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 (자료사진/노컷뉴스)
재판거래와 법관사찰 의혹의 정점으로 지목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의 컴퓨터 하드디스크가 이미 복구할 수 없게 디가우징 처리된 것으로 드러났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은 26일 사법행정처에 임의제출을 요구한 하드디스크를 받지 못했다며, 그중 일부는 이미 디가우징됐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밝혔다.
검찰 관계자는 "법원행정처로부터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사용했던 컴퓨터가 지난 해 10월 디가우징 됐다는 사실을 전달받았다"며 "박병대 전 대법관의 컴퓨터도 디가우징 됐다"고 말했다.
디가우징은 강력한 자기장을 이용해 하드디스크 등에 저장된 정보를 복구할 수 없도록 지우는 기술이다.
이에 대해 대법원 측은 전산장비운영관리지침에 따라 퇴임자의 컴퓨터 하드디스크들을 디가우징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대법관 이상이 사용하던 컴퓨터는 직무 특성상 재사용이 불가능해 '사용할 수 없는 장비'에 해당하고, 따라서 '완전히 소거조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 전 대법원장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디가우징이 실시된 지난 해 10월은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따른 대법원의 2차 조사가 착수된 시점이다. 박 전 법원행정처장은 지난 해 6월 퇴임했다.
대법원이 관련 규정을 지켰다고는 하나 삭제 시점이 사법권 남용 의혹으로 실체 파악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비등했던 시기임을 감안할 때 향후 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와 관련해 검찰은 향후 대법원의 디가우징 경위를 파악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앞서 검찰은 지난 19일 대법원에 양승태 사법부 시절 법원행정처에서 사용한 컴퓨터 하드디스크와 대법관들의 관용차 운행일지, 법인카드 사용내역 등을 제출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날 법원행정처를 통해 자체 조사 결과 의혹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분류한 410개 문건 파일을 원본 형태로 제출했다. 또 이들 문건을 어떻게 추출했는지 보여주는 자료도 검찰에 넘겼다.
문제는 대법원이 개인정보와 공무상 비밀 등을 이유로 컴퓨터 하드디스크 '실물'은 제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검찰은 향후 재판에서 증거능력 인정 여부 등을 이유로 실물을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이날도 "수사에 꼭 필요하다"며 기존 입장을 재확인 했다.
검찰 관계자는 "대법원이 문건을 추출하는 데 사용한 키워드는 법원행정처 실무자들이 선정한 것"이라며 "검찰이 이걸 가지고 추후 재판 거래 의혹은 사실 무근이라고 결론을 낸다면 누구도 그 결론을 수긍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대법원 자체 조사에서 410개 문건을 추출할 때 사용한 22개 검색어는 법관 사찰에 방점이 찍힌 것으로, 이후 불거진 '재판 거래'를 중점적으로 살피는 데는 부적절하다.
여기에 대법원은 공용폰과 공용이메일의 기록, 법인카드 내역, 관용차 운행일지 역시 제출하지 않았다. 다만 컴퓨터 하드디스크의 임의제출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밝혔다. 검찰 관계자도 "대법원이 (하드디스크에서 법원이 자체적으로 추출한 문건은 재판에서 인정 되지 않는다는 점 등) 증거능력 문제 알고 있어서 절대 못 주겠다는 입장은 아닌 걸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검찰은 일단 제출 받은 자료를 분석해 적용 혐의 등을 구체화한 뒤 하드디스크 실물 등 추가 자료제출 요구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일단은 비협조적인 자료제출을 근거로 조만간 압수수색을 시도할 가능성은 낮은 셈이다.
하지만 검찰은 확보하고자 하는 문건의 0.1%에 해당하는 410개 파일만 가지고 사법행정권 남용의 실체를 확인할 수 없다는 입장이라, 대법원의 방침이 유지된다면 검찰의 강제수사는 불가피할 것으로 분석된다.
검찰 안팎에선 수사팀이 검찰과 법원이 대립하는 듯한 프레임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명분을 쌓아가되, 수사의 기초가 되는 자료 확보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