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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레저

    반 고흐, 그를 만나러 떠나는 파리여행

    • 2016-03-25 10:02

    파리에서 만난 인상주의 ② 빈센트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반 고흐 미술관 소장(사진=투어퍼즐 제공)

     

    학창시절 미술시간에 집중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반 고흐를 모르는 이는 극히 드물 것이다. 발작을 일으켜 자신의 귀를 잘라버린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만나게 되면 그 충격적인 스토리는 어느새 중요치 않게 된다.

    그는 네덜란드 출신의 대표적인 인상주의 작가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인 자화상을 비롯해 별이 빛나는 밤, 아를르의 포룸 광장, 해바라기 등을 보면 알 수 있듯 강렬한 색채와 격렬한 필치를 사용하여 자신만의 작풍을 확립했다.

    반 고흐의 발자취를 제대로 따라가려면 파리로 떠나자. 그는 파리 근교의 오베르로 이주하여 허름한 여인숙에 기거하며 의사인 가셰의 보호 아래 그림만 그리는 생활을 지속했다.

    ◇ 목사가 되고 싶었던 반 고흐

    20대 청년 반 고흐는 보리나주의 탄광지대에서 임시 전도사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하지만 목사가 지님직한 권위를 전혀 갖지 못했던 반 고흐는 위원회로부터 해고당하고 만다. 광부보다 더 광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고흐를 그들은 목사로서의 자질이 없다고 인정한 것.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른 이유가 해고의 이유가 된 것이다.

    목사의 꿈이 좌절되자 반 고흐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설교로 전하지 못하는 말씀을 그림으로 전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품어온 터였다.

    1885년 작 [감자 먹는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그렸던 반 고흐의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그림의 하이라이트는 '손'이다. 감자를 먹는 그 손으로 그들은 땅을 일구고 감자를 심고, 감자를 거뒀다. 반 고흐는 화가의 손도 농부들의 손처럼 정직하길 바랐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 오르세 미술관 소장(사진=투어퍼즐 제공)

     

    ◇ 프랑스로 간 반 고흐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반 고흐는 1886년 앤트워프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지만 취향과 기질, 그림의 스타일이 달랐던 반 고흐는 곧 아카데미의 적이 되었다.

    동생 태오의 권유로 인상주의 회화가 유행했던 파리로 행하지만 인상주의의 전성기로 인생을 축제처럼 보내는 그들과 반 고흐는 이질감을 느낀다.

    그는 흥청거리는 파리를, 그곳의 가볍게 살랑거리는 그림들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성공이 끔찍스럽다. 인상파 화가들이 성공해서 축제를 열 수도 있겠지,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 축제의 다음날이다.

    나의 침실, 오르세 미술관 소장(사진=투어퍼즐 제공)

     

    ◇ 파리 인상파와는 다른 '색'의 사용

    파리를 떠나 찾은 프랑스 남부 '아를'에서 반 고흐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시기와 함께 두 번째 좌절을 맞게 된다. 아를에 있는 동안 그의 걸작들이 쏟아져 나온다.

    인상주의의 두 거장 모네와 반 고흐는 색에 대한 접근과 활용에 대해 큰 차이를 보인다.

    빛이 사물에 비치는 그 형상 그대로,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린다는 출발 점을 끝까지 고수한 모네와 달리 반 고흐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화면 안, 공간 안에서의 적합한 색을 사용하며 어떠한 공간을 표현해 내는 수단으로서 활용한다.

    아를에 머물면서 그렸던 [노란집]과 [밤의 까페], [나의 침실]은 실제로 보이는 대로 그렸다기보다는 그가 느꼈던 그 공간에 대한 느낌과 정서가 색으로 표현됐다고 할 수 있다.

    노란집, 반 고흐 미술관 소장(사진=투어퍼즐 제공)

     

    ◇ 반 고흐와 폴 고갱

    화가 공동체를 꿈꾸어왔던 반 고흐는 바로 아를의 노란 집에서 그의 꿈을 실현하고자 했다.

    여러 화가들에게 화가 공동체에 대한 그의 의견을 어필하지만 오직 고갱만이 1888년 10월 아를에서 함께 작업하게 된다. 이마저도 동생 태오의 도움으로 가능했던 일이다.

    존경에 마지않던 고갱과 함께 보낸 시간은 고작 3개월도 되지 않지만 독립적인 성향이 강했던 고갱과 반 고흐의 옹골찬 고집은 끊임없이 충돌했다. 늘 상 부딪치고 고갱에게 멸시 당하던 반 고흐는 그의 자화상을 보고 귀가 안 닮았다는 고갱의 소릴 듣고 귀를 잘라 자화상에 대조한다.

    몇 번의 말다툼과 예기치 못한 자해. 반 고흐는 12월 24일 신고를 받은 경찰에 의해 시립병원으로 보내지게 되고 꿈으로 설레던 '노란 집'의 행복한 날들은 그렇게 저물었다.

    폴 가셰 박사, 오르세 미술관 소장(사진=투어퍼즐 제공)

     

    ◇ 반 고흐와 오베르 쉬아즈 그리고 가셰 박사

    병원의 창문 밖으로 누렇게 익은 벼를 수확하는 농부들을 보며 반 고흐는 다시금 삶과 그림에 대한 강한 의지를 다시금 동생 태오에게 내비친다.

    태오는 정신과 의사이자 예술애호가였던 가셰 박사가 있는 오베르 쉬아즈로 이동할 권을 권한다. 가셰 박사와의 만남은 필히 악연이었으리라.

    오직 반 고흐를 살게 할 수 있었던 '그림'. 그림만이 자신의 광기를 치유해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반 고흐에게 가셰 박사는 '그림이 반 고흐를 미치게 한 것'이라고 그를 몰아세운다.

    가셰와의 다툼 후 집을 뛰쳐나간 반 고흐는 권총을 발사했고 이틀 후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카페 테라스, 크뢸러뮐러 미술관 소장(사진=투어퍼즐 제공)

     

    ◇ 반 고흐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

    사람들은 반 고흐와 그의 작품에서 무턱대고 죽음을 읽으려 하고 광기를 끄집어 내려 한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반 고흐는 발작이 일어난-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 순간에는 붓을 들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는 반 고흐는 한 번도 충동적인 적이 없었다. 그는 그림 한 편을 그리기 위해 거인적인 끈기와 기다림을 반복했고 그림 하나하나에 엄청난 에너지와 시간을 쏟아 부었다.

    그는 캔버스에 풍경을 담기 위해 무릎을 꿇기도 하고 온 몸으로 비를 맞기도 하고, 컴컴한 어둠 속을 헤매기도 한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 그는 해바라기였고 아를의 햇빛이었으며, 오베르 쉬아즈의 길들이었다.

    이런 그에게서 사람들은 광기를 봤지만 그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광기를 다스렸다.

    유럽 개발여행의 통합 솔루션 투어퍼즐(www.tourpuzzle.co.kr)은 반 고흐의 작품을 직접 만날 수 있는 <파리 오르세="" 미술관="" 투어="">와 <반 고흐="" 마을="" 투어:베르사이유="" 궁전="" +="" 반="" 고흐="" 마을="" +="" 모네="" 정원="" 투어="">를 선보이고 있다.

    취재협조=투어퍼즐(02-777-4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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