 명확하다.
"이병도를 필두로 김철준, 이홍직, 이기백, 이기동, 문경현을 거쳐 김현구에 이르기까지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왜곡시킨 한국고대사와 고대 한일관계사를 거의 그대로 추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일제 식민사학 극복에 앞장서야 마땅한 한국사학계에서 오히려 일제 식민사학을 추종하는데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잘못된 주장을 고칠 까닭이 있겠는가?"라고 한탄하며 학문이 죽고 왜곡이 득세하는 역사학계의 현실에 통분한다.
최재석 저/만권당 간/324쪽/2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