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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벌' 대신 '자율'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 죽음의 행렬 멈출까?



경제 일반

    '처벌' 대신 '자율'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 죽음의 행렬 멈출까?

    정부, OECD 평균 수준으로 사망산재 줄이기 위한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 공개
    노·사·전문가 함께 사업장 위험요인 찾아 예방하는 '위험성 평가'가 핵심
    "노동부 스스로 제도 무력화했는데…진정성 있다면 제도 검토부터 꼼꼼하게 해야" 비판도
    노동계, 노동자 참여 등 충분히 보장될까 의문…중대재해법 연계로 '처벌 완화' 악용될까 우려도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30일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에서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에 대해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30일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에서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에 대해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정부가 중대재해를 예방하기 위한 중장기 과제를 제시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으로 중대재해를 감축하기 위해 정부가 강조한 '자율적 안전체계'가 과연 해마다 반복되는 '죽음의 행렬'을 막을 수 있을까?

    고용노동부 이정식 장관은 지난달 30일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을 공개했다. 향후 윤석열 정부 임기 5년 동안의 중대재해 예방 대책을 총망라한 중장기 정책 계획이다.

    정부는 '사망사고 만인율', 즉 노동자 1만명당 산재사망자 비중을 0.4‱대인 현재 수준에서 2026년까지 OECD 평균 수준인 0.29‱까지 줄이겠다는 목표다.

    이를 위해 발표한 이번 계획에서 단 하나의 키워드를 꼽으라면 단연 '위험성 평가'다. '위험성 평가'는 사업주가 자신의 사업장 내 유해·위험요인을 안전보건관리책임자·관리감독자·대상 작업 노동자 등과 함께 파악해 관련 대책을 세워 실행하는 제도다.

    이는 전혀 새로운 제도가 아니다. 이미 2013년부터 시행 중이지만, 강행 규정이 미약해 2019년 조사에서 전체 기업의 66.2%는 위험성평가를 실시하지 않았고, 실시한 곳도 부실한 사례가 많았다.

    이 때문에 정부는 위험성 평가를 내년부터 기업 규모에 따라 단계적으로 5인 이상 모든 기업에 의무화하고, 실제 효과를 발휘하도록 처벌 규정도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더 나아가 위험성평가를 중심으로 산안법과 노동부의 감독 체계도 개편할 계획이다.

    이처럼 정부가 위험성 평가에 주목한 이유는 우선 산업안전분야에서 노사가 자율적으로 예방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전세계적인 '메가 트랜드'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벤치마킹 사례로 강조하는, '자기규율 예방체계'를 강조했던 1972년 영국의 로벤스보고서 뿐 아니라 미국, 일본, 독일 등 주요 선진국에서도 노사의 자율적인 재해 예방 노력을 강조하고 있다.

    또 다른 이유로는 지난 문재인 정부 시절 실행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의 약효가 다 했다는 주장이다. 2019년 재해 관련 통계 지표가 크게 개선됐지만, 정작 이후 3년 동안 제자리 걸음만 걸었다는 지적이다.

    스마트이미지 제공스마트이미지 제공
    실제로 산안법 개정 및 중대재해법 제정 이후 '처벌'보다 '예방'에 집중해야 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예를 들어 성실하게 재해 예방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끝내 재해가 일어난 기업을 처벌하는 것 이상으로, 아직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재해 예방에 투자하지 않고 있는 기업들을 바꿔놓는 것도 중요하다는 논리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러한 정부의 진단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고 있다. '처벌과 규제'에서 '자율과 예방'으로 눈길을 돌린 시도를 긍정적으로 볼 수 있지만, 기존 산업안전보건 정책·제도에 대한 충분한 평가가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정진우 안전공학과 교수는 "정부 인수위원회 업무보고 당시 자율안전관리체계를 구축하기로 발표하자 노동부가 여기에 맞춰서 서둘러 준비한 것 아닌가 싶다"며 "방향은 좋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충분한 고민이 담기지 않아 보여주기에 급급한 것 아닌가 아쉽다"고 평가했다.

    우선 그동안 '위험성 평가' 제도가 왜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는가에 대한 반성부터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노동부는 스스로 "강행성 없이 도입돼 미작동하거나 형식적으로 운용됐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위험성 평가 자체에는 벌칙규정이 없지만, 이를 사업장의 관리감독자로서 사업주의 의무로 보아 500만 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정 교수는 "2017년 노동부 지침으로 과태료를 부과하지 않기 시작했고, 위험성 평가의 시정명령도 노동부가 초안을 잡은 산안법 개정 과정에서 사라졌다"며 "본인들 손으로 제도를 무력화했는데도 기존 제도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 없이 새로운 것을 내놓는 척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정부가 정말 위험성 평가의 취지와 도입 배경 등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의문"이라며 "진정성이 있다면 현재 법 제도에 멀쩡하게 보장된 것을 제대로 활용, 운영하려는 의지부터 보여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정부가 산재예방 제도의 방향을 '자율'에 맞추면서 처벌 중심의 산안법 개정, 중대재해법 제정이 더 이상 효과를 거둘 수 없다고 단언한 것도 친기업 성향인 현 정부의 입맛에 맞추기 위한 '무리수'라는 비판도 나온다.

    중대재해법이 시행된 지 아직 1년이 채 지나지 않았고, 관련 판결이 내려지기는커녕 기소된 사례조차 몇 없다. 개정된 산안법으로 강화된 처벌이 반영된 양형기준도 지난해 7월에야 시행된 상황에서 너무 섣부른 주장이라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해 서울사이버대 강태선 안전관리학과 교수는 이번 로드맵 발표 자체가 중대재해법의 성과라고 짚기도 했다.

    강 교수는 "그동안 노동부의 산업안전보건 조직이 수십 년 동안 1국 5개과 수준이었는데, 중대재해법을 계기로 본부급으로 격상됐다"며 "그동안 현장의 사고를 수습하느라 중장기 계획을 세울 여유조차 없었는데, 조직이 확대되면서 로드맵까지 나오게 됐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처럼 조직이 있어야 정책을 세우고, 실행할 수 있는데 이번 로드맵에는 관련 내용이 빠졌다"며 "이러한 중장기 과제를 다루려면 노동부 안에 산업안전 분야를 전문적으로, 누적적으로 연구하고 정책 집행 과정을 실시간으로 평가할 수 있는 연구조직이 필요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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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계는 위험성평가를 강조한 로드맵이 '수박 겉핥기'로 진행되는 수준을 넘어 자칫 중대재해가 발생한 기업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노동자의 위험작업중지에 대한 사업주의 불이익 처우에 대한 처벌도 없고, 포괄적 작업중지권을 보장하는 외국과 달리 범위와 요건을 매뉴얼로 정하겠다고 한다"며 "노동자 참여에 대한 활동시간 보장도 없다"면서 노동자의 참여를 보장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한국노총도 "로드맵에 위험성 평가 등이 일부 강화됐으나 작업 중지 완화와 노동자 처벌 등 경영계가 지속해서 요구한 안전보건규제를 완화하는 내용이 곳곳에 박혀있다"며 '솜방망이 처벌'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특히 노동계는 위험성 평가를 중대재해법의 처벌 수위와 연계한 것을 불안한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다.

    정부는 위험성평가를 실시한 기업에서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노력한 내용을 수사자료에 담아 구형‧양형에 고려하도록 하고, 중대재해법의 처벌 기준에서도 위험성평가 관련 내용을 처벌요건에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민주노총 최명선 노동안전보건실장은 "위험성 평가 내용을 수사자료로 삼는다면, 실제 감독관이 수사할 때부터 방향을 잡고 가지 않겠느냐"며 "일선 감독관, 수사관이 위험성 평가의 실시·이행이 제대로 됐는지 판단할 전문성을 갖췄는지도 의문"이라고 우려했다.

    또 산안법을 모든 사업장이 지키도록 해 처벌에 무게를 둔 핵심규정과, 사업장 상황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예방규정으로 이원화하겠다는 시도에 대해서도 "처벌 규정을 축소하겠다는 얘기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최 실장은 "세세한 규정을 다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처벌하는 것은 과도하다는 것이 정부의 인식"이라며 "자율로 바꾼다고 해서 기존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풀어주는 것은 안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강 교수는 "현재 사법부는 위험성 평가를 한 곳에서 사고가 나면 '알면서 방치했다'며 더 강하게 처벌하는 모순을 빚고 있다"며 "중대재해가 발생한 사업장을 봐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업주들이 올바르게 행동하도록 하는 사법 절차, 판단을 만들 필요도 있다"고 해석했다.

    또 산안법 핵심규정·예방규정으로 나누는 데 대해서는 "처벌규정을 더 꼼꼼하게 만들고, 예방 규정은 기존에 규범력이 없던 것을 갖도록 만드는 과정일 수 있다"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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