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코로나19 손실보상을 위한 추가경정예산(추경)안에 대해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박종민 기자북한의 코로나19 확산 사태를 계기로, 첨예한 갈등의 소재였던 대북지원 여부를 놓고 모처럼 초당적 기류가 만들어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16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북한 당국이 호응한다면 코로나 백신을 포함한 의약품, 의료기구, 보건 인력 등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통일부는 이날 북한에 방역협력을 제안하는 통지문 발송을 시도했고 북측은 일단 접수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윤 대통령 "코로나 백신 등 지원 아끼지 않을 것"…모처럼 초당적 협력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이 지난 15일 또다시 비상협의회를 소집하고 방역대책토의사업을 진행했다고 조선중앙TV가 16일 보도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협의회를 지도하면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관련 의약품이 제때 공급되지 못하고 있다며 중앙검찰소장 등을 강하게 질책했다. 연합뉴스어찌됐든 대북 교류‧협력에 소극적으로 평가되는 보수정부가 코로나 방역에 대한 전폭적 지원 의사를 즉각적으로 밝힌 것은 다소 이례적이다.
이는 북한의 코로나 감염 추정 발열자가 121만 명을 넘고 누적 사망자가 이미 50명에 이르는 등 상황이 그만큼 심각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불과 1,2년 전만 해도 식량 지원은 물론 코로나 백신 지원을 놓고도 보수층 내 거부반응이 컸던 것과 사뭇 달라졌다. 대북전단 논란을 일으켜온 모 탈북민단체도 전단 대신 코로나 의약품을 보내겠다고 할 정도다.
문제는 북한이 남측과 국제사회가 내민 도움의 손길을 마주 잡느냐 여부이다.
여기에는 북한이 스스로 치부를 공개한 점으로 미뤄 사실상 긴급구조 신호를 보낸 것이란 해석과, 북한이 여전히 "통제 불능한 전파가 아니라"고 한 점에서 중국식 봉쇄 전략을 택할 것이란 상반된 분석이 맞선다.
北 반응 엇갈린 전망…어떻게든 국제사회와 손잡게 만드는 게 중요
김정은 위원장이 마스크를 쓰고 평양시 안의 약국들을 찾아 의약품 공급실태를 직접 요해(파악)하고 있다. 연합뉴스다만 북한의 예측 불가해성을 감안할 때 섣부른 향후 전망보다는, 북한이 어떻게든 외부 지원을 수용하도록 하는 게 지금으로선 훨씬 의미가 있다.
북한이 핵실험 재개까지 위협하며 긴장 수위를 끌어올리는 차에 뜻밖의 코로나 변수로 인한 상황 반전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방선거를 앞둔 윤석열 정부로선 어떤 결과가 됐든 정치적으로 손해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과거의 대북지원 실패 사례를 교훈 삼는다면, 통 크고 신속하되 생색은 내지 않는 게 최소한의 성공 법칙이라 할 수 있다.
비교적 최근 사례는 정부가 2019년 6월 북한 식량난을 고려해 쌀 5만톤을 북한에 무상지원하기로 했지만 북한이 거절한 것이다.
정부는 1995년 쌀 15만 톤을 북한에 처음 지원한 이후 2000~2007년 거의 매년 40~50만 톤의 쌀이나 옥수수를 북한에 보냈다.
따라서 2019년 당시에도 5만톤 수준의 '찔끔 지원'은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이란 지적이 있었지만 부정적 여론을 이유로 규모가 축소됐다. 그나마 이조차도 쌀 포대에 '대한민국'을 표기하기로 함으로써 북측의 거부감은 더욱 커졌다.
'찔끔 지원' 등 과거 사례 반면교사…"한미정상회담서 통 큰 메시지 필요"
같은 해 초부터 추진되다 무산된 독감 치료제 타미플루 대북지원은 미국과의 협의 때문에 지지부진하다 실패한 사례다.
대북제재 위반 소지가 전혀 없는 순수한 인도적 지원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운송수단(트럭) 문제를 놓고 유엔사 등과 줄다리기 하다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기왕에 돕기로 했으면 넉넉하고 신속하게 도와주는 게 받는 입장에서 고마움을 느끼는 법인데, 차라리 아니 한 것만 못한 결과가 된 셈이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CBS노컷뉴스와 전화통화에서 "한미정상회담에서 북한 18세 이상 인구를 감안해 백신 3500~3600만 도스 정도는 줄 수 있다는 통 큰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정 전 장관은 "북한에 육로를 통해 직접 지원하겠다는 식으로 구체적 방식까지 언급하는 것도 진정성을 보여줄 수 있다"며 "북한이 처음에는 거절하겠지만 지속적인 노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北 자존심도 배려해야…전통문 한 장에도 위로 담는 정교함 요구돼"
북한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 중인 가운데 지난 16일 경기도 파주시 접경지역에서 바라본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 임진강변 초소에서 인공기가 펄럭이고 있다. 연합뉴스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도움을 주되 북한의 자존심은 지켜주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다.
이는 북한 내 아사자가 속출하던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대의 대북지원 실패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다.
당시 정부는 대북 식량지원과 이산가족 상봉을 연계하며 단기적 성과도 얻으려 했고, 그 과정에서 '인공기 게양 사건' 등 오해와 자존심 싸움이 얽히며 오히려 관계악화로 이어졌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대북지원은 북한에 대한 저자세가 아니라 협상의 마중물이자 고도의 전략"이라고 지적했다.
양 교수는 "전에 북한 김정은 위원장도 문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서 '남녘동포들의 소중한 건강'을 언급했듯, 대북전통문 한 장을 보내더라도 코로나 확산에 대한 위로의 내용을 담는 등 상대를 배려하는 정교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