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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가지없다"며 구속하겠다는 '검사님'…기자가 받은 보이스피싱



사회 일반

    "싸가지없다"며 구속하겠다는 '검사님'…기자가 받은 보이스피싱

    • 2020-06-29 07:30

    "통장이 범행에 이용됐다" 개인정보 요구…"검사가 그래도 되냐" 따지자 끊어
    보이스피싱 피해 일평균 18억원…"전화 끊는다고 구속되는 일 없어"

    (사진=연합뉴스)

     

    "똑바로 얘기 안 해? 구속돼서 조사를 받아봐야 정신을 차리겠어? 구속되면 회사 잘리고 앞으로 취업도 못 해."

    지난 25일 오전 11시 30분께 기자는 '010'으로 시작하는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서울중앙지검 금융·기업범죄전담부 '김태우 수사관'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성은 기자 명의의 한 시중은행 통장이 2천300만원 규모의 '중고나라' 사기 범행에서 사용됐고, 17건의 고소·고발이 접수돼 검찰 수사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남성은 녹취를 시작해야 한다며 사람이 없는 조용한 곳으로 이동하라고 하더니 "담당 검사를 바꿔줄 테니 억울하면 피해를 입증받으라"고 했다.

    잠시 후 여성의 목소리로 바뀌었다. 검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명의도용 사건은 항상 당사자의 과실이 존재한다. 본인의 개인정보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이런 범죄가 발생한 것"이라며 "신상 정보를 확인해보고 앞으로 불구속 수사를 할지 구속 수사를 할지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연봉 수준과 예금·적금 규모, 사는 곳 등 질문에 기자가 소극적으로 대답하자 수화기 너머 인물은 반쯤 말을 놓고 "구속돼서 한번 탈탈 털려봐야 정신을 차리겠냐"라고 했다. 그는 "구속되면 회사에서 잘리는 것뿐 아니라 앞으로 취업도 안 되며 막노동을 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고 협박했다.

    "말투가 싸가지 없다. 실감 안 나냐. 구치소 가봐라. 재밌다"며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대한민국은 법치국가고, 사법기관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다 이렇다"고도 했다.

    약 30분 동안 이어진 통화에 기자가 "대한민국 검사가 그래도 되는 것이냐"고 따지자 수화기 너머 목소리는 잠시 멈칫하더니 "그래요? 잠시만 기다려봐요"라고 하고는 이내 전화를 끊었다.

    서울중앙지검 확인 결과 금융·기업범죄전담부(형사7부)에 '김태우 수사관'은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010'으로 시작한 전화번호는 그날 이후로 계속 전원이 꺼진 상태다.

    ◇ "고압적으로 피해자 당황하게 하는 수법…'전화 끊으면 구속한다' 협박도"

    29일 경찰에 따르면 기자가 받은 전화는 전형적인 보이스피싱(전기통신금융사기)이다. "당신 아들을 납치했으니 돈을 보내라"라고 하는 '납치 빙자 사기'와 함께 고전적인 수법이지만 아직도 종종 쓰인다고 한다.

    한 경찰 관계자는 "피해자에게 겁을 주고 당황하게 하기 위해 체포나 구속을 언급하고 일부러 고압적으로 대하는 경우가 많다"며 "피해자를 고립시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 '전화를 끊으면 바로 구속영장을 청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일견 속기 어려운 허술한 수법 같지만, 전문가들은 실제로 보이스피싱 전화를 받아보면 순간적으로 속아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수년 전 검찰을 사칭한 보이스피싱 전화를 받아봤는데, 통장을 거론하며 야단을 치길래 순간 믿은 적이 있었다"며 "피해를 보진 않았지만, 수사기관을 거론하며 고압적으로 말하면 권위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속을 수 있다"고 말했다.

    곽 교수는 "인간 내면에는 이성과 감정이 공존한다"며 "구속하겠다는 말을 듣고 나면 두려움이나 불안감으로 감정이 동요하게 되고, 순간적으로 합리적 판단이 결여될 수 있다"고 했다.

    경찰 관계자는 "제3자 입장에서는 '대체 보이스피싱을 왜 당할까'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직접 경험해보면 자신도 모르게 속아 넘어가기 쉽다"며 "피해자들 얘기를 들어보면 '순간 정신이 팔렸는지 전부 믿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판사나 검사, 교수 등 전문직들의 피해사례도 이따금 발생한다"고 전했다.

    ◇ 작년 피해액 일평균 18억원…개인정보·금품 요구하면 일단 의심해야

    해외에 본거지를 두고 대포폰 등을 활용하는 보이스피싱 조직은 검거 자체가 어렵다. 최근에는 악성 애플리케이션을 활용하는 등 신종 수법까지 등장해 피해가 해마다 늘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국내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2016년 1천924억원에서 2017년 2천431억원, 2018년 4천440억원으로 꾸준히 늘었고, 지난해 피해액은 6천720억원으로 역대 최대치였다. 하루 평균 18억4천만원의 피해가 발생한 셈이다.

    정부 또는 금융기관이라며 개인정보와 금품을 요구하는 전화는 일단 보이스피싱 여부를 의심하고, 전화를 끊은 뒤 가까운 경찰관서를 찾아가 도움을 받는 것이 안전하다.

    경찰 관계자는 "수사기관이 관청 건물이 아닌 제3의 장소에서 만나자고 하거나 유선으로 민감한 개인정보를 묻고 돈을 요구하는 일은 없다"며 "사기범들은 피해자를 고립시키려고 '전화를 끊으면 구속영장을 청구하겠다'고 협박하는 경우가 많은데 전화를 끊었다는 이유로 구속되는 일은 절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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