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분만을 위해 강릉의 한 상급병원으로 온 동해지역 주민 이모(여.38)씨. (사진=유선희 기자)
저출산 시대에 정부가 각종 출산 장려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현실은 지역 내 분만 산부인과가 턱없이 부족해 농어촌 지역에 사는 임산부들의 인권이 침해받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분만 관련 의료가 대부분 민간에 맡겨져 있는데, 정작 민간에서는 업무 강도와 위험 리스크 등을 이유로 점점 문을 닫는 병원이 많아져 '정부 책임론'이 나오고 있다.
◇ 무거운 몸 이끌고 '원정출산'…방치된 공공의료지난 23일 강원 강릉지역의 한 상급병원 산부인과에서 취재진이 만난 임산부들은 대부분 동해와 삼척, 속초 등 타지역에서 온 이들이었다.
동해에서 왔다는 이모(여.38)씨는 취재진과 만나 "2년 전 첫째 아이도 이곳에서 분만했는데, 둘째도 이곳에서 출산할 예정"이라며 "동해에도 분만 산부인과가 두 곳이 있지만, 아무래도 규모가 작고 시설도 열악한 데다 저 역시 나이가 있다 보니 혹시 응급상황이 발생할 것 같아 이곳에서 진료·분만을 진행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동해에서부터 강릉까지 차로 이동하면 30~40분 정도 걸리지만, 그래도 안전하게 출산하고 싶은 마음에 계속 오가고 있다"며 "시골에서 산다는 이유로 의료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현실은 문제가 있다"고 꼬집었다.
만삭인 아내(25)와 함께 강릉의 상급병원을 찾은 김모(27.속초)씨는 "안전하고 건강한 출산을 위해 고민 끝에 강릉까지 오게 됐다"며 "만삭인 아내를 데리고 여기까지 와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했는데, 아마 고성이나 인제군처럼 1시간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지역은 더 불편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고성이나 인제군을 포함해 평창, 정선, 영월군 등 군단위 지역에는 분만 산부인과가 아예 없어 아이를 낳으려면 기본 1시간 이상 이동해 '원정 출산'을 해야 하는 실정이다.
◇ 강원도내 분만 산부인과 21곳…19곳이 '민간' 운영
빨간 선으로 나눈 지역이 강원도내 권역으로, 구글맵스를 이용해 도내에 위치한 21곳의 분만 산부인과를 별표모양으로 표시했다. (사진=구급맵스 발췌)
CBS노컷뉴스가 강원도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강원도내 분만 산부인과는 모두 21곳이다. 이중 국공립 2곳, 사립 19곳으로 사립병원이 월등히 높다. 특히 사립 분만 산부인과 중 16곳은 의원급으로, 대부분 어렵게 운영하는 병원들이다.
세분화해 살펴보면 춘천시가 5곳, 원주시 7곳, 강릉시 4곳, 동해시 2곳, 태백시 1곳, 속초시 1곳, 삼척시 1곳 등이다. 춘천과 원주, 강릉지역에서는 적어도 상급·종합병원이 1곳이라도 포함돼 있지만, 삼척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모두 의원급이다.
특히 속초와 양양, 고성, 인제까지 아우르는 강원 영북권 지역에서는 분만 산부인과가 '달랑' 1곳으로, 지역민들은 해당 의료시설 이용 접근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는 지역에서 건강하게 아이를 낳을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가운데 속초지역의 한 분만 산부인과에서는 최근 의료사고 논란에 휩싸여 곤욕을 치르고 있다(CBS노컷뉴스 12월 12, 14일).
해당 산부인과 관계자는 취재진과 만나 "현장에서 느끼는 어려운 점은 참 많은데, 그중 하나가 상급병원으로 이송이 필요한 산모임에도 배드(침대) 부족 등 여러 이유로 지체되는 경우"라며 "내원하지 않았던 임산부가 야간에 진통으로 갑자기 찾아오기도 하는데 이 경우 제대로 된 환자 기록도 없이 분만하게 돼 항상 위험을 안고 있다"고 현실을 전했다.
이어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지역민들도 건강하게 아이를 낳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21년 전 처음 병원을 세웠고, 사명감 하나로 어렵지만 힘겹게 운영하고 있다"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최선을 다했음에도 의료사고 논란 등 마녀사냥을 당하는 현실이 억울하다"고 성토했다.
이 같은 성토는 '로컬 분만병원이 사라지는 현실'과도 일맥상통하다. 실제 속초지역에서는 분만이 가능한 민간병원이 한 곳 더 있었지만, 지난해 5월쯤부터 분만은 하지 않고 진료만 하고 있다.
◇ 필수의료 공급 부족…거주지에 따라 '사망률' 직결
2015년 기준 인구 10만 명당 치료가능한 사망률로, 강원도는 3번째로 취약한 수준이다. (자료=보건복지부 제공)
실제 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분만처럼 생명과 직결되는데도 수익성이 낮은 '필수의료' 공급 부족 탓에 거주지역에 따라 사망률 격차가 발생하고 있다.
지난 2015년 기준 인구 10만 명당 치료가능한 사망률은 충청북도가 58.5명으로 가장 많았고, 경상북도 57.8명, 강원도 57.3명, 부산광역시 55.3명 등이 뒤를 이었다. 이는 치료가능 사망률이 가장 적은 서울시 44.6명과 비교해 차이를 보이는 수치다.
치료가능한 사망률은 양질의 보건의료 서비스가 제공되지 못해 발생하는 것으로, 지역 의료체계 수준을 보여주는 지표 중 하나다.
산모가 분만 의료기관에 도달하는 평균시간에서도 강원도는 매우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017년 기준 산모가 분만 의료기관에 도달하는 평균 시간은 서울시가 3.11분인 반면, 강원도는 33.36분으로 무려 10배 넘게 격차가 발생했다.
산모가 의료기관에 도달하는 평균시간이 가장 늦은 지역은 전라남도(42.41분)였으며, 경상북도(38.83분), 강원도(33.36분) 등 순서였다.
이에 대해 공공보건의료지원센터 임준 센터장은 "우리나라에서 분만과 신생아와 관련한 전체 인프라는 특정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부족한데, 그나마 있던 전문의 인력도 대도시에 집중하면서 신생아·모성 사망률이 농어촌에서 더 많이 발생하는 것이 문제"라며 "이는 명백히 인권 침해로, 건강한 삶을 누릴 기본 인프라를 만드는 것은 국가의 책임"이라고 못 박았다.
이어 "스웨덴의 경우 출산율이 낮았을 때 펼친 정책이 '사망률 제로'로, 아이를 낳다 죽거나 신생아가 숨지지 않도록 재원을 투입했다"며 "이는 곧 정부의 의지인 만큼, 정부는 임신 이후부터 출산까지 건강관리를 할 수 있는 '모자 의료체계'를 만들어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 내년부터 '책임의료기관' 시범 사업…관건은 '속도'
지역 내 공공·민간 협력 활성화를 위한 필수의료 권역·지역협의체 구성(예시). (사진=보건복지부 자료 발췌)
이와 같은 문제를 정부도 인식, 지난해부터 보건복지부는 관련 내용을 담아 '공공보건의료 발전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지역 간 의료격차를 해소하고, 필수의료 서비스를 제공하자는 것이 주요 추진 배경이다.
전국 시군구를 인구수, 의료기관까지 이동시간 등에 따라 70개로 '중 진료권'으로 나눠 '책임의료기관'을 세우자는 것이 골자다. 분만 취약지에 단순히 예산만 지원하는 기존방식에서 아예 패러다임을 전환한 정책안이다.
이에 따라 복지부는 지난 11월 '믿고 이용할 수 있는 지역의료 강화대책'을 발표해 내용을 보다 구체화했다. 강화대책에 근거해 우선 내년부터 거창권, 영월권, 상주권, 통영권, 진주권, 동해권, 의정부권, 대전 동부권, 부산 서부권 등 9개 지역에 공공병원 신축을 진행한다는 방침이다.
강원도에서는 시급성 등 이유에 따라 영월권(영월·정선·평창)과 동해권(태백·삼척·동해)이 우선 선정됐다.
하지만 아직 넘어야 하는 산은 많다. 정책이 실현되려면 예산이 무엇보다 절실하지만, 아직 뚜렷한 재원확보가 이뤄지지 않은 탓이다. 무엇보다 세부계획이 실행될 수 있는 법적 근거 마련이 중요한데, 법률 개정은 내년 총선 이후에야 기대해 볼 수 있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정재수 정책실장은 취재진과 통화에서 "사실 저희가 걱정하는 것은 속도로, 법적근거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정책이 오히려 꺾일까 봐 걱정"이라며 "중앙정부는 공공의료 제공 개념정리를 재정비해 의무와 책임을 다할 필요가 있고, 지방정부 역시 지역여건 등을 실시간 모니터링하며 거버넌스를 구축해 지역단위의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70개로 나눈 권역·지역 진료권 구분 결과. (사진=보건복지부 자료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