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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고품격 뉴스, 세상을 더 크고 여유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CBS <김현정의 뉴스쇼=""> ''기자수첩 시즌2''에서는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았다. [편집자 주]김현정의>
서울 구로동 지역 농민 200여명은 오랫동안 농사짓던 땅이 1942년 일본 육군성에 강제 수용됐다. 다행히 일본군이 곧바로 사용하지 않고 방치하는 바람에 계속해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해방이 되면서 일본 소유의 땅이니 당연히 귀속농지의 관리를 맡은 신한공사로 넘어갔고 중앙토지행정처, 귀속농지관리국의 관리를 받으며 농사를 짓고 살았다.
1949년 이승만 정부는 농지개혁법을 만들고 1950년 6.25 직전에 농지개혁을 단행했다. 조선시대에서 대한제국,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농사짓고 살아 온 땅이 드디어 대한민국에서 내 땅이 된 것이다. 그런데 6.25 전쟁이 끝나면서 국방부가 일본군 소유의 땅이었으니 국방부로 넘기라고 요구했다. 다행히 서울시와 영등포구청이 국가적인 농지개혁에 의해 법으로 농민에게 준 땅이라고 난색을 표했고(후에 입장 변경), 법원이 농민 편을 들어 주어 무사히 넘어갔다.
◇구로동 농민을 묻어버린 구로공단 문제는 5.16 군사쿠데타가 터지면서 불거졌다. 박정희 정권이 이들의 농토에 ''구로공단(구로수출산업공업단지)''을 짓겠다며 농민들을 강제로 쫓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깡패들이 나타나 농사일을 방해했고 밤사이에 논에 깨진 유리병 조각, 폐기물, 돌 등을 쏟아 부었다. 농민들을 강제로 내몰더니 논을 메우고 공단부지를 조성했다며 분양했다. 또 논 위에다가 간이주택이라는 조잡한 집을 마구 짓더니 청계천에서 쫓아낸 철거난민들을 수용했고 시영주택을 지어 분양도 했다.
쫓겨난 농민들은 이 땅이 오랜 세월 농사짓고 살다 국가로부터 국법에 의해 분배받은 농지임을 주장하며 1964년 소송에 들어갔다. 군사정권이 얼마나 무서운지 미처 몰랐던 순진한 공무원들도 농민들이 법으로 분배받은 땅이 맞다며 법정에서 농민 편을 들어줬다.
이번엔 공무원들이 어디론가 끌려갔다. 끌려갔다 돌아 온 공무원들은 농민들 땅이 아니라고 진술을 번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농지개혁법에 의한 분배서류가 구청에 남아 있고, 분배받은 대가로 농민들이 수확한 곡식을 정부에 가져다 바친 기록이 남아있어 법원은 당연히 농민들 땅이라고 판결했다.
그러자 군사정부는 농민들이 소송과정에서 사기를 치고 서류를 조작했다며 소송사기범으로 몰아 표적수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사기범들이 조작한 증거로 이뤄진 민사소송 재판을 다시 해야 한다며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그런데 법원은 군사정권의 억지라며 농민들을 모두 풀어줬다. 1968년에 벌어진 사건이다.
1969년 3선개헌으로 장기집권을 노린 박정희 군사정권으로는 구로공단 조성이 대단히 중요한 공약 사업이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절대로 재판에서 지지 말고 땅을 차지하라며 법무부 장관에게 특명(증거자료 - 청와대 특별지시 문건)을 내렸다. 대통령의 특별 지시가 떨어지자 수사기관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져 버렸다. 꼭 42년 전인 1970년 7월 농민들 집으로 검은 지프차들이 몰려들더니 농민들을 싣고 가버렸다. 잠깐 어디 가 이야기만 하면 된다고 해서 러닝셔츠에 양말도 신지 않고 지프차를 탔던 농민들은 불법구금에 가혹행위를 당했다. 땅을 차지하려고 사기 소송을 벌인 걸 인정하고 땅을 포기하라고 했다.
국가가 법으로 농민들에게 나눠준 땅이 맞다고 소신껏 증언한 공무원들도 끌려갔다. 공무원들이 끌려 간 곳은 서울 프레스센터 뒤에 있던 뉴서울 호텔. 호텔방에 벽을 보고 무릎을 꿇린 채 구두 발에 채이고 위협과 모욕을 당했다. 결국 땅을 포기하지 않은 농민 26명 등 40 여명이 소송사기죄, 위증죄로 재판에 부쳐져 감옥에 갔다.
당시 끝까지 결백과 권리를 주장했던 한 모 씨. 아들이 서대문 형무소로 찾아와 병색이 짙은 아버지 얼굴을 보며 "아버지 땅 내주고 살아서 나가요"라고 울며 청했다. 마치 부산일보와 부산MBC, 서울MBC를 빼앗기던 부일장학회 김 씨 부자의 감옥 상봉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한 씨는 "차라리 국가사업을 위해 땅이 필요하니 도와달라고 했으면 기부했을 거다. 느닷없이 깡패를 동원해 쫓아내더니 나라 땅을 탐낸 사기꾼이라고 몰아붙이니 누명을 벗고 결백을 증명하기까지 물러설 수 없다"며 흔들림이 없었다고 한다. 한 씨는 그 후 형기를 마치고 감옥에서 나와 겨울에도 웃통을 벗고 부채질을 하며 화병을 앓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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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와 사죄가 없으면 나라도 아니다 수백명의 농민들이 포기하거나 사기범으로 형이 확정되기까지 박정희, 전두환 정권을 거치며 15년이 흘렀다. 모든 농민에 대한 처리를 끝낸 뒤 군사 정권은 박정희 대통령이 절대로 지지 말라 지시했던 민사소송 재심을 시작했다. 권리를 주장한 사람들이 모두 사기범이 되었으니 당연히 구로 땅은 노태우 정권 시절인 1989년 국가 차지가 되었다.
그러나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이 사건을 조사해 청와대, 검찰, 정보기관, 시청, 구청 모든 권력기관이 농민들의 땅임을 뻔히 알면서도 강제로 빼앗기 위해 협박과 공문서위조 재판조작 범죄를 벌여 왔음을 밝혀내고 재심권고 결정을 내렸다. 농민들의 누명은 재심 재판을 통해 벗겨져 모두 결백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재판에 의해 범죄자가 된 지 30년, 권력과의 싸움이 벌어진 지 50년이 지났다. 살아남아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재판 당사자는 할아버지가 된 그 아들들이고 집에 없는 어머니 대신 끌려가 죄인이 된 젊은 아가씨는 할머니가 됐다.
그런데 아직 땅은 농민들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땅을 되찾기 위해 농민이 민사소송에서 이겨 지켰던 땅을 권력의 재심으로 도로 빼앗겼고, 다시 재재심이 진행됐다. 권력은 농민들에게 땅을 되돌려 주지 않기 위해 하나의 땅을 여럿으로 쪼개고 쪼갠 땅을 섞고 합쳐 어느 것이 누구의 땅인지 알아 볼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졸렬하고 치사하다. 이건 나라도 아니다.
2012년 7월 20일은 법원에서 그 재재심의 선고가 있는 날이다. 꼭 땅을 되찾으라 응원을 보낸다. 힘없는 농민을 짓밟은 지 꼭 50년 만에 이뤄지는 ''역사 바로 세우기''이다.진실화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