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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동으로 시작한 남북 조문정치 이번에는 조의문



통일/북한

    파동으로 시작한 남북 조문정치 이번에는 조의문

    12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이희호 여사의 빈소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명의로 된 조의문이 놓여있다. (사진=박종민 기자) 확대이미지

     


    북한이 12일 이희호 여사의 서거에 대해 조의문과 조화를 보냈다. 북한의 이같은 조의 표시가 지금은 비교적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남북한의 조문 정치가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갈등과 분열의 계기가 된 적도 있었다.

    북한 김일성 주석 사망 때 조문 문제를 두고 남한에서는 격렬한 갈등이 빚어졌다. 김 주석은 북핵 위기가 절정으로 치닫는 가운데 남북정상회담을 약 2주 앞둔 1994년 7월 8일 숨졌다.

    당시 민주당 이부영 의원이 국회에서 "북에 조문사절을 보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질의하자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6·25 전범에게 무슨 조문이냐"는 반론이 제기됐다. 이른바 '조문 파동'이었다.

    정부는 조문을 불허했을 뿐 아니라 조의도 표시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전군에 특별경계령을 내리는 등 군사태세를 강화했다. 김 주석을 하늘처럼 떠받드는 북한이 김영삼 정부에 등을 돌리게 된 결정적 계기 중 하나가 됐다.

    반면 당시 빌 클린턴 행정부는 "고인의 지도력을 높이 평가한다"고 조의를 표시했다. 송두율 독일 뮌스터대 교수와 재미언론인 문명자 씨, 박보희 세계일보 사장 등이 민간 자격으로 김 주석을 조문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북한은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2009년 8월 21일 조문 사절단을 파견했다.

    김기남 조선노동당 증앙위원회 비서와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등 최고위급 6명으로 구성된 조문 사절단은 서해직항로를 이용해 방남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여러 나라에서 조문단이 오겠지만 남보다 먼저 가서 직접 애도의 뜻을 표하고 사절단급도 높이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조문은 2008년 2월 이명박 정부 출범 뒤 처음 이루어진 북한 당국자의 방남이었다. 조문사절단은 체류 일정을 하루 연장하며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 약 30분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당시 한나라당은 "교착상태에 있던 남북관계에서 대화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될 것", "남북간 대화 면담 기회를 적극 활용해야 할 것"이라며 적극적인 조문 정치를 주문했다.

    김 주석 때와는 달리 김정일 위원장이 사망했을 때는 우리 정부도 유연하게 대응했다. 2011년 12월 17일 김 위원장이 숨지자 정부는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과 관련해 북한 주민들에게 위로의 뜻을 전한다"며 사실상 조의를 표명했다.

    정부는 또 이희호 여사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등의 조문을 허용했다. 일체의 조의와 조문을 허용하지 않았던 김일성 주석 때와는 달리 민간에 한정하기는 했지만 조문을 허용한 것이다.

    이에 따라 이 여사는 12월 26일 평양 금수산기념궁전에서 헌화한 뒤 "6·15남북공동선언의 정신을 이어 하루속히 민족통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조의록에 썼다. 특히 이 여사는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 조의를 표시했고 김 위원장은 "멀리 찾아 줘 감사하다"고 답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남측 인사를 만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희호 여사의 서거에 대해 김정은 위원장이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을 통해 조화와 조의문을 전달한 점은 북미·남북관계가 주춤한 상황에서 나름의 예의를 표시한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이 여사가 김정일 위원장 장례 때 직접 조문했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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