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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스토리', 스크린수 열세지만 보는것만으로 세상 바뀐다 믿어"



문화 일반

    "'허스토리', 스크린수 열세지만 보는것만으로 세상 바뀐다 믿어"



    - 10년 전부터 위안부 이야기 준비
    - 자료집 귀퉁이에서 찾은 '관부재판'
    - 단장 실존인물 김문숙 이사장, 자비로 역사관 운영
    - 할머니들의 50년 인생 무게 느껴지길




    ■ 방 송 : FM 98.1 (18:30~19:55)
    ■ 방송일 : 2018년 7월 3일 (화) 오후
    ■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 출 연 : 민규동 감독

    ◇ 정관용> 방금 들으신 소리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허스토리의 일부분이었습니다. 바로 지난 일요일 위안부 김복득 할머님 세상을 떠나셨죠. 이처럼 일본군에 동원된 전쟁 피해자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데요. 허스토리라고 하는 영화는 일본 법원에서 일본군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최초의 판결을 이끌어낸 관부재판이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이걸 소재로 해서 만든 영화예요. 영화 허스토리를 연출한 민규동 감독을 오늘 스튜디오에 초대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민규동> 네, 반갑습니다.

    ◇ 정관용> 수고 많으셨습니다. 먼저 관부재판이 뭔지 좀 청취자분들한테 알려주세요.

    ◆ 민규동> 관부재판은 92년도부터 98년까지 6년 동안 23번의 재판이 있었는데요. 시모노세키에서 재판이 있었고요. 시모노세키가 일어로 하관이라고 하는데요. 하관의 '관' 자랑 부산의 '부' 자를 따서 관부재판이라고 불렀었습니다.

    ◇ 정관용> 관부연락선이 있었죠.

    ◆ 민규동> 지금도 있죠.

    ◇ 정관용> 지금도 있나요?

     

    ◆ 민규동> 지금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재판을 특히 부산의 한 여성 사업가가 직접 원고단을 10명을 이끌고.

    ◇ 정관용> 원고단 10명.

    ◆ 민규동> 위안부 피해자 3명 그리고 근로정신대 피해자 7명을 합쳐서 총 10명의 원고단들이 일본 정부를 피고석에 앉히고 재판을 벌였고요. 1심에서 유의미한 일부 인용이 있었는데요. 그게 국가의 도의적 책임을 인정하고 입법부작위의 이유로 위안부 피해자 3명에게 30만 엔씩 배상을 하도록 판결을 내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최초의 일본 정부의 잘못을 인정했고 그 이후로 이제 많은 재판들이 있었는데요.

    ◇ 정관용> 30만 엔씩 정부가 배상하라?

    ◆ 민규동> 정부가 각 피해자 3명에게 배상해라.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은 패소했고요.

    ◇ 정관용> 그게 1심이었죠?

    ◆ 민규동> 1심이었습니다.

    ◇ 정관용> 그리고 2심 가서는요.

    ◆ 민규동> 2심 히로시마 고등법원에서는 일본 정부의 항소로 다시 패소가 됐고요. 2003년도 최고재판소에 가서는 모든 재판이 다 기각되면서.

    ◇ 정관용> 결국은 패소.

    ◆ 민규동> 결국은 패소가 됐죠.

    ◇ 정관용> 최종 확정은 패소이지만 그래도 시모노세키에서 열린 1심 재판에서 유일하게 일본 정부가 배상하라라는 판결이 내려진 적이 있다, 이거로군요. 확정된 건 아니지만.

    ◆ 민규동> 그래서 일본 사법부의 쿠데타라고 인용됐었고요. 일본 정부가 깜짝 놀라서 바로 유감 표명하고 항소를 바로 했었죠.

    ◇ 정관용> 이것 말고도 사실 근로정신대로 피해입으신 분들은 수없이 많은 소송들을 제기했어요.

    ◆ 민규동> 이후로도 소송 계속 하고 있고요. 아직도 대법원 계류 중인 소송도 있습니다.

    ◇ 정관용> 그렇죠. 그런데 일본 법정에서는 패소, 패소, 패소. 그렇죠? 한국 법정에서는 일부 대법원 확정까지 승소를 받아낸 것도 있습니다, 일본 기업을 상대로. 하지만 일본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쭉 패소인 줄 알았더니 이렇게 일부 승소한 게 있었군요.

    민규동 감독.

     

    ◆ 민규동> 아주 유의미한 기억인데 그런데 불행하게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고 역사의 한 페이지에 제대로 된 기록이 없다는 게 아주 안타까운 상황을 만들게 됐습니다.

    ◇ 정관용> 민 감독님은 이걸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 민규동> 제가 10년 전부터 1940년대 배경의 위안부 이야기를 많이 준비했었는데요. 번번이 좌절이 됐었고 이걸 누가 보냐, 많이 불편하다라는 맥락에서 3년 정도 전에 다시 한 번 너무 빨리들 돌아가시니까 좀 다급한 마음에 다시 시나리오를 완성했었고 많은 자료와 국내에 있는 모든 증언집들을 살펴보다가 자료집 귀퉁이에 있는 작은 이 재판기록을 발견하게 됐고요. 재판의 유의미성도 있었는데 그 재판을 주변에서 지지하고 응원했던 원고단장이 아직 살아계셨고 그분이 아직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이 재판기록을 유네스코에 올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이제 가슴에 와닿아서 그분 시점으로 영화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생각하고 시작해 봤었죠.

    ◇ 정관용> 원고단의 단장이라는 분이 문정숙 씨.

    ◆ 민규동> 문정숙이라는 캐릭터로 영화에 등장하고요.

    ◇ 정관용> 등장하죠? 김희애 씨가 연기했죠.

    ◆ 민규동> 그렇죠.

    ◇ 정관용> 이분은 뭐하던 분이었어요, 원래?

    ◆ 민규동> 여행사 사장이셨고요. 그 이전에는 교육자로서 대학 시절에 또 있었고 이후에 부산에 와서 여성의전화를 처음으로 만들고 성폭력상담소를 처음으로 만들고 많은 여성의전화 직원들을 교육시키면서 확산시킨 여성 운동가로서 책을 7권이나 쓰셨고요. 굉장히 활발하게 인권운동을 하셨던 분이기는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제 기생관광의 실태를 발견하고 너무 놀라셔서 어떻게 이런 문제가 계속 반복되고 있을까 더 깊이 들어가다가 일본에 있는 위안부 할머니 소식을 알게 되고 일본으로 직접 찾아가서 자비를 들여 이 문제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그러다가 이제 재판까지 또 관여하게 됐었죠.

    ◇ 정관용> 그러니까 위안부 피해 할머니나 근로정신대피해 할머니들이 먼저 소송을 시작하고 있는데 도와준 게 아니라 이분이 일본 정부 상대로 소송해 봅시다, 이렇게 만드신 거예요?

    ◆ 민규동> 그렇죠. 동경에서는 그 이외에도 아주 유명하신 활동가분들이 소송을 하고 계셨고요. 이분은 부산 지역의 아직 이렇게 지원이 제대로 미치지 못한 분들을 찾아서 무료 변론을 하고 있던 변호사들을 찾아가서 재판을 좀 도와주십시오라고 사정해서 설득 끝에 그 변호사들과 함께 재판을 시작하게 됐었죠. 그러니까 시모노세키로 재판을 했던 게 아주 유효한 전략이었었는데요. 대부분 동경 심장부를 노렸었는데 많은 징용이나 위안부나 많은 피해자들이 시모노세키로 끌려가서 흩어졌었기 때문에 그쪽의 상징성을 살리고 비용도 좀 아낄 수 있는 가까운 위치였기 때문에 그 재판을 시모노세키에서 열자고 고집하셨고 동경에서 하자고 일본 정부가 첫 재판 2주일 전에 또 재판 연기 신청을 했었는데 6개월 동안 시민사회 탄원서를 얻어서 결국 그 시모노세키 재판을 지켜냈고 그것을 6년 동안 해서 유의미한 결과를 냈던 그런 과정이었습니다.

    ◇ 정관용> 아무리 무료 변론을 도와주시는 법조인들이 있다 손치더라도 부산에 살면서 계속 시모노세키 왔다 갔다 해야 하고.

    ◆ 민규동> 비용 많이 들었죠.

    ◇ 정관용> 그렇죠. 그 돈을 다 그분이 다 댄 거예요?

    ◆ 민규동> 그렇죠. 제가 직접 인터뷰했을 때에는 티켓 한 장 정부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했고 후원회원들과 함께 소소한 지지를 받으면서 직접 진행을 했었고요. 당시에 사실 1965년에 한일합정 이후에 이제 정부는 이미 보상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정부 차원에서 지원을 할 수 있는 명분이 사라진 상태였었기 때문에.

    ◇ 정관용> 그렇죠. 모든 게 다 끝난다, 그 한일협정으로.

    ◆ 민규동> 개인의 힘으로 정부와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 정관용> 그러니까 이 모든 비용도 이분과 후원금으로 창단했고 정부는 일절 지원이 없었고 그랬다는 거죠? 그런데 그분이 지금도 부산에 살아 계세요?

    ◆ 민규동> 지금도 92세의 노령으로.

    ◇ 정관용> 92세?

     

    ◆ 민규동> 조그만한 역사관을 만들어서.

    ◇ 정관용> 역사관을 만드셨어요?

    ◆ 민규동> 재판 기록을 거기에 찾아오는 분들에게 설명해 주고 유네스코 등재를 위해 아직도 노력하고.

    ◇ 정관용> 유네스코에 그 재판 기록을 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고.

    ◆ 민규동> 지금도 노력하고 계시죠.

    ◇ 정관용> 한때는 여행사에서 돈 많이 버셨는데.

    ◆ 민규동> 지금은 아주 조그마한 역사관을 운영하고 계신 것 같아요.

    ◇ 정관용> 그냥 그 역사기념관만?

    ◆ 민규동> 사비로 만드셔서요.

    ◇ 정관용> 벌써 20년 전이에요. 그 재판 98년 끝났으니까.

    ◆ 민규동> 그렇죠. 오래됐죠.

    ◇ 정관용> 가서 인터뷰하실 때 옛날 기억들을 말하면서 뭐라고 하시던가요?

    ◆ 민규동> 아주 기억들이 생생하시고요. 지금도 정말 사명감이라고 해야 할까요. 어떤 굉장한 강력한 의지가 아니고는 버텨낼 수 없을 것은 삶을 사시는 것 같았고요. 어떤 회한의 목소리를 내시기도 했습니다.

    ◇ 정관용> 어떤 회한.

    ◆ 민규동> 그다지 변한 게 없고 여전히 사죄를 받아내지 못했고 할머니들은 떠나시고. 물론 국민들의 시선이 예전보다는 훨씬 많은 지지를 보내고 있지만 내가 했던 행동들이 의미가 있었을까 그런 질문들을 또 가지고 계신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영화를 보시고는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해 주시더라고요. 후회스러운 삶이 아니고 제 영화 속에서도 후회하지 말라고 많이 위로하는데요. 내 삶이 헛되지 않았구나라고 많이 느끼시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정관용> 그런데 이제 민규동 감독은 이 영화를 철저히 재판 진행 과정 중심으로 쭉 그렸죠? 그리고 과거에 이 할머니들이 어떤 피해를 당했는지 직접적으로 영화에 나오지도 않는단 말이에요. 그렇죠?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겁니까?

    ◆ 민규동> 의도적으로 그 스타일을.

    ◇ 정관용> 어떤 의도요.

    ◆ 민규동> 사실 이번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말하기의 힘인데요.

    ◇ 정관용> 말하기의 힘.

    ◆ 민규동> 여성의 인생을 건 용기, 그 용기를 바탕으로 한 증언의 힘을 관객들이 느껴봤으면 하는 건데 왜냐하면 증거가 없는 싸움이기 때문에 오로지 증언만으로 그 진실을 증명해야 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증언을 이제 표현할 때 쉽사리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 예전에 가장 힘들었던 어떤 폭력의 순간을 재현함으로써 그것이 피해의 가장 핵심적인 이미지인 것처럼 관객들을 데려오면서 감각적으로 반일감정의 공분을 쉽게 자아내고 실제 피해 양상은 단순한 이미지로 보여줄 수 없는 굉장히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피해양상이 있는데요. 그래서 이미지에 호소하는 것보다 증언 때의 그 눈빛과 목소리와 떨림 그 자체만으로도 사실 하나의 플래시백이 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 정관용> 관객들이 그 말하기의 힘 그 증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머릿속으로 한번 상상해 보고 그려봐라. 내가 일부러 보여주지 않아도 그 피해가 어떤 것인지 상상해 봐라 그거군요?

    ◆ 민규동> 그 맥락도 있고요. 당시 10대 때 당했던 고통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를 저희가 호소하고 싶었던 건 아니고 그런 고통을 겪었었는데 이제 돌아와서 우리나라 사회가 손가락질과 비난 속에 수치심을 느끼고 살게 했었고 그다음에 견디고 살아온 50년의 세월의 짐이 얼마나 큰지. 그걸 깨뜨리는 그 고통이, 그 용기가 얼마나 큰지를 오히려 전달해 주고 싶었기 때문에 굳이 과거의 재현 장면이 이번 영화에서는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는 편이었을 수도 있는데요.

    ◇ 정관용>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일본군에 끌려가 당한 그 피해뿐 아니라 50년 인생의 무게, 역사의 무게. 그 전체를 한번 느껴봐라. 그건 다 그려줄 수가 없잖아요, 50년을. 그렇잖아요?

    ◆ 민규동> 그렇죠.

    ◇ 정관용> 김해숙 씨가, 배우. 피해 할머니 역할을 하셨죠.

    ◆ 민규동> 네, 네.

    ◇ 정관용> 연기가 어땠습니까? 제가 기사를 보니까 민규동 감독이 자꾸 울지 말라고 했는데 계속 우셨다고.

    ◆ 민규동> 네, 맞습니다. 워낙 연기야 완벽하신 분이라 연기 걱정은 없었는데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부담스럽게 본인이 과연 이 인물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될까라고 걱정하면서 오셨고 저는 왼손으로 연기해 주세요. 워낙 잘하시니까 좀 더 가볍게 해 주세요라고 부탁을 드렸는데 말씀드린 것처럼 그 50년의 그늘 속에서의 삶을 떠올릴 때마다 너무 이입을 하셔서 너무 눈물을 흘리시니까 제가 너무 계속 누르는 게 아주 힘든 작업이었고 제가 오케이 컷을 하면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시면서 자리에서 못 일어나셨거든요. 이분의 삶이 모든 순간이 눈물로 점철된 건 아니니까요, 일상이. 그래서 관객분들이 강요받는 느낌이 없도록 잘 절제하자라고 해서 촬영 끝나고 앓으셨죠, 많이.

    ◇ 정관용> 하긴 담담하게 말씀하시는 걸 관객들은 들으면서 담담한 표정을 보면서 관객들의 눈에서 눈물이 나와야죠.

    ◆ 민규동> 그렇죠. 영화가 선동이나 홍보를 위해서 쓰인다면 오히려 더 거리가 멀어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방식의 연출을 했던 것 같아요.

    ◇ 정관용> 김희애 씨나 김해숙 씨 영화 찍으면서 감독한테 뭐라고 하시던가요?

    ◆ 민규동> 김희애 선배님은 이제 신인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고. 제가 워낙 쉽사리 칭찬하지 않고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이제 기존의 이미지를 완전히 바꾸고 기대되는 어떤 연기 영역 밖에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라고 강력히 주문했기 때문에 부산사투리나 일어나 그리고 욕설과 그다음에 정말 남자 못지않은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역할. 그런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이 본인에게 쉬운 과정은 아니었고요. 또 김해숙 선생님은 다른 많은 배우들과 함께 진정성 있는, 진심 있는, 가식 없는 연기를 하시느라 너무 집중하셔서 몸이 실제로 아프셨고 분장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면서 그 모습을 찾아가는 그 과정이... 그분들의 고통이 저한테는 사실 행복한 순간이었었습니다.

    ◇ 정관용> 어느 인터뷰에 민규동 감독은 이 영화는 위안부 영화가 아니다. 여성영화다 이렇게 말씀하셨죠?

    ◆ 민규동> 딱 대변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닌데요. 겹쳐져 있죠. 제가 여성영화로서의 새로운 관점 하나를 관객분들이 봐줬었으면 했던 거는 위안부라는 단어 자체가 뭐랄까 민족의 희생양 뭔가 총체적으로 환원화된 대표적인 고통의 영역으로 그냥 상징화된 단어이다 보니까 우리가 다 안다고 생각하고 그 피해자상에 대해서 입체적인 관점이 없었기 때문에, 그동안 민족주의적 시선으로 봐왔던 반일감정의 공분을 위해서 쓰였던 접근 말고 피해자 한 분, 한 분을 개별 여성으로 보면 그 피해자상은 획일화되지 않은. 굉장히 다양하거든요. 그러니까 기존의 위안부상과 다른 접근을 하기 위해서 여성으로 본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영화 속에서 강조하고 싶어서 그랬고 실제 주변에서 도와줬던 많은 여성분들. 재판에서의 궁극적인 승리를 해내지는 못했지만 같이 재판을 진행했던 사람들의 진정한 승리를 이끌어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도 동시대 지금 이 영화가 만들어져야 될 이유를 생각해 보면 여성들이 맞닥뜨린 구조적인 모순과 폭력 속에서의 불합리라는 지점은 그렇게 아직도 많은 과제를 안고 있는 비슷한 영역의 일이라 그 지점을 좀 더 강조했던 것 같아요.

    ◇ 정관용> 그러니까 관객들한테는 이 영화를 보고 이걸 한번 느껴보십시오, 한마디로 말한다면.

    ◆ 민규동> 사실 여기서 세상은 안 바뀌어도 우리는 바뀌겠죠라는 대사가 있는데요. 실제 사죄의 전망이 그렇게 밝지 않고 할머니들은 돌아가시는데요. 지금까지의 투쟁이나 용기들이 헛되고 의미 없었다고 생각하지 않고요. 그 사이 우리가 많이 변했습니다. 많이 성숙해졌고요. 우리가 바뀐 만큼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에 지치지 말고 주눅들지 말고 서로 칭찬하고 격려해 주고 싶다 이런 느낌이 있었고요.

    ◇ 정관용> 세상은 안 바뀌어도 우리는 바뀌겠죠. 우리가 이미 바뀌고 있죠. 또 바뀌어 갑시다, 이런 거로군요.

    ◆ 민규동>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그만큼 바뀌는 거라고 믿습니다.

    ◇ 정관용> 그런데 허스토리, 글자 그대로 그녀의 이야기 이런 거 아닙니까? 그렇죠? 그런데 민규동 감독이 95년에 데뷔할 때 영화 제목이 허스토리였다고요? 저는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 민규동> 95년도에 단편영화 하나 만들었었는데요. 제2의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에 허스토리에 대한 언급이 있었습니다. 허스토리의 어원은 그리스어에서 이제 질문으로부터 얻은 아이디어라는 뜻이고요.

    ◇ 정관용> 저는 그것도 몰랐네.

    ◆ 민규동> 70년대 후반에 이제 허스토리라는 신조어가 생기면서 단어의 미국식 외향을 보면 그들의 이야기, 즉 남자들이 주로 역사의 중심에서 역사들을 많이 기록해 왔기 때문에 좀 더 소외된 상대적으로 소외된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아내자라는 이유로 그 신조어를 만들었고 허스토리는 실제로 사전에 있는 단어입니다. 뜻은 역사라는 뜻이고요. 영화 속에서는.

    ◇ 정관용> 제가 잘못 알고 있었군요.

    ◆ 민규동> 제가 단편영화 때는 레즈비언 여고생들의 이야기를 다뤘었고요. 소수자이면서 약자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뤘었고 이번 영화에서는 진짜 직역하자면 역사라는 제목이고요. 위안부 할머니 혹은 문정숙 캐릭터 그걸 지지했던 많은 여성들. 그녀의 이야기들과 현재진행형인 역사, 역사가 과거의 어느 순간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이어지는 시간의 이야기라는 맥락으로 제대로 된 의미가 이번에 사는 것 같아서 다시 과거 제목을 한번 소환해 봤습니다.

    ◇ 정관용> 저처럼 그 단어의 뜻을 정확히 몰랐던 사람들도 사실은 뜻이 통한 거잖아요.

    ◆ 민규동> 그렇죠. 정확히 이해하신 거긴 하죠.

    ◇ 정관용> 아니, 역사라고 하는 뜻이 허스토리에 있는지 잘 몰랐는데 저는 그냥 그녀의 이야기 이렇게 영어식으로 받아들였거든요. 그런데 사실은 그게 또 그 이야기인 거예요, 이번 영화에서는, 그렇죠?

    ◆ 민규동> 네, 맞습니다.

    ◇ 정관용> 어떻게 보면 그건 우연이군요, 데뷔작과 이번 영화와 제목이 같은 것은.

    ◆ 민규동> 제가 그때 한번 썼던 제목을 지금 한번 떠올려보면서 이 순간을 위해서 그때 제목을 썼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정관용> 그나저나 많은 관객들이 들어옵니까? 그리고 또 스크린은 많이 확보했어요? 요새 블록버스터가 워낙 많아서.

    ◆ 민규동> 스크린 많이 열세고요. 보시는 분들 반응은 뜨거운데 아직은 많은 관객분들 초대하지 못했고 좀 더 긴 시간 상영이 돼야.

    ◇ 정관용> 스크린이 몇 군데나 있습니까?

    ◆ 민규동> 이제 다음 주에 이제 마블 영화가 있으니까 많이 줄어들기는 하겠죠.

    ◇ 정관용> 아이고. 마블 영화들 문 열기 전에 빨리 가서 봐야겠네요.

    ◆ 민규동> 같이 가서 많이 보시면 좋죠, 마블 영화도.

    ◇ 정관용> 동시대 여성성을 같이 공감하고 느끼는 그런 계기로 삼을 만한 영화다, 이 말씀까지 듣고요. 영화의 엔딩크레딧 삽입곡 같이 좀 들으면서 오늘 인터뷰 마무리짓도록 하겠습니다. 자우림의 영원히 영원히 듣도록 합니다. 우리 민규동 감독 고맙습니다.

    ◆ 민규동>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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