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탈시설' 한다더니…文정부 장애인 정책 어디까지?

'탈시설 성지' 스웨덴에서 찾는 장애인의 미래⑤

  • 2020-11-18 04:45
문재인 정부는 출범 당시 장애인 탈(脫)시설 정책을 국정과제로 채택했다.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시설 중심의 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반면 유럽의 국가들은 일찍이 탈시설 자립 생활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특히 대표적 복지국가 스웨덴은 1997년 모든 장애인 수용 특수병원 및 요양 시설의 폐쇄를 결정하고 '탈시설 사회'로의 전환에 성공했다. 본 기획은 탈시설 이후의 삶을 살고 있는 스웨덴의 사례를 통해 장애인도 자립해 살 수 있으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려면 어떤 시스템이 구축돼야 하는지 제시한다. [편집자 주]
(사진=이한형 기자/자료사진)

 

전염병은 평등하지 않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장애인, 노인, 정신질환자 등 사회적 약자에게 특히나 가혹했다.
청도 대남병원과 대구 한사랑요양병원 등 이른바 '시설'로 불리는 병원들에서 무더기로 확진자·사망자가 쏟아져 나왔다. 좁은 공간에서 다수가 모여 생활하는 '시설 안 사람들'의 집단감염은 예견된 결과였다.
전염병의 확산으로 시설의 취약성은 여실이 드러났다. 나눔문화연구소에 따르면 가장 많은 확진자가 발생한 시설은 요양병원으로 7개소에서 385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다. 폐쇄병동 형태의 의료기관(정신병원)의 경우 3곳에서 무려 330명의 확진자가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노인요양시설 3곳에서는 111명, 장애인거주시설 2곳에서는 36명의 확진자가 발생했다. 지역별로는 대구 8개 시설, 경북 7개 시설에서 가장 많은 집단감염이 일어났다.
그래픽=고경민 기자

 

그래픽=고경민 기자

 

나눔문화연구소는 시설 내 집단감염의 근본적 원인으로 '지역사회로부터 분리된 수용시설'을 꼽았다. 비슷한 취약성을 가진 사람들이 지역사회와 분리되어 하나의 시설에 밀집돼 있었기 때문에 개인의 감염이 집단 감염으로 확대됐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국내에서 코로나19로 처음 사망한 63세 환자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폐기종 환자였는데, 그는 무려 20년 동안 청도 대남병원 폐쇄병동에 입원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병원의 5층 정신과 폐쇄병동에서는 101명의 입원 환자 '전부'가 확진 판정을 받기도 했다. 코로나19를 계기로 탈시설 사회로 전환돼야 한다는 목소리에 더욱 힘이 실리고 있다.
(사진=취재원 제공)

 

한국의 장애인들은 지난 10여년 간 탈시설 운동을 벌이고 있다. 장애인이 거주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자립해 살 수 있도록 법·제도를 마련해달라는 요구다.
한국의 중증장애인들은 대부분 시설로 보내진다. 그들이 입소를 원해서가 아니다.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실시한 '중증·정신장애인 시설생활인에 대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장애인 거주시설의 비자발적 입소 비율은 67%에 달한다.
인권위는 "거주시설 장애인은 본인의 의사에 반해 가족과 지역사회에서 분리된 이후 10~20년 심지어 사망 시까지 살고 있다"며 "시설에서는 사생활이 전혀 보장되지 못하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으며 다양한 삶의 기회와 선택권을 제공받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래픽=고경민 기자

 

시설 장애인들은 인권침해를 당하기 쉬운 환경에 놓여있다. 집단거주의 특성상 획일적 관리와 통제가 행해지고, 사생활 보호나 개인의 기호 및 욕구 반영이 어렵기 때문이다.
인권위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장애인 거주시설 응답자의 52.4%는 1개 방에 '3~5명의 장애인'이 함께 거주하고, 36.1%는 '6명 이상의 장애인'이 함께 거주한다고 답했다.
또 시설 장애인들은 생활에 있어서 △식사시간 등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75.4%) △기상과 취침 시간을 결정할 수 없다(55%) △필요할 때 외출이 불가능하다(38.9%) △다른 사람이 안 보는 곳에서 옷을 갈아입을 수 없다(38.3%) △자신이 원할 때 자유롭게 목욕하기 어렵다(34.8%) △일상의 모든 생활에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28.8%)고 응답을 내놓았다.
그래픽=고경민 기자

 

폭력, 학대 등 직접적인 인권유린도 일어나고 있다.
장애인들은 시설에서 언어폭력(18.4%), 신체폭력(14.0%), 무시(14.0%), 강제노동(9.1%), 감금(8.1%), 강제 투약 또는 치료(6.7%) 등의 인권침해를 일상적으로 경험했다고 답했다.
정신요양시설의 거주인의 경우에는 폭력·학대 또는 부당한 대우(24.7%), 강제 격리조치(21.7%), 강제노동(13.0%), 강박(12.4%) 등 장애인 거주시설보다 더 비인도적이거나 굴욕적인 대우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래픽=고경민 기자

 

유엔 장애인 권리위원회는 2014년 10월 한국 정부에 '효과적인 탈시설 전략을 개발할 것'을 권고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2013년 4월 정부에 "장기입원 방식의 시설화 모델에서 지역사회 치료 모델로 전환이 필요하다"고 권고한 바 있다.
그러나 한국의 장애인 거주시설은 2000년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2009년 1019개소에서 2017년 1517개소로, 시설 장애인의 수는 2009년 2만 3243명에서 2017년 3만 693명으로 늘었다.
장애 유형별로는 발달장애인 비율이 평균 78%이며, 연령별로는 20~30대 장애인이 전체 인원의 약 50%를 차지했다. 10대도 11%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픽=고경민 기자

 

문재인 정부는 역대 정부 중 최초로 탈시설을 정부 정책 과제로 선정했다. 정부는 제5차 장애인정책종합계획(2018~2020)에서 △탈시설 자립지원 근거 마련을 위한 장애인복지법 개정 △탈시설 지원센터 설치 △자립정착금 지원 등 탈시설 관련 정책을 수립했다.
하지만 계획만 수립돼 있을 뿐 탈시설을 위한 구체적인 법적 규정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달 18일 정의당 장혜영 의원실은 한국장애인재활협회, 국민의힘 이종성 의원실과 함께 2018~2019년 문재인 정부의 '5차 장애인정책종합계획' 중간 이행성적을 발표했다. 학계와 현장의 분야별 전문가 22명으로 구성된 전문 평가단 점수와 장애인 100여 명의 만족도 조사를 비교한 결과 각각 70.5점(2.82점)과 62.3점(2.49점)으로 평가됐다.
평가 항목인 △복지·건강 지원체계 개편 △교육·문화·체육 기회보장 △경제적 자립기반 강화 △권익 및 안전 강화 △사회참여 활성화 등 5개 영역 가운데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항목은 장애인 권리 보장과 탈시설 정책을 담고 있는 '복지건강지원체계개편(전문가 65.3점, 장애인 59.5점)' 영역이었다.
장혜영 의원실은 "5차 장애정책종합계획이 이행성과와 장애감수성을 모두 반영한 성과를 거두려면 정책의제를 만들고 이루고, 감시하는 데에 전문가가 아닌 이용당사자를 비롯한 재활상담, 의료전문가, 법률전문가, 교육전문가, 접근성 전문가, 기술전문가 등 다양한 인력이 참여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장 의원실은 이어 "정책에 민감한 당사자인 장애인들이 문재인 정부의 정책 이행 수준을 낙제점인 60점을 겨우 넘게 매긴 데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문재인 정부는 잔여 임기동안 장애인의 실질적 욕구나 기대수준 등 정책 체감도를 높일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시설 폐지 촉구를 위해 1988년 스웨덴 스톡홀롬에서 열린 거리 시위. (사진=취재원 제공)

 

유럽의 국가들은 일찍이 시설 환경 개선과 탈시설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그 중 대표적 복지국가인 스웨덴은 1980~1990년에 장애인 지역사회 자립생활을 위한 구체적 서비스를 지원·확대했다.
이후 1997년 '특수병원 및 요양시설 폐쇄법'을 통해 남아있던 모든 장애인 수용 특수병원 및 요양시설의 폐쇄를 결정하고, 시설 중심 서비스에서 지역사회에 기반한 서비스로 전환했다.
영국은 1980년대 후반부터 탈시설 정책을 논의하다가 1997년 '지역사회돌봄법'을 제정해 장애인에게 서비스 대신 현금을 지급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로써 장애인 당사자가 복지 서비스를 통제하고 결정권을 가지는 게 가능하게 됐다.
뉴질랜드는 공동생활가정 등이 급증하면서 거주시설 이용인이 감소함에 따라 1985년 지역사회 중심의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선언하고, 2006년까지 모든 시설을 폐쇄했다.
스웨덴 탈시설 운동에 참여했던 인권운동가 리타 레나(Riitta-Leena Karlsson)씨는 "좋은 시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시설 자체가 아무리 좋더라도 시설의 성격을 답습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모여 살면 결국 규칙이 많이 생긴다"며 "이 규칙은 내 삶에 대한 결정권을 제한한다. 인권침해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이 때문에 스웨덴은 탈시설의 길을 선택한 것"이라고 부연했다.
※ 본 기획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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