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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투자 살린다고 인명 참사 방치하나



경제 일반

    기업 투자 살린다고 인명 참사 방치하나

    일본 수출 규제에 애꿎은 화평법·화관법 역적 취급
    "법 테두리 안에서 신속 처리하면 될 일…'신속대응'이 '안전'보다 중요한가"
    "어설픈 규제 완화는 이미 안전에 투자한 기업들 바보 만드는 일"

     

    최근 일본의 수출 규제가 일으킨 불똥이 엉뚱하게 한국 국민의 안전까지 위협하고 있다.

    노동·환경 규제법이 기업 투자의 발목을 잡고 있다며 제기되는 규제 완화 요구가 국민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법을 겨누고 있기 때문이다.

    ◇"화평법·화관법 때문에 투자 못해"…실제로는 사실 여부조차 불확실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지난 10일 청와대에서 열린 초청 간담회에서 기업인들은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이하 화평법)과 화학물질관리법(이하 화관법)이 기업 투자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고 비난한 것으로 알려졌다.

    화평법은 연간 1톤 이상 제조, 수입되는 기존 화학물질과 국내 시장에 새롭게 유입되는 신규 화학물질에 대해 반드시 유해성·위해성을 미리 심사하고, 만약 관리 기준을 지키지 않으면 이 물질을 담은 제품을 폐기·회수하도록 한 법이다.

    화관법은 유해화학물질을 취급하는 사업장이 안전을 위해 지켜야 할 필수기준을 담은 법으로, 2015년 이후 전면개정되면서 안전기준이 대폭 강화된 바 있다.

    이에 대해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도 "여러 규제를 개선해볼 여지가 있다는 건의가 있었다"며 "이 부분은 적극 검토하고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국회 대정부질문 답변에서 "국산화 관련 프로젝트가 진행되면 규제 절차 간소화나 규제 혁파 작업도 같이 진행하겠다"고 선언했다.

    또 청와대 회동을 전후로 보수언론과 경제지는 정부의 과잉 규제 탓에 기업들이 일본 수출 규제에도 제 때 대응하지 못한다며 일제히 규제 완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하지만 환경부는 이들이 제기한 불만사항 대부분은 아예 사실과 다르거나 이미 정부가 대책을 내놓은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실제로 2015년 화관법 개정 이후에도 공장 신‧증설 등으로 영업허가를 받은 사업장은 78.4% 증가한 반면, 화학사고는 41.5% 감소하는 등 많은 사업장들이 제대로 안전관리를 이행하고 있다.

    또 새로운 화학물질을 등록할 때 8천만원~5억원이 소요되고, 이렇게 의무 등록해야 하는 화학물질이 기존 500여개에서 7천여개로 급증했다는 언론 보도에 대해서도 실제 등록비용은 평균 1200만원에 불과하고, 등록 물질은 2030년까지 단계적으로 등록할 수 있다고 해명했다.

    해외 업체의 영업비밀 정보까지 등록해야 한다거나, EU의 화학물질등록평가제도(REACH)보다 규제강도가 높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환경운동연합 정미란 대안사회국 부장은 "화평법과 화관법은 가습기 살균제 참사와 구미 불산 가스 누출 사고를 계기로 강화됐던 오래된 법"이라며 "새롭지도 않은 내용이고, 유럽의 REACH 제도를 그대로 본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많은 기업들은 이미 유럽에 수출하기 위해 REACH를 잘 따르고 있는데도 유독 국내 법에는 불만을 토로한다"며 "오히려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들여 기업을 지원하고, 수년에 걸쳐 유예기간을 제공했는데도 더 규제를 완화하라면 과연 무엇을 양보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스럽다"고 비판했다.

     

    ◇"화학 안전 이미 투자한 기업은 바보인가…법 체계 지키면서 기업 민원 해결해야"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오히려 "과도한 규제 탓에 기업 투자가 위축된다"는 주장이야말로 '경제적 논리'가 아닌 '이념적 선전'에 가깝다고 지적한다.

    일부 기업들의 '엄살'과 실제 산업 현장의 애로사항인 '팩트'를 구분해 실제 문제상황에 선별적으로 대응한다면 오히려 해법은 간단하다는 것이다.

    세명대학교 강태선 보건안전공학과 교수는 "법령 자체를 건드리기 전에 법 테두리 안에서 신속히 처리할 수 있도록 환경부와 기업이 논의하는 작업이 먼저"라며 "한번 법 체계를 무너뜨리기 시작하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에 법령 자체를 바꾸는 작업은 '마지막 선택지'로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일본에 비해 한국의 노동자 산업재해 사망만인률은 3배에 달한다"며 "화학물질로 노동자와 시민이 목숨을 잃는 참사를 반복하는 문제가 덜 중요하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무엇보다도 논란이 된 두 법은 수많은 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갔던 가습기 살균제 참사와 구미 불산 참사 이후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던 만큼, 산업 현장의 의견을 반영하더라도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인하대학교 천영우 환경안전융합전공 교수는 "예를 들어 문제가 된 고순도 불산도 규제 때문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납품받는 편이 더 경제적이기 때문에 시설을 짓지 않은 것 아니냐"며 "일본 수출 규제가 이번 논란의 계기라기에는 화평법 등의 유예기간이 올해로 끝나면서 일부 준비하지 못한 기업들의 불평이 올초부터 제기돼왔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물론 화평, 화관법이 가장 강력한 규제이면서도, 도입 초기여서 운영 과정에 미숙한 부분이 있을 수 있다"면서 "하지만 이는 과거 참사가 워낙 참혹하기 때문에 급히 법을 정비했기 때문일 뿐, 그동안 해야 했던 일을 이제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 나아가 일부 기업들의 목소리를 따라 규제를 완화한다면 선제적으로 화학물질 안전에 적극 투자한 기업들이 '역차별'을 받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노동환경연구소 김신범 소장은 "산업 현장의 건실한 기업들은 오히려 '과연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 화학물질을 등록해도 정부가 제대로 평가할 것이냐'고 우려한다"며 "화평법, 화관법 같은 등록제도가 장기적으로는 모두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지금 기울인 노력이 더 값진 결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기업도 많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일부 기업들은 화학제품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관리 강화에 나서고 있다.

    지난달 19개 생활화학제품 제조·수입·유통사가 환경부 및 한국환경산업기술원, 시민단체와 맺은 생활화학제품 안전관리 자발적 협약이 대표적 사례다.

    이들 기업들은 협약 기간 동안 생활화학제품 내 원료 유해성평가 도구를 앞장서서 도입·적용하고, 생활화학제품의 전성분 공개 내용을 확대하며, 만약 이를 위반한 제품은 소비자가 손쉽게 교환·환불하도록 관련 체계를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규약에 참여했던 롯데쇼핑(주)롯데마트의 한 관계자는 "생활화학제품의 전성분 공개를 통해서 소비자들에게 보다 안전한 상품을 제공할 수 있다"며 "이를 통해 다른 기업과는 차별화되는 우리 회사만의 이미지를 쇄신시키는데도 긍정적인 효과를 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소장은 "구미 불산 누출 사고와 가습기 살균제 참사, 메탄올 실명 사고 등이 발생할 때마다 국민들은 화학 관련 기업들에 대해 극도의 불신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기업들도 이런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한다"며 "기업들이 노력하니까 믿어달라는데 보수언론은 오히려 국민 불신을 부추기는 셈"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기업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생겨야 기업이 자유롭게 경영할 수 있고, 성장의 밑거름을 얻을 것"이라며 "만약 정부가 좋은 법을 만들어도 일부 기업이 버티며 법을 어기고, 결국 규제가 완화된다면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도 경쟁력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나쁜 신호를 시장에 던져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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