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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의 맛] 떡집 사장님이 40년간 하루도 쉬지 못한 이유는?

생활/건강

    [장사의 맛] 떡집 사장님이 40년간 하루도 쉬지 못한 이유는?

    낙원떡집 이광순 사장

    외식시장의 전설로 불리는 사장님들이 들려주는 '장사의 철학', 그들의 이야기가 "장사나 해 볼까?" 생각하는 창업 꿈나무들과 장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700만 자영업자들에게 장사의 대한 마음을 새롭게 다지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칼럼을 시작한다. [편집자 주]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

     

    교토의 북쪽, 이마미야 신사 앞에는 '이치와'라는 가게가 있다. 천 년이 넘은 떡집이다. 이곳의 메뉴는 천 년 동안 오직 하나, 구운 인절미다. 아직도 주인이 직접 숯불 앞에 앉아 떡을 굽고 있다. 비교조차 부끄럽지만 그나마 한국인의 면을 세워주고 있는 떡집이 100년 된 '낙원떡집'이다.

    지난 100년간 한국처럼 심한 평지풍파를 겪은 나라도 드물 것이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으로 나라 전체가 폐허가 됐고 이후 세계가 경이로워할 만큼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루며 도시를 10년에 한 번씩 갈아엎었다. 그 소용돌이 안에서 그것도 낙원동 한 자리에서 100년을 지킨다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다. 노포가 별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스스로 달래보려는 위로다.

    ◇ 가장 무서운 건 입소문이다

    낙원동이 떡집으로 유명해진 이유는 1910년 한일병합조약 이후 궁 밖으로 쫓겨난 수라간 나인들이 낙원동에 터를 잡고 호구지책으로 궁중 떡을 빚어 팔면서라고 한다.

    "비원 근처 원서동에 상궁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있었어요. 우리 외할머니가 그 동네 살았고 그중 한 분을 알게 돼 궁중 떡 만드는 법을 전수받았지요."

    이광순 사장이 어머니께 전해들은 얘기다. 결국 '낙원떡집'의 원천기술은 궁의 수라간 상궁 가운데 한 사람의 솜씨라는 것이다, 아쉽게도 그 상궁에 대한 이야기는 3대째 낙원떡집을 이어온 이광순 사장조차 알지 못했다.

    '낙원떡집'의 역사는 일제 강점기였던 19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궁인에게 궁중 떡을 전수받은 故 고이뻐 할머니(이광순 사장의 외할머니)가 요즘으로 치면 창업주다.

    "외할머니는 어떤 분이셨나요?"

    아쉽게도 그는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별로 갖고 있지 않았다.

    "제대로 기억이 안나요. 늘 우리에겐 못난 떡만 주셔서 할머니가 미웠죠. 잘된 것은 팔아야 하니까 당연했던 건데 그때는 그걸 이해 못할 만큼 어렸어요."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

     

    해방을 맞은 후, 셋째 딸인 김인동(이광순 사장의 어머니)할머니가 떡집을 물려받았지만 곧 한국전쟁이 터졌다. 김인동 할머니는 충남까지 피난길을 가면서도 틈틈이 떡을 만들어 팔며 가족의 생계를 꾸렸다. 그리고 1953년 휴전을 하면서 다시 낙원동으로 올라와 별다른 이름도 없던 점포에 처음 '낙원떡집'이라는 상호를 붙이고 본격적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무서운 건 입소문이다. 맛있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낙원떡집'은 그야말로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정재계 인사들의 단골집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승만 대통령에서 박근혜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70여 년 간 청와대의 단골 떡집으로도 유명했다.

    "솔직히 청와대로 들어가는 떡은, 뭐가 달라도 다르지 않았나요? 그래야 했던 시절도 있었잖아요."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질문에 그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어머니는 청와대에서 주문하는 떡이라고 특별히 다르게 만든 적이 없었어요. 청와대 직원이 와도 가판대에 놓인 떡이나 썰고 있는 떡을 내놨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실수하면 안 되니까 신경은 더 쓰지만 다르게 만들지는 않아요."

    열아홉부터 어머니를 도와 같이 떡을 만들던 맏딸 이광순 사장은 1980년 10월 '낙원떡집'을 정식으로 이어받았다. 그때 나이 서른다섯이었다. 5남매 중 이광순 사장을 제외한 나머지 넷은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어머니도 함께였다. 어머니는 LA에서 셋째 아들과 함께 떡집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만들던 그 떡 맛을 보기는 어렵다고 한다. 미국 쌀은 보기도 좋고 밥을 해도 훌륭한데 막상 떡을 해 놓으면 쫄깃하지가 않고 뻣뻣해진다니 왜 우리 음식은 우리 땅에서 나오는 재료로 만들어야 하는지 그 해답이 나온다. 그런데 이광순 사장만 한국에 남게 된 이유는 뭘까?

    "바깥양반이 안 간다고 해서 나는 못 갔어요. 한국에 남아서 나라를 지켜야 한다나 뭐라나...(웃음)"

    남편 김정귀씨는 이후 '낙원떡집'을 함께 이끌어 가는, 없어서는 안 될 파트너로 35년간 호흡을 맞춰 왔다.

    ◇ 지킬 것은 지킨다

    낙원떡집 이광순 사장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

     

    당시 방송 출연을 요청 하고자 여러 번 시도 끝에 이광순 사장과 통화할 수 있었다. 그는 다리가 아파 치료 삼아 수영을 다닌다고 했다. 쌀을 씻고 불려서 만들어야 하는 떡은 무거운 대야를 이리 저리 들었다 놨다 해야 하기 때문에 허리와 관절이 남아나질 않는다.

    1980~90년대에는 목기에 떡을 담아 머리에 이고 배달을 했다고 한다. 쌀 한 말이면 8kg이고 떡으로 만들면 10kg 가까이 된다. 이것을 머리에 이고 서울 시내 안 가는 곳 없이 배달을 다녔다니 떡 방앗간 3년 하면 남아나는 뼛골이 없다는 말은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

    목동 cbs 스튜디오 대기실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적잖게 당황했다. 떡집에 걸린 사진 속 곱던 색시는 오간데 없고 그는 마치 펭귄처럼 뒤뚱거리며 걸었다. 떡집 하느라 망가진 양쪽 고관절을 모두 수술하고 허리디스크 수술도 두 번이나 했다니 몸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재활 치료도 6개월 이상 받고서야 그나마 걸을 수 있다고 한다.

    뒤뚱거리며 걸어오는 이광순 사장 뒤로 체격이 왜소한 노인이 떡을 싼 커다란 보자기를 들고 따라왔다. 남편 김정귀씨다. 맛이나 보라고 가져왔다면서 떡을 담은 목기를 가뿐하게 건네는데 나는 그것을 받아들다가 너무 무거워 그만 떨어뜨릴 뻔 했다. 목기쟁반에 담긴 갖가지 떡은 나로서는 들기도 힘들만큼 무거웠다. 왜소한 체격에 칠순을 훌쩍 넘긴 노인이 그렇게 가뿐히 들고 왔다는 게 믿기 힘들 정도였다. 이보다 몇 배나 무거운 떡을 머리에 이고 배달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지금껏 이광순 사장의 목과 척추가 남아있다는 게 더 신기했다.

    그와 처음 마주 앉았을 때 약간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너무 진한 짝짝이 눈썹과 비뚤비뚤 그린 붉은 립스틱 때문이었다. 서툰 화장은 이광순 사장이 얼마나 오랜만에 화장대에 앉았고 얼마나 오랜만에 바깥나들이를 했는지를 고스란히 말해주는 듯 했다.

    낙원동에 40년 가까이 터를 잡고 살았지만 약국이랑 사우나밖에 가 본 데가 없고 휴가도 한 번 못 가 봤다고 한다. 그러니 화장이 서툴 수밖에.

    '낙원떡집'은 1년 365일 연중무휴다. 하루도 쉬어본 적이 없단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가 뭘까?

    "떡 예약이 하루도 없는 날이 없었어요. 그러니 쉴 수가 있나요."

    맞춤 떡은 돌, 칠순 같은 잔치나 개업식, 기공식 같은 행사 등 미리 정해진 날에 맞추기 마련인데 떡은 미리 해 놓을 수가 없으니 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와 형제자매들 그리고 딸이 미국에 사는데도 비행기 한 번 못 타봤다는 그의 고된 삶이야말로 100년 전통의 낙원떡집을 유지케 하는 비결일 것이다. 이후 조카딸 결혼식이 있어서 드디어 LA에 갔다고 한다. 그런데 3일 만에 돌아왔단다. 일본도 아니고 어머니와 형제자매가 모두 있는 LA까지 가서 고작 3일이라니.

    요즘은 많은 달라졌지만 예전에는 아들이나 며느리가 가업을 이어받는 경우가 많았다. 어떻게 딸이 가업을 이어받게 되었을까?

    "나는 젊어서부터 솜씨가 메주였어요. 할 줄 아는 게 없었지. 그래도 성실은 해서 그저 시키는 일은 곧이곧대로 잘했지요. 떡 만드는 일도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만 했어요. 딴 짓 안하고"

    요즘 같으면 융통성이 없다는 말을 듣기 십상이겠지만 '낙원떡집'이 옛 맛 그대로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시키는 대로 딴 짓 안하고 곧이곧대로 하는 이광순 사장의 올곧은 성격 덕분이 아니었을까?

    대를 잇는 가게들의 최대 장점이자 단점은 큰 실패가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크고 작은 실수나 사고는 누구에게나 있을 터. 이광순 사장도 등골이 썰렁해지는 일이 여러 번이었다

    나라에서 태능 선수촌 지을 때 일이다. 개원식에 쓸 떡 6천개를 주문 받았다. 나름 정성을 들인다고 나무 도시락에 떡을 담았는데 당일 배달을 가서 열어보니 이상한 냄새가 났다.

    "떡 기름이 소나무 향과 합쳐지면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선수촌 관계자들한테 개원식에 떡을 못 쓰니 당신들이 책임지라며 눈물 쏙 빠지게 혼나고 서 트럭에 싣고 돌아오며 참 많이 울었다고 한다.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없던 때였어요. 그런데 동네 창피해서 그 떡을 가져올 수가 있어야죠. 냄새만 그렇지 떡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니어서 양로원에 주고 왔어요."

    그날 이후 음식 배상 보험을 들었다.

    ◇ 투박하지만 정직하게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

     

    요즘 '낙원떡집'에서 만드는 떡의 종류는 대략 30여 가지다. 오색경단, 호박설기, 무지개떡, 두텁떡 등 생경한 떡들이 더 많다. 오래 전에 먹었던 궁중떡이다. 물론 백설기, 인절미, 절편, 찰떡 등 우리에게 익숙한 떡들도 있다.

    그 중 가장 자신 있는 떡이 뭐냐고 묻자, 그는 잠시 망설였다. 모두 자식 같은 떡들인데 하나를 콕 찍으라니 망설이는 게 당연하다. 잠시 후 이광순 사장이 '낙원떡집' 최고로 꼽은 떡은 현미에 쑥을 넣어 만든 '쑥 인절미'였다. 아이 주먹만한 크기의 쑥 인절미는 식사대용으로 만들었는데 제일 잘 나가는 떡이기도 하다. 제주도 한라산에서 자라는 쑥을 사용한다. 일 년에 이곳에서 쓰는 쑥만 8000kg이 넘는다.

    이광순 사장은 지금도 여전히 어머니에게 전수받은 그대로 떡을 빚는다.

    "모양만 내서는 떡의 진미를 내지 못해요. 뭔가 가미를 해도 떡만을 잃어버립니다. 떡은 옛날 방식으로 빚는 게 제일 맛있어요."

    3대째 쓰고 있는 나무 금고(좌), 찾는 사람이 없어 쉬고 있는 떡살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

     

    옛날 방식을 고집하는 '낙원떡집'에는 세월을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물건들이 꽤 남아 있다. 3대째 쓰고 있다는 금고와 떡칼을 비롯해 지금은 찾는 사람이 없어서 쉬고 있는 떡살이 아직도 자리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이곳의 떡은 이광순 사장을 닮았다. 투박하지만 정직하다. 어떤 유행과 세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전통의 맛을 가졌다.

    하지만 사람들의 입맛은 변했다. 떡을 좋아하지 않거나 잘 먹지 않는 사람도 많다. 생일 축하나 잔치도 떡 대신 케이크로 한다. 동네 골목도 빵집이 접수한 지 오래다.

    '낙원떡집'의 4대 가업을 이을 준비를 하고 있는 이광순 사장의 아들 김승모 씨가 젊은 사람의 입맛과 취향을 고려한 떡을 만들고 싶어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명문대 경영학과를 나온 재원답게 백화점과 편의점 등 새로운 판로를 구상 중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이 일일이 떡을 빚는 수작업으로는 수급 자체가 불가능하다. 공장에서 떡을 찍어내야 할 것이다. '떡은 손맛'이라고 믿는 이광순 사장은 그런 아들이 부담스럽고 걱정된다.

    "그 애는 이론만 갖고 덤벼요. 떡은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할 줄 알아야 하는데…, 일 벌릴 생각만 하지 일 배울 생각을 안 해. 그럼 안 되는데…"

    쌀가루만 해도 손으로 치는 것과 기계로 치는 것은 맛이 하늘과 땅 차이인데 공장에서 찍어내면 떡 맛을 버릴 게 뻔하다는 게 이광순 사장의 생각이다.

    "낙원떡집 이름 달고 가맹점 하면 돈 좀 버실텐데요?"

    농담 섞인 질문에 그는 부드럽게 받아친다.

    "돈 많으면 뭐하나. 사는 날까지 밥이나 먹고 가면 되지."

    이광순 사장은 정직하게 전통방식으로 떡을 만들어 팔고 밥 안 굶고 살면 되는 시절을 살았다. 하지만 4대로 이어지는 김승모 씨에겐 100년 전통을 계승해야 된다는 무게에 떡의 상품성과 경쟁력을 회복하는 일까지 더해져 '낙원떡집'을 운영하기가 녹록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100년, 200년 된 떡집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 일을 '낙원떡집'이 해줬으면 좋겠다. 아니면 어떤 가게가 할 수 있겠나? 하지만 고객이 외면한다면 그 가게는 존재할 수 없다.

    100년, 200년을 이어가기 위해 사람들의 입맛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는 '낙원떡집'의 과제다. 우리 것에 대한 애정으로만 호소하기에 사람들의 입맛은 간사하고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은 너무 강렬하니까.

    그렇다고 이 무거운 짐을 '낙원떡집'에만 지우는 건 너무 가혹하다. 개인이 가게 하나를 100년을 지켜줬다면 더불어 그 음식이 전통음식이라면 이젠 나라와 국민도 관심을 갖고 지켜줄 의무가 있다. 그래야 우리도 천년 떡집을 갖게 될 것 아닌가.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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