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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후보, 정녕 카인의 후예가 되려는가?

기자수첩

    박근혜 후보, 정녕 카인의 후예가 되려는가?

    [변상욱의 기자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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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마가 있는 고품격 뉴스, 세상을 더 크고 여유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CBS <김현정의 뉴스쇼=""> ''기자수첩 시즌2''에서는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았다. [편집자 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의 인혁당 발언이 이번 한 주도 최대 이슈였다. 인혁당 사건은 1차와 2차가 있다.

    ◈ 1차 인혁당 사건, 공안 검사도 기가 막혀

    1차 인혁당 사건은 1964년 8월 14일, 중앙정보부가 ''''인민혁명당 사건''''을 조작해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지명수배한 사건이다. 중앙정보부 발표대로라면 당시로는 해방 이후 최대의 엄청난 간첩사건이다.

    그런데 사건의 증거와 정황이 너무도 뻔한 것이어서 검찰 공안부장(부장검사 이용훈)을 비롯한 최대현, 김병리, 장원찬 등 검사 4명 모두가 중앙정보부 주장이 증거가 없다며 공소를 기각했고 결국 검사직을 내놓고 검찰을 떠났다. 당시 사표를 제출한 장원찬 검사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 하였다.

    ''''... 피의자들 모두가 ''''인혁당''''이란 단어를 들어본 일이 없고 모두 고문에 의해 한 것이라고 혐의사실을 강력히 부인했다. 그건 증거로서 효력이 없다. 하다못해 심증이 갈만한 무슨 종이쪽지라도 있어야 할 텐데 정말 하나도 없어 답답했다. 공안부 다른 선배 검사들의 심정도 마찬가지였다. 무리하게 기소를 한다 해도 공소유지에 자신이 없었다. 그것은 또한 나의 양심에 배치되는 짓이었다.''''

    사법부도 이 사건을 황당하다고 판단했다. 기소된 57명 중 2명에게만 징역 3년 이하의 실형을 선고하고 모두 풀어줬다. 1차 인혁당 사건은 한일회담이 군사정권의 정치자금 마련을 위해 굴욕적으로 일본에 구걸했다고 비판하는 학생.시민운동의 싹을 자르려는 의도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그 다음에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고, 민청학련을 빌미로 2차 인혁당 사건이 벌어졌다.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은 1973년 여름 이후 조직적인 반유신 운동을 목적으로 전국 대학생 시위를 기획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이뤄진 조직이다. 학생, 교수 등 지식인 사회, 종교계까지 유신반대에 나서자 위기의식을 느낀 군사 정권은 일단 긴급조치 1호.2호 등을 잇달아 발동시키고 비상군법회의를 설치해 저지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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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청학련과 2차 인혁당, 암흑의 유신시대

    그리고 10년 전의 ''''인혁당 사건''''을 꺼내 재활용하고자 했다. 1974년 4월 민청학련의 배후세력이 인혁당이며, 민청학련을 배후에서 조종해 대규모 지하조직을 구축하고 국가전복을 기도하였다고 제 2차 인혁당 사건을 날조해 터뜨린다.

    이 사건으로 1,024명이 체포됐고, 비상보통군법회의 1심과 2심, 대법원 판결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돼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의 확정판결, 다음날인 4월 9일에 8명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것이 국제법학자협회가 1974년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지정하게 된 경위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유신 전과 유신 이후가 어떻게 달라지는가이다. 1972년 유신으로 박정희 정권이 장기 독재가 아니라 아예 영구집권 내지는 히틀러 식 총통제를 실시할 것이라는 흉흉한 여론이 사회를 지배했다. 실제로 군사반란, 한일굴욕외교, 장기집권을 위한 3선 개헌까지 치달려 온 박정희 정권으로서 남은 순서는 영구집권 뿐이기도 했다. 그것을 위해 권력구조와 국민 여론을 완전히 재구성하려는 것이 유신헌법의 목적이었을 것은 확연하다.

    그 결과 검찰을 건너 뛰어 비상군법회의가 교수.학생들을 수사하고 대법원에서도 60년대 1차 인혁당 사건 때와는 달리 무지막지한 수사결과를 군말 없이 통과시켰다. 검사가 뭐 이런 말도 안되는 간첩조작사건이 있냐며 기소를 거부한 뒤 사표를 쓰고 사법부가 대부분 무죄로 풀어주었던 1960년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로부터 32년이 지나 문민정권이 들어 선 뒤 진상규명 작업을 벌이고 사법부의 재심으로 뒤늦게나마 역사를 바로 잡은 것이 인혁당 사건의 경과이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앞으로의 판단에 맡긴다고 하는데 그러면 인혁당 사형수들을 다시 유죄로 바꾸어 버릴 수도 있다는 얘긴가? 사법부의 재심이란 확정 판결이 났으나 사실에 대한 중대한 오인 등이 드러나면서 과거의 판결을 고치는 비상구제 절차이다. 그러니 유신 정권 시절 인혁당 관련자들에게 사형을 선고한 재판은 기록으로는 남아 있지만 법적 효력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 후보의 판결이 2개 있지 않느냐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보자. 그 말이 맞다. 어찌 억울한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은 사법살인 재판이 나중에 고쳐줬다고 해서 역사에서 사라지겠는가. 그 판결은 사법부 굴욕의 표식으로 영원히 남아 언제나 경종을 울려야 한다. 인혁당 판결은 영원히 2개가 맞다.

    역사의 기록은 나중에 뜯어 고친다 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5.16을 국가재건을 위한 명예로운 군사혁명이라고 색칠해 국가 기록과 교과서에 적어 넣는다 해도 군부 소장세력들의 무장반란인 것은 지울 수 없다. 군사반란을 이끈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왕에게 혈서를 써 바친 일본군 군관 출신인 것도 그가 나중에 국군통수권자가 되었다고 해서 지울 수 없다. 그의 군 경력은 일본군, 국군 영원히 두 개이다. 또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남로당 출신인 것도 역시 그가 훗날 공화당 총재가 되어 반공정책을 폈다고 해서 없던 일로 삭제되지 않는다.

    그 대가를 이제라도 대신 치르라는 뜻이 아니다. 역사적 사실과 진실을 결코 가벼이 여겨서는 아니 되며, 진지하고 엄숙히 받아들여야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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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세기에 등장한 카인의 후예

    지금 그런 거 따질 필요는 없지 않느냐,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라는 역사인식도 따져 보자.

    ''''역사가 나의 무죄를 증명하리라''''는 말은 기록상으로는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가 처음 외친 항변이다. 쿠바의 부패한 독재정권에 항거해 반정부군을 이끌던 카스트로는 무장항쟁 초기에 몬카다 병영습격사건이라는 걸 벌였다가 체포돼 징역 15년 형을 받았다. 당시 신분이 변호사였기 때문에 자신과 동료들에 대해 법정에서 변론한 내용이다.

    ''''오늘 당신들은 한 명의 피고를 심판하지만 당신들 역시 심판 받으리라는 것을 기억하라. 훗날 오늘의 재판을 돌이켜 볼 때마다 당신들은 심판받고 또 심판받고 그럴 것이다... 사법부가 겪게 될 전무후무한 치욕이 안타까울 뿐이다. 나는 비열한 독재자의 분노를 겁내지 않듯이 감옥 역시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를 비난하라, 그것은 상관없다. 역사가 나를 사면하리라.''''

    ''그 후로 역사가 증명하리라, 역사가 나의 무죄를 밝히리라...''는 표현은 억울한 이들의 항변에서 종종 인용되었다. 그런데 그 사례 중 하나가 바로 인혁당 사건이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 8명이 사형에 처해지던 1975년 4월 9일 군목으로서 사형집행장에 입회한 박정일(70)목사의 증언 일부를 간추려 읽어보자. (당시 군종참모로 33세의 육군 대위)

    새벽 4시 서울구치소 사형집행장에 도착해 기다리니 4시 30분 흰색 죄수복을 입은 첫 번째 사형수가 들어왔다, 백열등이 환하게 켜진 방안으로 들어온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여기가 어디야? 도대체 무슨 일이야?" 주위를 둘러본 그가 물었다, 법무관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사형을 집행한다는 판결문을 읽고 유언을 물었다, ''''난 억울해, 하지만 언젠간 모든 일이 밝혀질 거요!'''' 사형수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집행관은 사형수의 머리에 검은 복면을 씌웠다, 목에 밧줄도 감았다, 잠시 뒤 버튼을 누르자 사형수 발밑에 송판이 열렸다, 군의관은 다가가 숨진 것을 확인하고 주검을 치웠다, 한 사람당 30분씩 걸렸다. 뒤이어 들어온 사형수들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가운데서도 이수병씨는 ''''나는 유신체제에 반대한 것밖에 없고, 민족과 민주주의를 위해서 투쟁한 것밖에 없는데 왜 억울하게 죽어야 되느냐! 반드시 우리의 이번 억울한 희생은 정의가 밝힐 것이다,''''

    이렇게 역사가 나의 억울함을 증명할 것이라는 부르짖음은 부당한 권력에 항거하는 사람들이 외치는 것이지 권력자가, 권력을 누려온 자가, 더 큰 권력을 쥐려는 자가 우물우물 거릴 말이 아니다. 그것은 명백한 오류이자 책임회피이다. 토론을 벌이다 대답을 못 찾아 궁색해지면 논증의 자기책임을 회피하고 실체도 없고 언제 등장할지도 모르는 막연한 미래에 책임을 떠넘기는 행위를 논리학에서 ''''미래도피의 오류''''라고 한다. [BestNocut_R]

    논증의 회피와 불능은 엄연히 다른 상황이다.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은 억압된 상황에서 어떤 논증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자 신념에 의해 미래와 역사를 불러 왔고, 그 죽음에 책임이 있는 절대권력자의 후예는 따지지 말자는 뜻으로 미래와 역사를 불러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성서에는 동생을 살해한 뒤 진실을 캐묻는 神에게 ''''그걸 왜 내게 묻습니까?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라며 진실된 대답을 회피하는 인간이 등장한다. 바로 카인이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우리는 집권당 대선 후보가 ''카인의 후예''가 되어 대답을 회피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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