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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절 논란, 사회통합 해치는 정치적 의도 농후한 행위"

정치 일반

    "건국절 논란, 사회통합 해치는 정치적 의도 농후한 행위"

    해방직후 여운형, 김구 등 정치적 거물 다섯명의 암살을 다룬 책 '암살'

    - 이승만, 분단이 아니었으면 정권을 못 잡았을 사람
    - "해방공간에서 암살로 이득을 본 자들은 해방을 싫어했던 자들"
    - "암살, 친일 청산과 통일 문제를 좌우대립으로 바꿔치우는 계기의 서막"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1 (18:30~20:00)
    ■ 방송일 : 2016년 8월 18일 (목) 오후 7시 5분
    ■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 출 연 : 박태균 교수 (서울대 국제대학원)

    ◇ 정관용> 얼마 전 광복절을 지냈는데요. 해방은 됐는데 왜 우리가 분단이 되었을까. 식민 잔재는 왜 청산하지 못 했을까. 그리고 또 건국절 논란은 왜 계속 이어질까. 참 궁금한 것들이 많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모습에 결정적으로 아주 중요한 배경이 되는 게 45년부터 48년, 이른바 해방정국 이렇게 불리어지는 그 기간이죠. 이 기간 동안에 암살당한 사람들, 그 이야기를 묶은 책이 나왔습니다. 책의 제목이 '암살'이고요. 부제가 '왜곡된 현대사의 서막'이에요. 이 책을 쓰신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박태균 교수를 초대했습니다. 박 교수, 어서 오십시오.

    ◆ 박태균> 네, 안녕하세요.

    ◇ 정관용> 이런 책을 써야겠다는 발상은 언제 하시게 됐어요?

    ◆ 박태균> 그건 좀 오래 됐습니다. 처음에 제가 이 시기를 공부를 하면서 사실 그 당시에 굉장히 많은 테러가 일어났는데 그중에서도 아주 중요했던 정치 지도자들이 암살로 살해된 사건들이 일어났어요. 그런데 이 사건들이 이분들 암살 사건이 일어나면서 그 사건을 계기로 해서 국면, 국면이 자꾸 바뀌는 거예요. 이게 어떤 해방정국에서 흘러가는 흐름들을 바꾸는 중요한 전환점의 역할을 했다는 걸 발견하게 됐고요. 또 하나는 이렇게 중요한 분들이었고 죽었고 이분들에 대해서 수사가 들어갔는데 이상하게 또 암살범들은 다 잡혔습니다. 그런데 배후는 하나도 밝혀진 것이 없어요. 물론 이 암살범을 잡아도 배후를 찾는 건 쉽지 않지만 암살범을 다 잡는다는 것도 사실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 당시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황을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았는데 배후는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제가 또 하나 좀 계기가 됐던 건 오스트리아에 있는 잘츠부르크에서 하는 세미나가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주로 젊은 학자들이 가서 참여해서 하는 세미나인데 그 세미나에서 우연하게 한국에서 주한미국대사를 하셨던 분을 만났어요. 이분이 거기에 강의를 하러 오셨는데 전 에모리 대학 총장을 하셨고요. 또 한국에서 주한미국대사를 김영삼 정부 시기 때 하셨던 분이에요.

    ◇ 정관용> 누구죠?

    ◆ 박태균> 레이니 대사라고. 그런데 이분이 그날 강의 끝나고 여러 가지 얘기를 하는데 이분이 해방정국 때 미국의 CIC 요원으로 오셨었던 경험이 있다는 거예요.

    ◇ 정관용> 아, 그래요.

    ◆ 박태균> 미군정에요. 그런데 이분이 오자마자 처음 맡았던 사건이 장덕수 암살사건이었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이분이 조사를 맡았는데 이걸 쭉 조사를 하다 보니까 윗선이 조금씩 올라가는 선이 보이더래요.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 상부에서 명령이 내려왔다는 거예요. 조사를 스탑해라.

    ◇ 정관용> 미국 상부에서?

    ◆ 박태균> 미군정 상부죠. 그래서 그걸 밝히다 중간에 스탑을 시켰다는 거예요. 그 얘기를 저한테 해 주시더라고요. 그러면서 이게 밝혀야 될 일이 굉장히 많다. 그때부터 해서 본격적으로 좀 이런 사건들을 좀 밝혀봐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됐죠.

    ◇ 정관용> 45년에 암살된 현준혁, 송진우.

    ◆ 박태균> 현준혁.

    ◇ 정관용> 그다음에 47년에 여운형, 장덕수. 49년에 우리가 다 아는 김구. 45년부터 49년까지 가운데 5명의 암살사건을 다루는데 이때 이분들만 암살당한 건 아니잖아요.

    ◆ 박태균> 그럼요. 굉장히 암살도 많았고요. 테러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 정관용> 많았었고. 그런데 특히 이 딱 5명에 주목하시게 된 계기는?

    ◆ 박태균> 아무래도 제일 중요한 분들이죠. 그리고 또 이분들이 돌아가신 직후에 많은 정치적 격변들이.

    ◇ 정관용> 변화가 있었다. 그럼 한 분, 한 분 우선 청취자 분들 잘 모를 테니까 소개 좀 해 주세요. 첫번째가?

    ◆ 박태균> 현준혁 씨인데요. 현준혁 씨 같은 경우에는 좌파이긴 하지만 일반적인 평가는 민족주의자입니다. 그런데 이분 같으면...

    ◇ 정관용> 그분 직함이 뭐였죠?

    ◆ 박태균> 그 당시에 건국준비위원회, 북쪽에 건국준비위원회를 맡고 계셨고요. 그쪽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셨어요.

    ◇ 정관용> 평양에서 활동하시던.

    ◆ 박태균> 그렇죠. 이분이 좌파이긴 하지만 민족주의적 성향이 굉장히 강했고요. 또 이분은 경성제국대학을 나온 엘리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대구사범학교 교사로 재직을 했는데 그 시기가 또 박정희 대통령이 대구사범학교에 있을 때하고 약간 겹치는 시기예요. 그런데 이분은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약간 좌파의 성향은 있지만 좌우익을 다 아우를 수 있는 성격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러니까 이 영향력이라는 게 굉장히 클 수가 있고요. 특히 평양이라는 지역이 저희가 지금 북한의 중심이 평양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지만 그 당시에는 평양은 한국의 기독교의 중심이었고요. 한국의 상업자본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민족주의 우파들의 힘이 굉장히 강한 그런 지역이었기 때문에 사실은 갑자기 좌익이나 이런 사람들이 와서 리더가 됐을 경우에 사회를 이끌어 가기 굉장히 어렵고 오히려 현준혁 씨와 같이 좌파의 성향은 있으면서, 좌파 성향이 있어야 소련군과의 여러 가지 소통이 되는 거죠.

    ◇ 정관용> 그렇지만.

    ◆ 박태균> 그러면서도 민족주의를 포괄할 수 있는.

    ◇ 정관용> 그래서 우파 민족주의에서도 동의할 수 있는.

    ◆ 박태균> 네. 그러니까 현준혁 씨는 당시에 우파 민족주의 북한의 지도자였던 조만식 씨와도 가까운 관계였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사실 북한 쪽의 정치인들을 좀 통합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죠.

    ◇ 정관용> 알겠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에 암살된 송진우.

    ◆ 박태균> 네, 그분은 현준혁 씨하고 좀 다른. 이분은 민족주의 우파 쪽의 아주 대표적인.

    ◇ 정관용> 그렇죠. 한국민주당 소속이었죠?

    ◆ 박태균> 네, 한국민주당 창당의 주역이고요. 동아일보하고 고려대학을 설립하신 김성수 씨와 아주 친한 친구 분이십니다.

    ◇ 정관용> 그렇죠.

    ◆ 박태균> 이분들하고 같이 일본 유학을 하셨고 갔다 오신 이후에 우파 지식인 그룹의 아주 핵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사실 40년대 초에도 아직 해방되기 전에 단파 방송을 같이 듣는다든가 하면서 정치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셨던 분입니다.

    ◇ 정관용> 그다음 47년 7월에 있었던 여운형. 몽양 여운형.

    ◆ 박태균> 네. 그러니까 여운형 선생은 그래도 상대적으로 김구 선생하고 다른 분들에 비해서 많이 알려지신 그런 분인데 오해도 많이 받습니다. 이분이 공산주의자 아니냐? 이런 오해도 많이 받는데 사실 이분은 젊었을 때 초기에 상해에서 약간 공산주의 조직에 몸을 담았던 적은 있어요. 그런데 그 이전에도 기독교 쪽하고 관련을 했었고요. 30년대 이후에는 그쪽 조직하고 전혀 손을 잡지 않고 이분은 언론 활동도 하고 조선체육회 회장도 하고 하면서 사실은 이 당시에 나라를 찾아야 된다는 혈기를 가진 사람들의 가장 중심적인 어떤 큰 형님이라고 할까요. 예컨대 송기정 옹께서 베를린 마라톤 가기 전에도 여운형 선생을 만나서 의논을 했다고 하고요. 해방 이후에도 역시 조선체육회를 또 맡아서 이끌었던. 그러니까 이분은 사실 가운데서, 특히 서울에서 활동을 하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게 미군정이나 소련군하고 다 소통이 되는 사람이었고요. 양쪽하고. 그다음에 좌우를 다 아우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 정관용> 본인은 어쨌든 좌파적 성향으로 출발했고.

    ◆ 박태균> 그렇죠.

    ◇ 정관용> 그 당시 근로인민당을 이끌었던 근로인민당 당수니까.

    ◆ 박태균> 원래는 조선인민당을 하다가요. 이 조선인민당이 사실 공산주의자들이 남조선 노동당 만든다 하면서 이걸 깨버려요. 그러고 나서 근로인민당을 만들거든요. 그러니까 이분은 사실은 공산당에 합류하거나 이럴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니까 사실은 우파 정치인들 입장에서도 여운형이라는 사람이 무서운 거예요. 미군정하고 소통이 되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좌파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이 사람은 미군정, 소군정 다 되는데다가 좌우와 다 친하니까 사실은 자기들의 주도권을 위협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겁니다.

    ◇ 정관용> 엄청 큰 그릇이죠.

    ◆ 박태균> 그렇죠. 사실은 그 당시로 보면.

    ◇ 정관용> 그다음 같은 해 47년 12월 역시 한민당의 장덕수.

    ◆ 박태균> 네. 지금은 장덕수 씨 그러면 거의 모르시는 분들이 훨씬 더 많을 거예요. 그런데 45년 12월에 돌아가신 송진우 씨나 47년에 돌아가신 장덕수 씨는 한국민주당의 가장 핵심적인 분들이고요. 지금의 우리 현대 정치의 기원을 이루는 분들이라고 보면 됩니다.

    ◇ 정관용> 그렇죠.

    ◆ 박태균> 그러니까 한국민주당밖에 당시에는 정당이 없었고요. 또 거기 가장 핵심적이고 두 분이 다 돌아가셨을 때가 수석총무를 하실 때입니다. 그런데 이게 송진우 씨가 돌아가셨을 때는 그 당시가 모스크바 3상 협정이 알려지면서 찬반탁 운동의 막 논란이 시작되는 시점. 그러니까 한번 중요하게 국면 전환이 되는 때고. 장덕수 씨가 죽었을 때는 이때가 미국 쪽에서 한반도 문제를 미소공동위원회에서 UN으로 이관을 하면서 남한에서 단독정부를 수립하려고 하는 그 시점입니다. 그러니까 이때가 한국민주당이 유일한 정당으로써 대한민국 정부에 참여할 때 어떤 방식으로 참여할 건가를 고민하던 시기예요. 그러니까 그 굉장히 중요한 시기...

    ◇ 정관용> 경로 설정의 분기점.

    ◆ 박태균> 그렇죠. 그런 분인데.

    ◇ 정관용> 거기까지 하고요. 49년 6월 26일 이건 우리 모두 다 아는 김구 선생.

    ◆ 박태균> 네. 굉장히 중요한 시기입니다. 이 시기가 3일인가 4일 있다가 주한미군이 철수를 해요. 그 시기 자체가 안보적으로나 국내 정치적으로나 너무나 중요한 시기였고요. 그 시기 조금 넘어서 49년 전체를 보면 이 49년이 48년에 4.3사건, 여순사건 있고 나서 소위 빨갱이 숙청이라고 해서 그 이후에 모든 공공기관에서 좌익 혐의 있는 사람들 숙청이 이루어지는 기간이고. 세계사 쪽으로 보면 이 시기가 소련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중국이 공산혁명을 성공하는 아주 중요한 시기입니다.

    ◇ 정관용> 그렇죠.

    ◆ 박태균> 그런데 그 전환점에서 또 김구 선생이 암살을 당한 거죠.

    ◇ 정관용> 그런데 우리 청취자분들이 좀 생소한 이름들도 있고 해서 간략히 일단 소개는 드렸는데. 설명 말씀을 들어보면 우파 민족주의자도 있고 좌파 민족주의자도 있고 중간에 섰던 분들이 좀 많고. 그러니까 이게 돌아가신 분들이 꼭 좌파만 다 돌아가신 것도 아니고.

    ◆ 박태균> 아닙니다.

    ◇ 정관용> 우파만 돌아가신 것도 아니고 그러면 이들을 암살한 사람들은 어때요?

    ◆ 박태균> 제가 보면 잡혔던 암살범들 하고 그 바로 위에 있었던 배후들을 보면 이분들이 그렇게 자기들 정치적 색채가 뚜렷한 분들이 아니에요. 제가 보기에는 이분들은 전문 암살범들이에요.

    ◇ 정관용> 아.

    ◆ 박태균> 그러니까 전문적으로 그걸 받아서.

    ◇ 정관용> 킬러.

    ◆ 박태균> 네. 그걸 받아서 하는 사람들입니다.

    ◇ 정관용> 청부 킬러.

    ◆ 박태균> 그렇게 돼서 보면 이 5개 사건의 암살범들이 대부분 좀 엮여 있습니다. 조사를 하다 보면.

    ◇ 정관용> 그래요?

    ◆ 박태균> 이분들이 서로 연결이 돼요. 이게 왜 그런가를 보면 실은 이분들이 서로 간에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고 그 안에서 서로가 활동을 하면서 뭔가 청부를 받았다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까 왜 그러면 이 성향이 다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닌 이 사람들이냐. 제가 이분들을 설명드린 것처럼 이분들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해요. 그러니까 이분들이 활동을 하는 걸로 인해서 정치적으로 손해를 보는 사람들이 생기는 겁니다.

    ◇ 정관용> 그렇겠죠.

    ◆ 박태균> 그렇다면 이분들이 뭔가 정치 무대에서 없어져야 된다라는 생각을 사실 좌익이나 우익의 실세 정치인들은 할 수가 있는 부분들이 있어요.

    ◇ 정관용> 그렇죠.

    ◆ 박태균> 그러니까 그런 부분들 속에서 결국은 이해관계 속에서 발생한 사건.

    ◇ 정관용> 그 손해 보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 박태균> 아무래도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몇 분 같은 경우에는 이분들이 우익 민족주의 그룹의 핵심이기 때문에 이분들이 핵심이 됐을 때 우익 내에서 주도권을 잡고자 하는 세력들은 아무래도 위협을 느낄 수 있고요. 또 현준혁이랑 여운형 같은 경우에는 좌익적 색채가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 아우를 수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좌파 입장에서 굉장히 위험한 사람이 될 수 있죠. 그러니까 사실은 이 두 분 같은 경우에는 암살당한 직후에 이게 공산주의자들이 죽였다 하는 소문이 돌 정도로.

    ◇ 정관용> 현준혁, 여운형의 경우.

    ◆ 박태균> 네. 그런 얘기가 돌 정도로 그 정도의 영향력이 있고 또 그렇게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적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게 법치가 살아 있으면 정치적으로 적이 되는 사람들을 함부로 해코지를 할 수 없지만.

    ◇ 정관용> 물론 그렇죠.

    ◆ 박태균> 1945년 이후의 상황은.

    ◇ 정관용> 그런데 잠깐만요. 이 5명 가운데 두 분은 그러면 박 교수의 표현에 의하면 좌파에서 헤게모니를 잡고자 하는 사람들이 손해봤을 것이다.

    ◆ 박태균> 아니죠. 헤게모니를 잡고자 하는 사람들도 이익을 봤죠. 이분들이 없어짐으로 인해서.

    ◇ 정관용> 그러니까요.

    ◆ 박태균> 그러니까 그런 소문이 돌았는데 암살범들을 잡고 보니까 사실 이쪽하고 관련이 없는.

    ◇ 정관용> 좌파하고 관련이 없었다?

    ◆ 박태균> 네,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다 조사를 해 보니까 이 사람들의 특정한 어떤 정치적인 성향을 정확히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기본적으로 그 암살범들이나 그 사람들이 속했던 조직과 가까운 조직들은 아무래도 극우적인.

    ◇ 정관용> 우파적인.

    ◆ 박태균> 네. 우파적이면서도 아주 극우적인. 예컨대 중국에서 테러활동을 주로 했던 남의사라든가 이런 조직들하고 예전부터 관련이 좀 있었던 그런 방식으로 얘기를 하다 보니까 사실 그것 때문에 좌파는 혐의를 벗었죠.

    ◇ 정관용> 혐의를 벗었고.

    ◆ 박태균> 여운형 씨 같은 경우는 너무나 많은 테러를 당했어요. 돌아가시기, 암살당하기 최종 전까지. 그런데 그 테러를 당한 걸 보면 우파에서 한 테러도 있었지만 좌파에서 한 테러도 있었어요.

    ◇ 정관용> 있었다는 거죠.

    ◆ 박태균> 그런데 그때는 어쨌든 다 벗어났는데. 결정적으로 죽을 때는 그때는 우파 쪽에 배후가 있었던 것이 아니냐. 암살범들이나 그 배후를 봤을 때.

    ◇ 정관용> 그 우파세력의 핵심은 그러면 뭐라고 봐야 됩니까?

    ◆ 박태균> 이게 명확한 배후를 밝히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 정관용> 명확한 근거가 없으니까.

    ◆ 박태균> 네. 그러니까 그거는 근거를 기본적으로 남기지도 않은 거고요. 그 당시 사회라는 게 사실 이 1945년 이후 사회라는 게 너무 혼란된 사회였어요. 누가 어디 사는지도 모르고 북에서 내려오고 해외에서 들어오고 옮기고 이런 것들이 자유롭기 때문에.

    ◇ 정관용> 또 정당도 수천 개 있었고.

    ◆ 박태균> 그렇죠. 그런데 그중에 정당다운 정당은 거의 없었다라고 보면 되고요. 그리고 실제 정당에 누가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인적인 상황을 제대로 체크할 수 없어요.

    ◇ 정관용> 좌파라고 하는데 사실 프락치이고.

    ◆ 박태균> 그렇죠.

    ◇ 정관용> 수두룩하죠, 그런 일들이.

    ◆ 박태균> 그러니까 이런 사건들이 났을 때는 장덕수 암살사건이 아주 대표적인데 이 사건 딱 나오고 나서 ‘아, 이건 김구 쪽에서 죽인 거다’ 이 얘기가 쭉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김구 선생이 관여되어 있는 그런 단체에 소속된 사람들이 그 배후에 연관이 된 거예요. 사실은 정당이라든가 조직이라는 게 그 당시에는 중간에 간부들이 들어오거나 이러면 누가 들어오거나 그러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어요. 그냥 들어오면 ‘그래 동지 우리 같이 하자’. 예컨대 안두희 같은 경우에도 제가 얘기를 들어보면.

    ◇ 정관용> 김구 암살범.

    ◆ 박태균> 잘 아는 사이였다는 거예요.

    ◇ 정관용> 김구 선생하고.

    ◆ 박태균> 네. 그러니까 안두희가 올라갈 때 그 밑에 층에 있었던 비서들이 ‘어, 또 왔어?’ 그러고 올려보냈다는 거예요. 올려보내고 좀 이따가 총소리가 났다는 거죠.

    ◇ 정관용> 그러면 이 부제를 ‘왜곡된 현대사의 서막’이라고 했단 말이에요.

    ◆ 박태균> 네.

    ◇ 정관용> 이런 암살로 인해서 우리 현대사가 구부러졌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무엇무엇이 구부러진 거예요, 이 암살로 인해서?

    ◆ 박태균> 저는 두 가지 부분을 좀 크게 생각을 합니다. 하나는 해방 직후에 저희가 갔어야 되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희가 식민지를 겪어왔고 열강들 사이에서 많은 괴로움을 겪었고 이제 그 과정 속에서 결국은 해방이 됐으니까 우리가 외국과의 그런 협력 속에서 어떤 독립되고 통일된 정부 또 민주적인 정부를 수립해야 되는 길이다. 이게 딱 정해져 있는데 이런 사건들을 겪으면서 구도가 바뀐 거예요. 그러니까 해방 직후가 딱 해방이 됐으면 우리가 돼야 되는 건 민족주의운동을 했던 사람들. 새로운 나라를 끌어갈 사람들과 나라를 팔아먹거나 아니면 불의의 전쟁에 협력한 사람들. 이걸 이렇게 구분이 딱 돼야 하는데.

    ◇ 정관용> 그렇죠.

    ◆ 박태균> 사실 송진우 암살사건 전후를 계기로 해서 이게 민족과 반민족의 구도가 아니고 좌와 우의 구도가 된 거예요. 그러니까 좌우대립이 돼 버린 겁니다.

    ◇ 정관용> 그렇죠. 그러면서 분단 구도로 가는 거죠.

    ◆ 박태균> 그렇죠. 그러니까 이념의 구도로 가버리는 거죠. 그런데 이게 저희가 사실 이념구도 문제가 아닙니다. 그게 한 가지. 나중 부분에도 그런 굴곡이 또 있었고요. 두번째 문제는 저는 이런 이념이나 그것과 관계없이 테러와 같은 과거사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이런 부분들이 있을 때 저희가 이런 것들을 밝혀야 되거든요. 그때 그때 밝혀서 이런 사건이 더 일어나지 않도록 가야 되는데 굉장히 이 사건도 그러고 넘어가고 그냥 일화나 야화가 돼버린 거예요, 이런 사건들이. 그 이후에도 50년대에도 테러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국도극장 앞에서도 테러가 일어나고 장면 부총리 암살시도도 있었고. 그런데 이런 사건들을 다 보면 그냥 그 사건을 했던 사람들만 딱 밝히고 말지, 그 뒤에 배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은.

    ◇ 정관용> 못 밝힌다.

    ◆ 박태균> 네, 조사도 안 하고.

    ◇ 정관용> 청부업자들만 그냥 드러난다.

    ◆ 박태균> 그렇죠. 그것도 뭐 제대로 조사가 이루어지고 처벌이 이루어졌는지도 모르겠고.

    ◇ 정관용> 알겠습니다. 이런 암살들이 없었다면 구도가 민족주의 대 반민족분자. 그래서 친일청산으로 가고 통일을 지향하고 이렇게 갔어야 하는데 친일청산이 실패하고 좌절되고 그리고 분단이 고착화되는 방식으로 갔다. 그거군요.

    ◆ 박태균> 결국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 배후를 굳이 따진다면 저는 사실 해방을 싫어하셨던 분들.

    ◇ 정관용> 친일분자들.

    ◆ 박태균> 그렇죠. 그리고 민족과 반민족의 구도가 아니고 좌와 우의 구도가 된 거예요. 그러니까 좌우대립이 돼 버린 겁니다.
    . 이런 입장에서 보면 사실은 암살에 대해서 돌아가신 분들은 눈엣가시거든요. 이분들은 민족주의운동을 하셨던 분들이고 그걸 통해서 또 통일독립국가를 지향했던 사람들이고. 그런 부분에서 저희가 추론할 수 있고.

    ◇ 정관용> 알겠습니다.

    ◆ 박태균> 또 연결지을 수는 있는 거죠.

    ◇ 정관용> 친일잔재 청산에 저항하던 사람들, 그건 쭉 금방 눈에 들어옵니다. 분단정부라도 어쨌든 단독정부 수립이 급하다. 해서 결국 그렇게 정권을 잡은 게 이승만 정부 아닙니까?

    ◆ 박태균> 그렇죠.

    ◇ 정관용> 그렇죠?

    ◆ 박태균> 네. 그런데 그게 결국은 급하다라고 만들었는데 그건 저는 이승만뿐만 아니라 김일성 쪽도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해요. 그러니까 결국 양쪽은 분단정부가 아니면 정권을 못 잡을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런데 논리 자체는 그렇게라도 먼저 세워야 된다는 논리였는데 결국 그렇게 세워서 나타난 결론은 전쟁을 겪었고요.

    ◇ 정관용> 그렇죠.

    ◆ 박태균> 그 이후에 지금 60년이 넘도록 저희는 항상 불안 속에 살고 있는 거예요.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처음에 그 선택이 이후에 우리 역사를 어떻게 끌고 갔는가도 좀 냉철하게 생각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 정관용> 오늘 모신 김에 최근 건국절 논란 또 일잖아요. 어떻게 보고 계세요?

    ◆ 박태균> 건국절이냐 아니냐는 걸 정치적으로 해석해서 진영논리로 가버린다는 거죠. 저는 이건 진영의 문제가 아니고 48년에 그런 일이 있었다라는 걸 저희가 역사적 사실로 알면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걸 진영논리로 해서 건국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구분을 시켜버리는. 그러니까 저는 이게 어떤 정치인이든지 입만 열면 하는 얘기가 사회통합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건국절 논란이라는 걸 계속 만들어내는 건 저는 사회통합을 완전히 해치는 행위라고 생각을 해요.

    ◇ 정관용> 그런데 그 날을 건국절로, 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하자라고 하는 주장의 논리적인 근거는 조금 아까 우리 얘기했던 남한만의 단독정부라도 우선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깔려 있지 않습니까?

    ◆ 박태균> 그런데 그것이 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저도 부인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런데 저희가 어떤 날이 어떤 의미를 갖는다라고 얘기를 할 때는 그날에 있었던 여러 가지 사건들 중에 가장 의미 있는 날을 만들어야 되거든요.

    ◇ 정관용> 그렇죠.

    ◆ 박태균> 그런데 사실 8월 15일이라는 건 저희가 식민지, 남의 나라한테 지배당했던 것으로부터 벗어난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제가 볼 때는.

    ◇ 정관용> 1945년 8월 15일 해방.

    ◆ 박태균> 네. 그런데 그걸 건국절로 바꾸겠다고 하는 건 사실 저는 굉장히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보고요. 또 아까 말씀하셨던 날짜로 보더라도 사실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정부 수립을 했던 연설에도 본인이 마지막에 이게 건국 1년, 이런 얘기 안 썼습니다. 이분이 얘기하는 건 대한민국 건국 25년인가요? 그러니까 이분은 항상 대한민국 건국의 년수하고 일은 임시정부 수립일로부터 따진 겁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그렇게 얘기를 하는데 우리가 지금에 와서 그걸 건국이다, 이렇게 해서 하는 건 제가 보기에는 이건 정치적 의도라고 생각을 하는 거죠.

    ◇ 정관용> 알겠습니다. 참 혼란스러웠던 시기이지만 이런 암살들이 결국은 권력투쟁 와중에서 벌어진 건데 결국은 통일정부를 수립하자고 하는 민족주의세력이 권력투쟁에서 진 거죠.

    ◆ 박태균> 그렇죠.

    ◇ 정관용> 그리고 그들을 지게 만드는 데 이런 암살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 박태균> 저는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고요. 특히 저는 또 이걸 봐야 되는 게 교과서도 그렇고 분단은 미국과 소련의 분할점령 때문에 됐다고 하는데 분할점령된 나라가 우리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분단돼서 지금까지도 분단문제 해결되지 못하는 건 해방정국에서 이런 왜곡된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사실은 우리의 통일정부와 독립을 지켜내지 못했던 거죠.

    ◇ 정관용> 그렇죠. 권력을 잡고자 올바른 길보다는 쉬운 길을 택한 그런 사람들. 알겠습니다. 서울대학교 박태균 교수였습니다. 고맙습니다.

    ◆ 박태균>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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