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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붕괴 이끈 부마항쟁, 늦었지만 국가기념일 환영"



사회 일반

    "유신 붕괴 이끈 부마항쟁, 늦었지만 국가기념일 환영"

    부마민주항쟁 기념식, 대통령 첫 참석
    부산대 학생들 다락방 모여 선언문 작성
    유신 붕괴 이끈 시민들..진상규명도 기대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 1 (18:20~19:50)
    ■ 방송일 : 2019년 10월 16일 (수요일)
    ■ 진 행 : 정관용 (국민대 특임교수)
    ■ 출 연 : 정광민 (10.16 부마항쟁연구소 이사장)

     


    [인서트 / 배우 조진웅 : 1979년 10월 16일. 마침내 불꽃은 치솟았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투쟁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역사의 현장, 민중의 절대한 힘을 하나하나 찾아내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야한다. 민주 투사 만세.]

    ◇ 정관용> 오늘 경남대학교에서 열린 부마민주항쟁 40주년 기념식에서 배우 조진웅 씨가 낭독한 고(故) 임수생 시인의 ‘거대한 불꽃 부마민주항쟁’ 중 일부를 함께 들으셨습니다. 5.18운동, 6.10항쟁은 국가기념일로 일찌감치 지정이 됐는데 이보다 일찍 일어났던 부마항쟁. 40년이 흘러서야 국가기념일로 지정돼서 역사의 지각생이다 이런 평가를 받습니다. 당시 부마항쟁의 주역이신 부마항쟁연구소 정광민 이사장 연결해서 말씀 좀 듣겠습니다. 이사장님, 안녕하세요.

    ◆ 정광민> 안녕하십니까?

    ◇ 정관용> 문재인 대통령이 오늘 기념식에 참석하셨다고요?

    ◆ 정광민> 네, 대통령님께서 부마항쟁 기념식에 참석하셨습니다. 40년 만에 이런 일은 처음 있는 입니다.

    ◇ 정관용> 국가기념일이 된 게 처음이니까 대통령 참석도 처음이겠죠, 그렇죠? 40년 전 79년 10월 16일 어떤 일이 있었던 겁니까?

    ◆ 정광민> 부산대학교에서 박정희 그 당시 유신체제, 유신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투쟁, 민주화항쟁이 있었던 날입니다.

    ◇ 정관용> 우리 정광민 이사장께서 그 당시 부산대학교 학생이었나요?

    ◆ 정광민> 네, 부산대학교 경제학과 2학년 학생이었습니다.

    ◇ 정관용> 그날 시위를 주동하셨어요?

    ◆ 정광민> 네, 제가 우리가 15일부터 상대 학우들, 박준석, 전도걸, 엄태언 이런 친구들과 함께 저희들 집 다락방에 가서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하는 선언문을 등사를 하고 그걸 가지고 학우들에게 뿌리고 그렇게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 정관용> 처음 10월 16일 시위에는 그럼 부산대생 몇 명 정도가 함께한 겁니까?

    ◆ 정광민> 부산대생 처음 시작은 한 50명에서 100명 정도 시작했습니다만 나중에는 저희들 많게 보면 5000명 정도가 시위에 참가하지 않았나 그런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 정관용> 처음 그렇게 한 50명, 100명 시위를 했는데 어떻게 경찰이 들이닥쳤어요? 어떻게 됐어요?

    ◆ 정광민> 처음에는 시내로 진출하려고 하니까 당연히 경찰들이 대포를 쏘면서 무차별적으로 학내 진압을 시도하였습니다. 또 학생들이 1차 흩어졌지만 다시 도서관 앞에 재결집하고 거기서 유신철폐, 독재타도 구호도 외치고 선언문도 낭독하고 그러면서 다시 대오를 가다듬고 학생들이 삼삼오오 교외로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 정관용> 그래서 학교 밖으로 나가서.

    ◆ 정광민> 학교 바깥으로 나가서 그러니까 일부는 산업도로 쪽으로 해서 동래경찰서 쪽으로 진출했고 일부는 미남로터리로 진출하고 거기서 1차로 결집되고 그러나 학생들이 거기서 흩어지고 물러선 것이 아니라 다시 시내로 계속해서 시내로 나가고 결국은 남포동까지 가서 애국가를 부르고 시내에서 시민항쟁이 시작된 겁니다.

    ◇ 정관용> 그러니까 처음에 교내 시위였던 게 가두시위를 거쳐서 도심 한복판에서는 대규모 시위로.

    ◆ 정광민> 그리고 그것이 학생들과 시민들이 결합한 그야말로 시민항쟁이 됐습니다.

    부마민주항쟁 당시 부산 시내에 등장한 탱크. (사진=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연합뉴스)

     


    ◇ 정관용> 16일은 그랬고 그게 17, 18 계속 이어졌다면서요?

    ◆ 정광민> 17일은 동아대 학생들이 대규모로 시위에 진출했고요. 그러면서 17일날 항쟁의 불꽃이 더욱더 거세게 타올랐고 부산 시민하고 학생들 한 5만명 정도가 시위에 가담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18일날 비상계엄이 선포가 되죠.

    ◇ 정관용> 그리고 이건 부산뿐 아니라 마산으로, 창원으로 그 당시 쭉 이어졌죠?

    ◆ 정광민> 그리고 18일 비상계엄이 일어났지만 다시 마산에서 다시 경남대학생과 시민들이 말하자면 3. 15 정신으로 다시 거리에서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치고 대규모적인 항쟁이 있었습니다.

    ◇ 정관용> 16, 17, 18, 19, 20.

    ◆ 정광민> 20일까지 이어졌습니다.

    ◇ 정관용> 20일까지 이어지고 21일부터는 소강상태였던 이유가 있었을까요?

    ◆ 정광민> 1차적으로는 계엄 하에서 공수부대가 출동을 하고 이러면서 굉장히 가혹한 시민진압이 자행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전혀 무장하지 않은 평화적인 시민들의 상태에서 맨손으로 군인들의 폭행이나 폭력에 저항하기 어렵고 그런 점에서 사그라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정관용> 정광민 이사장은 언제 체포되셨어요?

    ◆ 정광민> 저는 나중에 한 20일 정도 해서 동래경찰서에 갔습니다.

    ◇ 정관용> 그래서 옥고를 치르셨죠?

    ◆ 정광민> 네, 저는 구속이 되고 당시로서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이 되었습니다.

    ◇ 정관용> 뿐만 아니라 목숨을 잃고 부상당하고 이런 분들 몇 분쯤 되십니까?

    ◆ 정광민> 현재로서는 사망자로 확정된 분은 창원에 있는 유치준 씨 한 분입니다만 아직까지 저희들이 이것이 유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고요. 좀 더 진상조사가 진행되고 해야 되고 또 저희들이 당시 연행된 사람 숫자만 해도 1500명이 넘는데 이 숫자 외에도 파악되지 않는 희생자도 있을 수 있고 그래서 이런 것들은 앞으로 좀 더 진상규명이 좀 활발하게 진행돼야 밝혀지지 않나 생각합니다.

    ◇ 정관용> 이게 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의 일이고 그리고 이런 항쟁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놓고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이 박 대통령 앞에서 싸우고 김재규가 총을 들어 박 대통령을 시해해서 그게 바로 유신의 몰락 10. 26 아니겠습니까?

    ◆ 정광민> 맞습니다. 그래서 저희들 10월 16일에서 20일까지의 닷새간의 마산 시민의 항쟁, 민주항쟁이 결국은 유신정권의 붕괴로 이어졌다. 이렇게 말씀할 수 있습니다.

    ◇ 정관용> 그런데 그 이후에 있었던 5. 18 또 그 이후에 있었던 6. 10보다도 제일 늦게 국가기념일이 된 거 좀 서운하지 않으세요?

    ◆ 정광민> 그동안 안타깝게 생각하고 참 그렇습니다.

    ◇ 정관용> 이제라도 됐네요. 또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 사과한다는 말씀 또 하셨고 소회가 어떠십니까?

    ◆ 정광민> 저는 늦었지만 굉장히 기쁘고 대통령께서 공식적으로 사과 말씀도 하고 또 진상규명이나 배상문제도 적극적으로 하겠다고 하신 데 대해서 누구보다도 환영하고 기쁘고 앞으로 좀 더 잘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 정관용> 진상규명, 배상, 이와 같은 앞으로의 과제들 남아 있죠. 말씀 잘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부마항쟁연구소 정광민 이사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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