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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살균제 '무죄'에 연구자들 "재판 대상은 '과학의 한계'가 아냐"



사건/사고

    가습기살균제 '무죄'에 연구자들 "재판 대상은 '과학의 한계'가 아냐"

    서울중앙지법, SK케미칼·애경 책임자들에 1심서 '무죄' 선고
    참여 연구자들 "의견 누락·배제됐다" 의견 내
    "동물 실험만을 판단의 근거로 삼은 건 적절치 않아"
    검찰, 18일 항소…전문가들, 과학자 자문 패널 구성 등 제언

    양원호 한국환경보건학회 회장(오른쪽)이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가습기 살균제 제조·판매 업체 1심 무죄 선고 관련 전문가 기자회견에 참석해 발언을 하고 있다. 황진환 기자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건 관련 제조·판매사인 SK케미칼과 애경, 이마트 등의 대표이사들과 임직원 등 13명이 무더기로 무죄를 선고받은 지 일주일 만인 19일, 사건을 연구한 전문가들이 모여 재판부의 판결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비판했다.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가습기살균제참사전국네트워크 주최로 가습기 살균제 관련 전문가 기자회견 'SK케미칼·애경산업·이마트 1심 무죄 선고, 무엇이 문제인가' 토론회가 열렸다. 2019년부터 이어진 재판에서 증언을 한 전문가들이 참여해 자신들의 연구 결과와 법정 진술의 '진의'를 재차 짚었다.

    ◇재판부, '가습기 살균제 참사' 기업에 무죄 선고

    앞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유영근 부장판사)는 12일 업무상과실치사 등 혐의로 기소된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와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 등 13명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SK케미칼·애경·이마트·필러물산 등은 CMIT와 MIT 성분의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 판매한 회사들이다.

    재판부는 문제의 제품 사용과 폐질환 발생의 인과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법원의 무죄 근거는 피해자들이 사용한 가습기 살균제를 썼을 때 반드시 폐질환이나 천식에 걸리는 동물 실험 결과가 없다는 것이었다.

    가습기살균제참사전국네트워크 관계자들 및 피해자들이 지난 1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유영근 부장판사)는 SK케미칼·애경 前대표를 비롯한 모든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한형 기자

     

    ◇전문가들 "의견 누락·배제됐다"

    국내 환경보건학자들의 모임인 한국환경보건학회는 이날 성명을 내고 "재판의 대상이 '피고인의 잘못'이어야 하는데, '질환 발생 입증에 대한 과학의 한계'로 바뀌었다"고 밝혔다. 양원호 환경보건학회장은 "독성실험, 건강피해 등에 대한 과학적 방법론을 잘 이해하지 못한 판결이 나왔고, 기업에 면죄부를 준 셈이 됐다"고 말했다.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거나 관련해 진행한 연구 결과를 증거자료로 제출했던 전문가들도 하나같이 자신들이 낸 의견이 누락·배제됐다고 밝혔다.

    박동욱 한국방송통신대 환경보건학과 교수는 "판결문 전체는 불확실성에 대한 공격으로 가득하다"며 "각각의 과정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과학의 크고 작은 불확실성과 한계를 무죄의 증거로 사용했다"고 말했다.

    재판서 증언했던 이규홍 안전성평가연구소 박사도 입장문을 내고 "판결에서의 연구책임자의 증언이 원래 발언 취지와는 다르게 인용되거나, 여러 가지 연구결과를 선별적으로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고 밝혔다.

    지난 12일 가습기 살균제를 유통·판매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SK케미칼 및 애경 전 대표와 임직원들이 1심 무죄를 선고 받은 가운데 지난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환경보건시민센터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피해 증언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황진환 기자

     

    이어 "만약 질문을 '마우스 실험을 갖고 사람에게서 천식이 일어난 것을 100% 증명할 수 있는가'라고 하지 않고, '실험 결과로 CMIT/MIT가 마우스에서 천식 유사 증상을 일으켰는가'라고 한다면 분명히 '그러하다'고 증언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특정 실험결과 하나로 한정해 분명한 인과성을 주장할 수 있느냐고 심문하고 이를 단정적으로 증언하지 못한다고 해 판단에 배제하는 것은 과학적 사실을 올바르게 이해해 판단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고 했다.

    문제의 가습기 살균제 제품의 위해성을 평가한 이종현 EH R&C 환경보건안전연구소장은 "의견이 상당히 누락 또는 배제됐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는 판결이었다"고 했다.

    그는 사전 안전 점검도 이뤄지지 않은 명백히 '하자가 있는' 제품이라고 결론냈지만, 재판부는 "'에어로졸 제품과 같이 흡입 가능한 제품에도 일정 사용한도 내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등의 이유로 인체에 위해하다는 사실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 소장은 "비교대상 제품이 에어로졸 제품이든 표백제, 세정제든 가습기살균제가 압도적으로 사용량도 많고, 사용 시간도 길고, 사용 빈도도 가장 빈번하다"고 반박했다.

    재판부는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실험결과로 'CMIT/MIT 성분과 이 사건 폐질환에 따른 사망 내지 상해나 천식 사이 인과관계가 있다'는 취지의 진술을 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앞서 연구 결과, CMIT/MIT에 흡입 노출된 쥐의 상부 호흡기에서 염증과 변성이 발견됐다. 담당 연구진은 '비록 실험동물의 하부 호흡기에 폐섬유화를 일으키지 않았지만, 호흡기의 해부 구조와 흐름 방식이 사람과 다르다는 점을 고려하면 폐섬유화 등 폐 손상 유발을 배제할 수 없다"고 결론냈다.

    이한형 기자

     

    하지만 법원은 이 연구 기획이 의도적이었고 실험 방법은 가혹했고 해석은 편향됐다고 봤다.

    학회는 "과학의 일상은 이 가설을 검증하는 일"이라며 "CMIT/MIT가 어떤 독성을 일으키는지 선행연구가 충분하지 않았고 이를 규명하기 위한 의도는 연구 목적으로 타당하다"고 했다.

    ◇'증거=피해자 몸'인데…'동물 실험'에서 확인되지 않아 무죄라는 재판부

    전문가들은 동물 실험만을 판단의 근거로 삼은 건 적절하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한국환경보건학회는 성명에서 "물질의 유해성 여부는 인체 영향이 가장 중요한 근거가 돼야 한다"고 반박했다. 국제암연구소는 충분한 증거가 인체에서 나오면 1급 발암물질로 인정하며, 실험물질의 증거나 기전적 증거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도 언급했다.

    이종현 소장은 "마우스 대상의 기도점적 시험을 통해 확인된 폐손상 유발 가능성은 'CMIT/MIT는 폐손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가설에 대한 명백한 반증 사례로 해석될 수 있다"며 "천식의 경우 CMIT/MIT에 대한 직업적 노출에 의한 천식 발생이 보고된 바 있어, 유발 가능성은 이미 확인된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했다.

    지난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환경보건시민센터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피해 증언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책상 위에 약이 놓여있다. 황진환 기자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반증과 종합이라는 방식을 놓고 보면 일부 동물 실험에서 표적장기에 변화가 없었다는 것, 동물 실험에서 천식의 기전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 등은 실제 폐손상과 천식의 반증이 되지 못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가습기 살균제) 단독 사용자들을 모아 폐기능 검사를 해보면 폐손상뿐 아니라, 확산능이 저하된 결과들이 보였다. 이는 폐포 손상의 증거"라고 말했다. 이는 CMIT/MIT가 쓰인 SK케미칼·애경산업의 가습기 살균제 뿐 아니라 옥시 등의 제품에서도 보인 현상이다. 이어 "재판부는 충분한 양이 도달돼야 한다고 하는데, 실제 검토해봤을 때 양이 아니라 농도가 용량-반응 관계에서 중요하다"고 했다. 짧은 기간이어도 문제의 성분에 어느 정도 강하게 노출되는지가 관건이라는 의미다.

    박동우 교수는 "(재판부가) 11명 폐 손상자의 개별 인과는 평가하지 않았다"며 "기억 편견, 응답 오류, 개인 질환 등 뭉뚱그려 11명 개개인 CMIT/MIT와의 관련 전체를 부정해버렸다"고 말했다.

    재판부가 피해 사실도 왜곡했다고 짚었다. 박 교수는 "모두 2개월에서 11개월 사용하고 폐 손상을 입었다. 기억 오류가 날 수 없는 시간"이라며 "화학물질과 직업 노출이 없었던 아이들의 폐 손상의 요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고 되물었다.

    ◇항소심에서 '반전' 있을까…"과학자 자문 패널 구성하자"

    전날 검찰이 재판부에 항소장을 제출하면서, 항소심에서 재판부가 판단을 뒤집을지 주목된다.

    변호사인 박태현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 사건 특성은 과학적인 연구 결과에 기반해 기소가 이뤄지고 재판이 진행된 것"이라며 "(재판부가) 인과성의 엄격한 증명(을 요구한) 부분은 일반 형사사건과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고 밝혔다.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가습기 살균제 제조·판매 업체 1심 무죄 선고 관련 전문가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황진환 기자

     

    이어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과학자들이 인과관계 합의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데,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냐'는 잣대를 들이대면 과학자들은 주춤할 수밖에 없다"며 "규범적 관점이 더 들어가야 한다. 과학적 방식에 대한 이해 속에서 전문가 증인의 진술에 접근했으면 한다. 과학자 자문 패널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박동욱 교수는 "기업과 법원의 일부는 증거 부족과 불확실성을 근거로 더 많이 연구해서 엄격한 인과관계 요건을 채우라고 요구한다"며 "가습기 살균제 제품은 사라졌고 적극적 피해자가 더 이상 없는 상황에서 재판부가 요구하는 엄격한 인과관계를 달성하는 방법은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가습기 살균제 참사의 사법화를 우려한다. 이 걱정이 기우였음을 증명하는 고등법원의 판결을 기대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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