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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흔적에서 교훈으로]'제주 메이데이' 오라리 방화사건 진실은?



제주

    [4.3 흔적에서 교훈으로]'제주 메이데이' 오라리 방화사건 진실은?

    오라리 마을…제주 읍내와 가까우면서도 산간까지 펼쳐진 마을
    3.1절 발포사건 이후 무장대와 경찰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사건 수차례 발생
    1948년 4월 28일, 제9연대 김익렬 연대장과 무장대 김달삼 사령관이 평화협상 마무리
    휴전 기간에 오라리 방화사건 발생…폭도에 의해 자행된 것처럼 조작
    현장조사 결과 무장대 소행이 아니라고 밝혀졌지만 미군정은 묵살
    미군정 장관인 딘 소장 극비 제주 방문…강력한 토벌작전으로 선회

    제주에는 4.3유적지를 비롯해 수많은 다크투어 유적지가 존재한다. 제주는 대한민국의 대표 관광지이지만 제주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대한 제대로 된 기억의 전승이 우선 필요하다. 제주CBS <시사매거진 제주>는 사단법인 제주다크투어와 함께 제주에 존재하는 다크투어 유적지가 잘 보전되고 정확하게 안내가 되고 있는지 역사적 사건과 함께 짚어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방송은 매주 토요일 오후 5시 5분부터 방송되며, 노컷뉴스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제주다크투어 양성주 대표. 사단법인 제주다크투어 제공

     

    ■ 방송 : CBS 라디오 <시사매거진 제주> FM 제주시 93.3MHz, 서귀포 90.9MHz (17:05~18:00)
    ■ 방송일시 : 2021년 5월 1일(토) 오후 5시 5분
    ■ 진행자 : 류도성 아나운서
    ■ 대담자 : (사)제주다크투어 양성주 대표

    ◇류도성> 오늘 소개해주실 4·3유적지는 어디인가요?

    ◆양성주> 오늘은 오라리 마을과 관련된 4·3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류도성> 4·3 당시 오라리에는 어떤 마을이었나요?

    ◆양성주> 오라리 마을은 제주 읍내와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산간까지 펼쳐진 상당히 큰 마을이었습니다. 8·15 직후 주민 수가 3,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해방 후에는 항일운동을 주도했던 마을 주민들이 마을을 주도했다고 할 정도이니 지난 방송에서 말씀드린 하귀나, 조천 못지않게 활동적인 마을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류도성> 항일운동이 왕성했던 지역은 대부분 4·3 피해가 컸던 것 같은데요. 오라리 마을은 어땠나요?

    ◆양성주> 오라리 마을은 4·3 발발 초기부터 사건이 끊이지 않았던 곳입니다. 지난 시간에 3·1절 발포사건으로 6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말씀드렸었는데요. 이때 희생된 6명 중 2명은 오라리 마을 주민이었습니다. 이후에 무장대(인민유격대)와 경찰로부터 각각 죽임을 당하는 인명 희생 사건이 몇 차례 발생했습니다.

    ◇류도성> 오라리 마을은 언제부터 주민피해가 발생하게 되나요?

    ◆양성주> 오라리 마을은 4·3 발발 직후에 첫 인명피해가 발생하게 되는데요. 4월 11일 정실마을에서 한 경찰관의 아버지가 무장대(인민유격대)에 의해 살해됩니다. 또 사건 발생 열흘 뒤인 4월 21일에는 연미마을에 살던 주민 2명이 잃어버린 말을 찾으러 이웃마을인 오등마을로 갔다가 응원경찰대에 붙잡혀 심문을 받게 됩니다.

    ◇류도성> 무장대에 의해 피해가 있고 난 뒤에 심문을 받았다면 무장대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심문을 받게 되었던 건가요?

    ◆양성주> 맞습니다. 당시 육지에서 파견된 응원경찰대는 주민 2명을 폭도와 내통했다며 의심했고, 주민들이 자초지종을 설명해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경찰관들은 두 사람을 포박한 뒤 굴 앞으로 데려갔고 순간 총성이 울렸습니다.

    두 사람은 삼촌과 조카 관계였는데요. 두 사람 다 총에 맞았지만, 조카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고 삼촌은 피투성이가 된 채 마을로 돌아와 이 사실을 마을 주민들에게 알렸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채 돌아온 마을 주민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주민들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을 겁니다. 이렇게 마을 주민들의 반감이 켜켜이 쌓여가고 있을 때쯤 4월 23일 세 번째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류도성> 연이어 사건이 발생했군요?

    ◆양성주> 좌익청년활동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 한 청년이 경찰에 붙잡혀 연행된 뒤, 며칠 후 인근 밭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됩니다. 총살을 당한 겁니다. 이 사건과 관련해서 우익청년단원(대청단원)의 밀고설이 나돌면서 마을 분위기는 더욱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류도성> 마을 분위기가 점점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네요?

    ◆양성주>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4월 29일에 네 번째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요. 오라리 마을의 대동청년단(우익단체) 부단장과 단원이 납치된 후 행방불명되는 사건입니다.

    제주시 오라동 연미마을회관에 있는 안내판. 사단법인 제주다크투어 제공

     



    ◇류도성> 오라리 마을 주민들이 무장대와 경찰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초를 겪었네요?

    ◆양성주> 그렇습니다. 바로 다음 날인 4월 30일에 다섯 번째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무장대에 의해 대동청년단 단원의 부인 2명이 마을 뒷산 민오름으로 끌려가게 되는데요. 부인 2명은 오라리 연미마을에 살다가 마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제주 읍내로 피신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급한 살림살이라도 챙기려고 연미마을로 다시 들어와 있던 중에 마을 사람들에 의해 민오름으로 끌려갔던 것입니다. 부인 2명 중 1명은 가까스로 도망쳤지만 남은 1명은 사망하게 됩니다.

    ◇류도성> 그 후에 상황은 어떻게 흘러갔나요?

    ◆양성주> 다음 날인 5월 1일에 무장대에 살해된 여인의 장례식이 열렸는데요. 장례식에는 경찰과 서청·대청 단원들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장례식이 끝난 후 경찰들은 트럭을 타고 현장을 떠났고 이후에 오라리 마을 민가 10여 채가 차례로 불에 타는 방화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류도성> 누가 어떠한 이유로 오라리 마을에 방화를 저지른 건가요?

    ◆양성주> 장례식을 마치고 경찰은 마을을 떠났지만 서청과 대청단원 30여 명은 마을에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서청·대청 단원들이 마을에 방화를 저질렀던 겁니다. 전날 민오름에 납치당했다가 도망쳐 나온 대청 단원의 부인 진술로 마을 주민들은 무장대(인민유격대)가 방화를 저지른 것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류도성> 근데 이 사건이 무장대가 방화를 저지른 것으로 조작되었다는 건가요?

    ◆양성주> 그렇습니다. 마을이 불타자 산에서 무장대(인민유격대)가 우익청년들을 쫓아 내려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한 인명피해는 없었고 피신한 우익청년들의 신고로 다시 경찰들이 마을로 출동했지만 이미 무장대(인민유격대)는 철수한 후였다고 합니다.

    이 시간에 김익렬 연대장은 무장대(인민유격대)가 오라리 마을을 습격했다는 보고를 받고 현장조사를 벌였는데요. 조사 결과 무장대(인민유격대)가 아닌 대청단원의 소행임을 밝혀냅니다.

    ◇류도성> 김익렬 연대장이라면 김달삼 무장대(인민유격대) 사령관과 평화협상을 진행했었잖아요?

    ◆양성주> 맞습니다. 1948년 4월 28일 제9연대장 김익렬 연대장과 당시 무장대 사령관이었던 김달삼은 치열한 논쟁 끝에 성공적으로 협상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협상 내용에는 72시간 내에 전투 중지와 점진적 무장해제 그리고 무장대에 대한 사실상의 신변 보장이 합의 내용이었습니다. 4월 3일 무장대(인민유격대)가 경찰지서 습격 이후 지속해서 대치하던 상황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거죠.

     



    ◇류도성> 그렇다면, 평화협상에 의해 '휴전' 기간이었지만 방화사건이 발생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한 점이네요?

    ◆양성주> 그렇습니다. 이외에도 오라리 방화사건은 주목해야 할 것들이 몇 가지 더 있습니다. 방화를 저지른 자들의 정체가 누구였냐는 의문점과 당시 미군정은 방화사건을 지상과 공중에서 입체적으로 촬영하고 있었는데요.

    이 기록물은 4·3의 초기상황을 촬영한 유일한 영화기록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 점은 오라리 방화가 '폭도에 의해 자행된 것'처럼 조작되었고, '제주의 메이데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평화협상 결렬의 원인을 무장대에 돌리려 했던 것입니다. 방화자는 무장대(인민유격대)가 아닌 우익청년단(대청단원)이었는데 말이죠.

    ◇류도성> 당시 4·28평화협상을 주도했던 김익렬 연대장의 입장에선 방화사건이 무장대(인민유격대)의 소행으로 알고 실망이 컸을 것 같은데요?

    ◆양성주> 그렇습니다. 김익렬 유고록을 통해서 이런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방화사건 소식을 접한 김익렬 연대장은 대단히 분노했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무장대(인민유격대)의 소행으로 알고 무장대(인민유격대)가 평화협상을 먼저 깨버렸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김익렬 연대장은 마을에 직접 찾아가 현장 조사를 벌였고, 마을 주민 10여 명으로부터 사건 경위에 대한 진술을 받아 방화사건이 무장대(인민유격대)가 아닌 우익청년단원(대청단원)들의 소행임을 밝혀냅니다.

    ◇류도성> 무장대(인민유격대)의 소행이 아니었다는 걸 밝혀냈는데도 4·28평화협상이 결렬되었던 건가요?

    ◆양성주> 김익렬 연대장은 조사 결과를 미군정에 보고하지만, 미군정은 이를 묵살하고 '폭도들이 자행했다'는 경찰 측의 보고를 수용합니다. 결국 오라리 방화사건은 4·28평화협상이 결렬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4·3이 강력한 토벌작전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어버립니다. 여기서 4·3이 강력한 토벌작전으로 나아가는 데에 4월 29일 미 군정장관 딘 소장의 극비 제주방문 얘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요.

    4.3길 안내판 모습. 하얗게 변색되어 내용을 확인하기가 힘들었다. 사단법인 제주다크투어 제공

     



    ◇류도성> 미 군정장관의 제주방문과 강력한 토벌작전으로의 선회가 어떤 연관성이 있는 건가요?

    ◆양성주> 먼저 당시 미 군정장관의 지위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미 군정장관은 군정통치를 총괄하는 행정부의 최고 결정권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미군정 기간에 남한의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후에 한국인 자리를 만든다는 명분 아래 민정장관 제도를 두기도 했지만, 실권은 어디까지나 미 군정장관이 쥐고 있었다고 합니다. 실세인 미 군정장관 딘 소장에 관한 것이라면 사소한 것 하나하나 곧바로 기사화될 정도로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류도성> 당시 딘 소장이 극비로 제주방문 한 것이 알려지지 않았던 건가요?

    ◆양성주> 4·3 발발로 혼란스러웠던 제주 상황에 군정장관의 첫 제주 방문은 주목받을만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4월 29일의 제주 방문이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다는 건 상식적으로 납득이 어려웠던 거죠.

    1. 언론보도를 통제했거나 2. 제주방문을 극비리에 진행했거나 2가지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딘 소장이 제주를 극비로 방문한 시점을 미루어 보았을 때 제주를 방문한 이유가 당시 제주의 상황을 파악하고 4·28평화협상을 승인 또는 거절하기 위해 방문한 것으로 보입니다.

    ◇류도성> 그렇다면 딘 소장의 극비 제주방문이 4·28평화협상이 결렬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겠네요?

    ◆양성주> 그렇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조사가 더 필요하지만 확실한 건 딘 소장의 제주방문 이후 '화평'에서 '대토벌'로 정책이 선회되었다는 점입니다. 또 5월 3일에는 의문의 기습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요.

    4.3길 안내판 모습. 하얗게 변색되어 내용을 확인하기가 힘들었다. 사단법인 제주다크투어 제공

     



    ◇류도성> 의문의 기습작전이 발생했다고요?

    ◆양성주> 4·28평화협상이 타결되면서 산에 올랐던 주민들이 하산하던 도중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로부터 기습을 당하게 됩니다. 당시 9연대 병사와 미군의 인솔 아래 주민들을 호송해 오는데 무장대로

    가장한 자들이 기습총격을 가했던 겁니다. 장창국의 『육사졸업생』 에 나온 내용에 따르면 미군들이 반격해 그들 중 5명을 사살하고 부상자를 데리고 가 치료하는 과정에서 공격을 가했던 자들이 무장대가 아니라 제주경찰서 소속임이 밝혀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김익렬의 유고에서도 습격을 가한 자들이 '상부의 지시에 의해 폭도들의 귀순공작을 방해하기 위한 하나의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자백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평화협상을 원치 않는 경찰의 조작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류도성> 미군정과 경찰에서 오라리 방화사건, 5.3기습사건 등을 무장대(인민유격대)의 소행으로 조작 했다는 건 처음부터 평화협상을 원치 않았다고 볼 수 있겠네요?

    ◆양성주> 맞습니다. 경찰은 처음부터 평화협상이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죠. 오라리 방화사건이 발생한 뒤 김익렬 연대장이 직접 현장 조사를 벌여 무장대(인민유격대)의 소행이 아니라 대동청년단의 소행이라고 보고하지만, 미군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5월 5일 딘 소장이 제주에 내려와 최고회의를 제주에서 개최합니다. 이 회의에서 조병옥(미군정 경무부장)과 김익렬 연대장이 제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의 원인에 대해 논쟁이 있었는데요. 다음 날 김익렬 연대장이 전격 해임되고 후임 연대장으로 박진경이 부임하면서 본격적인 토벌작전이 시작됩니다.

    미군정은 김익렬이 주장했던 평화협상이 아닌 조병옥이 주장한 강력한 토벌작전을 선택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김익렬 연대장의 정보참모였던 이윤락 중위의 증언에 따르면 이때부터 미군은 해안선 5km 이상 올라가는 사람은 폭도니까 모두 죽여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김익렬 연대장 후임으로 온 박진경 연대장은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라고 말할 정도로 잔인하고 무자비한 사람이었습니다.

    ◇류도성> 오라리 방화사건이 단순한 사건 같으면서도 미묘하고 복잡한 사건이 뒤얽혀 일어난 것 같은데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양성주> 오라리 방화사건은 4·3 기간 이후에 폭도들이 일으킨 사건이라고 미군정이 촬영한 '제주도의 메이데이' 영상을 보여주면서 '4·3 = 공산폭동'이라는 방정식을 강요해 왔었습니다. 평화협상이 결렬된 것은 매우 안타깝습니다.

    현재 오라리 마을 안내판에는 '만약에 오라리 방화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평화협상이 내용대로 진행되었다면 7년 7개월의 고통의 세월은 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요. 이것으로 저의 생각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류도성> 그럼 오라리 마을에는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나요?

    ◆양성주> 현재 연미마을회관이 들어선 자리는 1946년 2월에 오라공립국민학교가 있었던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4·3으로 인해 학교가 불타고 선생님들이 사망하게 되면서 1948년 12월 폐교되었다가 이후 현재 오라초등학교 위치에서 재개교 되었다고 합니다. 연미마을회관에는 오라리에서 방화사건이 일어났음을 알려주는 비석과 오라동4·3길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정표와는 정반대방향에 4.3센터가 위치해 있었다. 사단법인 제주다크투어 제공

     



    ◇류도성> 유적지 안내판에 4·3 관련 내용이 기술되어 있나요?

    ◆양성주> 연미마을회관에는 오라국민학교에 대한 설명은 물론, '오라리 방화사건' 등 4·3 당시 오라지역에서 일어난 내용이 안내판으로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당시 오라리 방화현장과 지도가 잘 전시되어 있어 처음 접하시는 분들도 사건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오라동 4·3길이 조성되면서 4·3길 루트가 표시되어 있는 안내판이 있는데요. 안내판이 하얗게 변색되어 지도상에 있는 곳들을 파악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류도성> 2018년에 4·3 70주년을 맞아 오라동에도 4·3길이 조성되었잖아요? 관리가 잘 되고 있나요?

    ◆양성주> 오라동 4·3길의 경우 가장 최근에 개통된 곳임에도 불구하고 안내판 훼손의 문제가 있었고, 갈림길 이정표에 나와 있는 4·3센터의 위치와 실제 위치가 달라 센터를 찾는 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며칠 전 저희 제주다크투어 활동가들이 오라리 연미마을 답사를 위해 두 시간 정도 마을을 걸었는데요. 마을을 돌아보는 동안 4·3길 탐방객은 단 한 명도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코로나-19의 영향도 있겠지만 아직 홍보가 덜된 것인지 찾는 발길이 없는 듯했습니다.

    오라리 4·3길이 개통되면서 조그맣게 4·3센터가 마련되었는데요. 이 센터 또한 관리가 전혀 되고 있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4·3길 안내 책자 한 장 구하기도 힘들었습니다.

    ◇류도성> 개통은 했지만, 관리시스템이 전혀 갖춰지지 않은 건가요?

    ◆양성주> 그렇습니다. 4·3길 개통의 취지가 당시의 흔적을 따라 걸으면서 역사를 돌아보기 위해 만든 것인데요. 처음에 조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속적인 관리는 더더욱 중요합니다. 4·3길이 이름뿐인 길이 되지 않기 위해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게 시급해 보입니다.

    ◇류도성> 오라리 마을을 돌아보시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요?

    ◆양성주> 오라리 방화사건은 4·3의 큰 변곡점이 되었던 사건입니다. 4·28 평화회담으로 어렵게 조성된 협상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무차별 탄압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무장대(인민유격대)에 의해 방화가 일어난 것으로 조작함으로써 가혹한 탄압의 명분을 만들어 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라리 4·3길을 이대로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리를 위해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출 필요가 있습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역사적 사실이 잘 정리된 홍보물과 안내판을 접할 수 있도록 하루빨리 개선되었으면 하는바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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