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청와대 국민청원, 무얼 묻고 얼마나 답했을까

핵심요약

5년동안 운영, 총 277호 답변
인권·성평등 분야 청원이 1위, 2위 정치 개혁…이후 바뀐 점은?
20만 이상 동의 받은 청원 중 47%가 '피해자 보호·가해자 처벌·진상규명 요구'
모태인 美 '위 더 피플'은 트럼프 취임후 폐쇄, 한국은?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
2017년 8월 문재인 정부가 청와대 국민청원제도를 신설하며 내세운 철학입니다. 국민청원제도는 문재인 정부에서 가장 활발하게 이용되는 제도 중 하나인데요. 많은 동의를 얻은 청원은 곧 국민여론으로 대표되면서 언론을 통해 사회 주요 담론을 주도합니다.
 
'텔레그램 n번방 용의자 신상공개 및 포토라인 세워주세요' 청원은 역대 최다 동의를 기록하며 분노한 여론을 담아냈습니다. 철저 수사 및 가해자 신상 공개, 처벌 등을 요구하는 등 9건의 관련 청원이 잇따르며 해당 사건을 공론화시켰죠.
이후 불법촬영물의 인터넷상 유포를 원천 차단하도록 한 '전기통신사업법 개정'('n번방 방지법'), 불법촬영물 판매뿐 아니라 소지·구입·시청도 처벌대상에 포함하는 '성폭력처벌법 개정' 등의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냈습니다.
    
2016~2020년 디지털성범죄 사건 중 1심에서 9.4%만 실형이 선고됐고, 이 가운데서도 81.7%가 10개월 이하 징역에 집중됐던 걸 고려해보면 조주빈, 문형욱, 강훈에 각각 징역 42년, 34년, 15년의 중형이 확정된 것은 이례적입니다.
범죄 혐의가 입증됐기에 가능한 결과였지만, '국민청원 등을 매개로 사회적 관심이 강하게 집중돼야만 사필귀정이 되는 것 아니냐'는 인식이 자리잡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됐습니다.
 

1. 국민은 무엇을 물었을까

게시판에는 하루 평균 725건, 누적 104만 5810건의 청원이 게시됐습니다. 청원게시자는 글을 작성할 때 '경제민주화', '문화/예술/체육/언론', '인권/성평등' 등으로 구분된 17개 분야 중 하나를 직접 선택합니다.
 
104만건 중 정치개혁(16.6%), 보건복지(9.1%), 안전/환경(7.4%), 교통/건축/국토(6.1%) 순으로 청원이 등록됐습니다. 또 국민 동의를 많이 얻은 분야는 인권/성평등(18.4%), 정치개혁 (14.3%), 안전/환경(12.1%), 보건복지(8.6%), 육아/교육(8.1%) 순이었습니다.
    
2017년 8월 19일부터 2021년 8월 18일까지 20만 이상 동의를 받은 청원은 257건이었는데, 역대 국민청원 동의수가 높았던 10건의 청원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이 중 절반의 청원이 교통사고나 강력범죄 속의 피해자 보호, 가해자 처벌, 진상규명에 관한 청원이었는데요. 이러한 경향은 국민 청원 전반에 걸쳐 드러납니다.

공적 수단 불신, '엄벌' 요구하는 국민들

많은 국민이 사법 시스템을 불신합니다. 지난해말 한국리서치가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천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인식 조사에서 "법원의 판결에 대해 신뢰한다"는 응답은 전체의 29%에 그쳤습니다.
법원 판결을 불신한다는 응답은 66%, 즉 10명 가운데 7명 꼴로 재판 결과를 믿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아울러 김도읍 국민의힘 의원실이 대법원으로부터 제출받은 2017~2019년 법원 진정 및 청원 접수 현황에 따르면, 재판 결과에 불복해 제기하는 '재판 불복 진정·청원' 건수는 매년 증가해온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은 직접 입법에 나서거나, 철저한 수사를 재차 요청합니다.
    
2017년 8월부터 2021년 8월까지 20만 이상 동의를 받은 257건의 청원을 분석한 결과 47%에 해당하는 121건이 '교통사고, 성범죄 등의 사건사고 피해자 보호, 가해자 처벌,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청원'이었습니다.
24%에 해당하는 63건은 '백신패스(일명 방역패스) 다시 한번 결사 반대합니다', '강원도 차이나타운 건설을 철회해주세요' 등과 같이 현행 정책 및 제도 관련 찬반 의견을 게시하면서 개선을 요청하는 청원이었습니다.
공적인 절차를 통한 문제 해결보다 직접 나서 즉각적인 변화를 촉구하는 현상이 늘어나는 겁니다.
2018년 한국정치학회에서 발표된 '청와대 국민청원에서는 무엇이 일어나는가?' 제하의 논문에 따르면 30여만 건의 게시물을 분석한 결과 최다 빈출 단어에 '처벌'이 포함됩니다.
심지어 '범죄'는 가장 많은 게시물의 주제를 대표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문제에 대한 근본적 원인 해결보다 분노를 중심으로 가해자 처벌에만 집중하게 되는 '형벌 포퓰리즘'에 빠질 위험성이 있는 공간인 겁니다.
 

허위 청원에 정쟁의 장까지···'몸살' 앓는 청원장

'저희 25개월딸이 초등학생 5학년에게 성폭행을 당했습니다'(2020.3.20. 53만 3883명 동의) 청원은 역대 21번째 최다 동의 수를 기록했지만 수사결과 허위사실로 밝혀졌습니다.
경찰은 청원인을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고, 청와대 측은 "어린 피해자가 겪었을 고통에 공감하며 피해자에게 힘을 보태고자 국민의 마음이 모였던 청원"이었다며 "국민청원의 신뢰를 함께 지켜내길 바란다"고 답변했습니다.
 
정쟁으로 얼룩졌던 사례도 있습니다. 정부를 방해하고 국민에 대한 막말이 심각하다는 근거로 제기된 '자유 한국당 정당해산 청원(2019.4.22. 183만 1900명)'에 맞서 일주일 뒤 '더불어 민주당 정당해산청구!!'(2019.4.29. 33만 7964명) 청원이 게시됩니다.
'문재인 대통령 탄핵을 촉구합니다'(2020.2.04. 146만 9023명)에 맞서 '문재인 대통령님을 응원합니다!'(2020.2.26. 150만 4597명 청원 게시도 마찬가지 경우입니다.
    
청원에 담긴 함의를 파악하기보다, 정치 세력간 대항전을 벌이는 모습으로 상황이 흘러간 것인데요.
이런 상황에 대해 고려대 정치연구소 조계원 교수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청원 플랫폼 자체가 사회운동의 장이 되어버리는 경우, 국민끼리 대립하고 서로 압박하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린다"며 "인정 투쟁이 될 경우 오히려 국민간 적대감의 증가가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를 표시했습니다.

 2. 정부는 어떻게 답했을까

'자유한국당·더불어민주당 해산 청구 청원'에 대해 청와대 측은 당시 ''동물 국회'이자 '식물 국회'가 되어버린 상황을 언급하며 "정당 해산 청구는 정부의 권한이 맞으나, 주권자인 국민 몫으로 둬야 한다"고 답변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탄핵 촉구·응원 청원'에 대해 청와대 측은 '대통령의 탄핵은 국회의 권한으로 답변이 어렵다', '대통령과 정부 부처에 대한 응원 및 지지에 감사하다'고 답변했습니다.
 
상황을 정리하는 역할에 그치며 다소 원론적인 답변에 머무른 경우입니다. 반면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온 답변 역시 존재합니다.
 

답변, 그리고 변화

    
위에서 언급한 n번방 사건 외에도 '음주운전 교통사고로 친구인생이 박살났습니다'(2018.10.2. 40만 6655명) 등 5건의 청원 이후 음주운전 사망사고시 처벌 및 단속 기준을 강화한 일명 '윤창호법'이 통과되고, 단속 기준과 면허 취소 기준이 강화됐습니다.
 
'강서구 피시방 살인 사건. 또 심신미약 피의자입니다'(2018.10.17. 119만 2049명) 등 심신미약 감경 의무 조항 폐지 관련 4건의 청원 이후 심신미약자라면 반드시 형을 감경해야 했던 조항을 임의 규정으로 변경하는 일명 '김성수법' 개정이 이뤄졌습니다.
 
'소방공무원을 국가직으로 전환해주세요'(2019.4.5. 38만 769명) 청원 이후 그 다음해 5만 2516명의 소방공무원이 전원 국가직으로 전환됐을 뿐만 아니라 국립소방병원 건립(2024년 개원) 등 처우 개선을 위한 노력으로 이뤄졌습니다.
 
'어린이들의 생명안전법안 통과를 촉구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2019.11.11. 41만 5691명) 등 어린이 교통안전 요구 관련 4건의 청원 이후 어린이보호구역 내 사망사고 발생시 가중처벌, 어린이보호구역내 주정차 전면 금지 및 과속단속카메라와 과속방지턱, 신호등 설치 의무화 등의 법·제도 개선(일명 '민식이법')이 이뤄졌습니다.
 
이 외에도 경비원·청소노동자 등의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법과 제도가 생기고, 동물보호법이 강화되는 등 5년간 277건의 답변을 필두로 사회 변화를 견인해왔습니다.

합헌이냐 위헌이냐, 논란의 서막

그런데 지난해 11월 헌법재판소는 '윤창호법'의 일부 조항에 대해 7대 2 의견으로 위헌결정을 내렸습니다.
헌재는 두 번 이상 음주운전한 경우 가중처벌한 조항에 대해 "과거 음주운전과 재범 음주 운전 사이에 시간적 제한이 없고, 죄질이 비교적 가벼운 행위까지 지나치게 엄히 처벌하도록 하여 책임과 형벌 사이의 비례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시했습니다.
    
법 시행 2년 6개월만에 일부 조항이 효력을 상실하면서 해당 조항으로 가중처벌을 받았던 사람들이 재심을 청구하거나, 보완 입법이 추진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부랴부랴 구체적인 조건을 추가하는 모습이 이어지는 것을 두고 일부 전문가들은 "국민의 법 감정을 중시해 무리하게 법을 만들었던 것 아니냐"고 지적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민식이법'의 일부에 대해서도 위헌의 소지가 크다는 목소리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대한변호사협회는 '2020 입법평가 보고서'를 통해 스쿨존내 어린이 교통 사망 사고의 처벌을 벌금형 없이 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형으로 처벌하는 현행법은 형벌 비례성 원칙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모순적인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어 개정이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시행 이후 논란이 끊이지 않는 두 개의 법이지만, 입법 당시엔 '동의수 40만'이라는 강한 동력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민식이법'의 경우, 지지 여론에 힘입어 청원 마감 하루 전날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이후 "법안들을 급하게 올리느라 정확한 내용을 모르고 표결에 들어가기도 했다"는 고백이 나오기도 했는데, 국회의 가장 기본적인 심의 과정이 축소돼버린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입니다.
 
결국 사회 혼란과 함께 보완 입법 또는 개정 등의 후속 과제를 남겨놓게 됐습니다.

3. 국민 청원 5년, 그리고 그 후

좋은 질문이 세상을 바꾼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간 좋은 질문을 던져왔을까요.
청와대 국민청원의 모태가 됐던 미국 오바마 정부의 '위더피플'(We the people) 사이트는 트럼프 대통령 취임후 폐쇄됐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해 국민청원 4주년을 맞아 "2022년 말 국회·법원 등 모든 정부기관에 '온라인 청원 시스템'이 도입된다"고 밝혔습니다. 국민청원제도의 적극 활용을 계기로 헌법 제26조에 규정된 청원권이 전면 개정된 결과입니다.
과연 앞으로는 또 어떤 '질문'들이 우리 사회를 주도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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