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막대한 부채를 안고 매일같이 밀려오는 만기 외채를 막는데 급급하고 있어요.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금고가 비었어요. 우리는 지금 아주 빚투성이에요. 올 한 해 동안 물가는 오르고 실업은 늘어날 것입니다…(중략)…우리 모두는 지금 땀과 눈물과 고통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취임연설에서 외환위기로 나라 재정이 거덜난 상황을 국민에게 소상히 설명하면서 위기극복에 힘을 모아달라고 호소했다. 대통령의 국민소통은 문제점에 대한 공감대를 확산시키고 지지를 끌어내는 강력한 수단이다.
당시 정부는 모순이 쌓인 경제구조에 메스를 들이대며 '빅딜' 구조조정을 가속화했고 국민들은 금모으기운동으로 십시일반 힘을 보태며 나라살리기에 온 힘을 모았다. 허리띠를 졸라멘 대한민국은 구제금융 3년만에 부채 대부분을 갚고 IMF위기 탈출을 공식 선언했다.
정당과 이념, 주의주장을 떠나 위기극복의 필요성이 절실했기 때문에 국민 모두가 힘모으기에 주저하지 않았고 위기의 실상을 가감없이 국민에게 알린 대통령의 진솔한 소통이 국민들을 더욱 강하게 응집하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4반세기가 흐른 2025년 대한민국은 또 다시 커다란 위기를 맞고 있다. 이념대립으로 나라가 절반으로 쪼개지고 경제의 저성장이 굳어지는 상황에서 미중 양 강대국으로부터 강한 통상압력과 견제를 받고 있다. 전국의 아파트 미분양이 넘쳐나고 있고 골목상권은 '장사가 안된다'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초 취임한 뒤 정부조직과 국정과제를 세팅하느라 숨가쁘게 달리던 발걸음을 잠시 멈춘 채 국민과의 소통의 장에 나섰다. 집권한 지 딱 30일만이다. 역대 정부 가운데서도 가장 빠른 편에 속한다.
탄핵 후 치러진 대선에서 뽑힌 대통령이라 인수위원회 없이 정부가 출범했지만 인수위를 거치며 안정적으로 스타트한 정권보다 더 속도감있게 국정어젠다를 세우고 하루가 멀다하고 굵직한 정책과 인사안을 내놓은 상황을 감안하면 정책현안과 이슈에 대한 궁금증은 커질 수 밖에 없다.
첫 회견을 지켜보면서 떠올린 건 '진솔하다'는 단어다. 과거 정권에서 청와대를 출입했던 경험에 비춰봐도 이 대통령의 화법은 있는 '사실'과 '그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가감없이 전달하려는 의지를 느끼게 하는 뭔가가 있었던 것 같다.
타운홀미팅으로 진행된 첫 기자회견은 몇 가지 점에서 국민과의 소통의지를 분명히 내보인 것으로 평가한다. 우선 다수의 역대정부와 달리 기자회견의 내용과 형식을 사전에 정하지 않아 국민들의 궁금증이 자연스럽게 회견에 녹아들 수 있었다. 주목할만 부분은 새정부 출범 후 초미의 현안으로 떠오른 사안들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이 잘 드러났다는 점이다.
야당 대표 시절 또는 대선 후보 때도 줄곧 해오던 말이긴 하지만 대통령이란 지위에 올라 국정을 이끄는 위치에서 국민들에게 하는 말은 그 무게감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추경을 둘러싼 논란에 대한 대통령의 말은 대한민국의 현 상황에 대한 솔직한 생각과 심경이 드러난 것으로 보였다. "추경을 하면 정육점이 장사가 잘될거란 얘기도 있다. 아이 데리고 고기 한번 실컷 먹어봐야지란 얘기도 있다. 10대 경제강국이라고 자부하는 나라가 먹고 사는 문제에 애닯아 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다.
이 말은 민생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이 어디에 미치고 있는지를 미뤄 짐작해보기에 충분한 것 같다.
수도권 신도시 신설 주장에 대해 "그린벨트를 훼손해 신도시를 만들자는 건 지방 입장에서는 (목마르니) 소금물을 계속 마시자는 것과 같다"는 메시지를 전달했고, 논란이 되고 있는 검찰개혁과 관련, "10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1명의 억울한 사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비유로 검찰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강한 개혁의지를 드러냈다.
새 정부가 추진중인 핵심 국정사안에 대해 긴 시간을 할애하며 대통령의 생각을 소상히 밝힘으로써 정책의 방향성과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굳이 진솔한 소통으로 외환위기를 극복한 과거의 사례를 소환하지 않더라도 주권자인과 국민과의 소통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연합뉴스대통령 권력은 주권자인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으로 소통을 통해 국민들의 생각을 듣고 혹여라도 잘못된 방향이 있다면 언제든 클릭을 조정하며 나가야 한다. 이는 대통령이면 누구나 소홀히 해서는 안될 중요한 책무 중의 책무다. 대통령이 재임 중 가장 신경을 써야할 부분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재명 대통령의 소통노력이 일회로 그치지 않고 지속될 것이라고 믿고 싶다. 국민을 위한다거나 국민만 바라보겠다던 정권들이 커다란 성과에 취해 소통의 초심을 잃은 채 독선으로 흐른 사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사례가 부지기수이다. 권력자가 국민으로부터 멀어져 지지를 잃어버린 경우도 허다하다.
국민으로부터 괴리되지 않고 뜻을 소상히 살펴 아는 데 '격의없는 기자회견' 만한 것도 없다. 불통이 문제가 된 사례는 굳이 멀리서 찾아볼 필요도 없다. 기자회견이다 도어스테핑이다 해서 집권초 대국민 소통에 열을 올렸지만 취임 수 개월만에 돌연 도어스테핑을 중단한 건 얼마전의 일이다.
대통령 전용기에서 일부 언론을 배제시킨 사건이나 지지율 하락 '도어스테핑 책임론'이 불거진 뒤 대국민 소통이 뜸해지고 국민적 지지를 잃어버렸던 전임정권의 사례는 현 정부가 참고해볼 가장 가까운 반면교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