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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된 성차별, 대중문화는 어떻게 조장했나



책/학술

    진화된 성차별, 대중문화는 어떻게 조장했나

    신간 '배드 걸 굿 걸_성차별주의의 진화: 유능하면서도 아름다워야 한다는 주술'

     

    '배드 걸 굿 걸'의 저자는 대중문화, 뉴스, 각종 매체를 통해 ‘여성’과 ‘여성성’이 어떤 식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어떠한 굴레를 만들어왔는지 분석한다. 그리고 이를 ‘진화된 성차별’이라 진단한다.

    ‘진화된 성차별’은 성평등이 실현되었기에 이전 시대에 페미니즘운동이 외쳤던 구호는 이제 필요 없다는 전제 위에 쌓인 새로운 성차별주의다. 진화된 성차별은 ‘여자는 무엇이 될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여자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그럴 능력이 있지만, 어쨌든 “여성스러워야” 한다’고 말한다. 뚱뚱한 여자, 못생긴 여자를 당연하다는 듯이 희롱하고 모든 직군의 여성에게 ‘여성스러움’의 기준을 들이대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저자가 ‘진화된 성차별’ 개념과 함께 제시하는 것은 198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 까지, TV 드라마와 영화, 뉴스와 잡지 같은 대중매체가 여성을 어떤 식으로 다루면서 ‘여성성’이라는 제약을 사려 깊게 마련하고 강화해왔는지에 관한 분석이다.

    미국에서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태어난 젊은 여성들은 ‘걸 파워’ 세대라 불렸다. 스파이스 걸스는 섹시한 옷을 입고서 남자들을 향해 ‘여자에게 잘 보이지 않을 거면 꺼지라’며 ‘미래는 여자의 것’이라 노래했고, “페미니즘은 이제 식상하다. 이제는 걸 파워의 시대”라고 말했다. 스파이스 걸스에 열광하며 자란 아이들은 그들의 어머니 세대가 목소리를 높였던 페미니즘이나 여성의 권리, 차별에 직면하는 대신 그들의 ‘소녀 문화’를 만들어갔고, 이 문화의 열렬하고도 자발적인 소비자가 되었다.
    이들을 타깃으로 제작된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은 이들의 ‘소녀 감성’을 중요하게 다룸으로써 소녀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이 TV 쇼 속 소녀들은 주로 멋진 남자와 외모 꾸미기에 온 관심을 집중했고, 인간적 성숙보다는 인간으로서 멋진 남자 캐릭터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완성되는 존재였다. ‘걸 파워’ 세대의 또 다른 주된 특징은 직장에서는 성공한 전문직 여성이지만 완벽한 남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자기 삶의 결핍에 고민하고 자조한다는 것이었다.

    TV 드라마에 이어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은 MTV 쇼와 예능이다. 여성의 몸매나 외모를 완벽하게 대상화해 소비하는 MTV의 프로그램들(각종 서바이벌 프로그램부터 뮤직비디오까지)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진화된 성차별이 시동을 걸기 시작하던 이 시기에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적 반응은 ‘시대에 뒤처지고 유머를 모르는 나이 든 여자들의 히스테리’ 정도로 치부되었다. MTV에 열광하는 딸들을 보면서 어머니들은 “그 쓰레기 같은 것 좀 꺼버려!”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소녀들은 ‘사회 속 여성 권리의 취약성을 인식하고 연대하며 투쟁해야 한다’는 말보다는, ‘이미 소녀들에겐 힘이 있으며 아름다워짐으로써 더 많은 것을 쟁취할 수 있다’는 말을 명백히 더 선호했다.

    1990년대에는 힘으로도 남자들을 앞서며 세상을 구할 숙명을 지닌 ‘여전사’들이 등장했다. TV 속 여성들은 점점 유능하고 섹시한 것을 넘어, 초현실적인 완력과 전투 기술을 뽐냈다. 또 이 시기 많은 영화에서 여성의 공격성이 매력적으로 묘사되었다. 「어 퓨 굿 맨」의 해군 소령 데미 무어, 섹스 후 얼음송곳으로 남자를 찔러 죽인 「원초적 본능」의 샤론스톤과 등등.
    하지만 현실은 사뭇 달랐다. 여전히 살해당하고 성폭행과 가정 학대, 각종 범죄에 시달리는 것은 여성이 압도적 다수였고, 가해자는 주로 남성이었다. 미디어 속의 ‘걸 파워’와 무관하게 여성들은 계속 죽었고, 데이트 강간, 집단적 성폭력 같은 사건들이 끊임없이 터졌다. 90년대 여성이 가해자였던 몇몇 사건들은 ‘여성의 폭력성’을 화두로 삼아 온 사회에 여자들이 위협적임을 경고하며 수개월간 대서특필되었고 심지어 책, 영화, 뮤지컬로까지 제작되었다. 보빗 사건(아내가 남편의 성기를 생선칼로 절단한 사건)과 에이미 피셔 사건(10대 소녀가 자신과 내연에 관계에 있던 남자의 집으로 가 그의 부인 얼굴에 총을 쏜 사건)이 대표적인데, 부인에게 성기를 잘린 존 웨인 보빗을 희화화하는 한편 에이미 피셔를 위협적 악녀로서 전국민의 비난 아래 묶어두면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위험하며 관리되어야 한다는 논조를 반복한 당시 언론의 보도들은 ‘거세불안’에 의거한 마녀사냥의 양상을 띠었다. 이것이 진화된 성차별의 등장을 뒷받침한 또 다른 줄기, 바로 남성 지배에 가해진 위협에 대한 인식이라고 저자는 분석한다.

    이제 ‘걸 파워’가 달성된 시대임을 주지시키면서도 여성을 ‘여성의 자리’에 머무르게 만드는 것, 이것이 대중매체 속 진화된 성차별이 섬세하게 겨냥한 목표였다. 검사 출신으로 빌 클린턴 정권의 법무장관이 되었던 재닛 리노는 185의 키에 악어와도 씨름을 한다고 알려진 거친 여성이었다. 그녀는 일련의 커다란 국가적 사건에 대한 책임 있는 태도와 훌륭한 직무 수행으로 국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그녀는 적절한 여성성을 드러내는 외모 꾸미기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고, 말할 때 웃음을 짓거나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는 등 여성들이 일상에서 습득하는 몸짓언어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리노는 언론에 의해 ‘레즈비언’ 의혹에 지속적으로 시달렸고, 각종 쇼에서는 그녀에 대한 희롱과 농담이 잇달았다. 유능한 국가 고위직 공무원이 사근사근하게 웃지 않는다고 해서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콩트의 단골 소재가 되는 것은 확실히 고위직 남성들은 당하지 않는 일이었다. 재닛 리노의 얼굴에 TV쇼의 섹시한 여전사의 몸을 합성하는 등의 비하 섞인 조롱은, 사회가 지정한 여성성의 범주에 개의치 않고 활약하는 여자들이 어떤 식으로 ‘관리’ 및 ‘처벌’될 수 있는가에 대한 명백한 본보기였다.

    진화된 성차별은 페미니즘이 사실상 사상된 가운데, ‘걸 파워’를 앞세워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를 ‘농담’으로 만들고 새롭고도 집요한 여성성의 틀을 만들어 강요한다. 1990년대, ‘이제 여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시대의 주체적 문화소비자로 떠올랐던 소녀들은 어느덧 대중매체가 선전하는 아름다움과 섹시함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며 갈등하는 사회인이 되었다. 여성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지만 여성답게 존재하는 것이 또한 사회가 요구하는 성취라면, 여성들은 사회 모든 분야에서 직무 능력으로 존중을 받아야 하는 동시에 여성스러운 외모와 말씨, 상냥함과 배려를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기존 남성의 영역을 위협하거나 기존 여성의 영역(출산, 육아, 가사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는 언론과 대중매체의 지속적인 메시지를 받아들인다면, 여성들은 섹시함과 애교와 눈웃음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섹슈얼리티로 남성을 위협하고 이용하는 ‘창녀’가 되어서는 안 되며, 때가 되면 커리어에 대한 ‘욕심’을 접고 아이를 낳고 내조에 힘써야 한다. 아이를 낳음으로써 여성은 “진정한 여자”가 된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잘 관리된 몸매에 유행과 개성을 적절히 유념해 옷을 입고 적절한 화장을 한 채 직장과 가정을 건사하면서 남편의 사랑도 놓치지 않는 “슈퍼우먼”이 되면 될까? 진화된 성차별의 무리한 요구 속에서 현대의 젊은 여성들은 어떻게 하면 존중과 사랑을 얻고 성취와 대인관계를 유지하며 일과 가족을 다 얻을 수 있을지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대중매체는 계속해서 그들에게 모순적인 답을 주고 있다. 섹시한 여자를 소비하면서 한편으로 손가락질하고, 모성을 찬양하는 한편으로 아줌마들을 비하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외모와 말투, 태도에 대한 금기를 범하지 않으려고 조심 또 조심하며 생존하는 것이 과연 정답일까?

    저자는 대중매체가 조롱하고 희화화한 페미니즘을 부활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여자들이 아이디어, 사회적 변화, 정치보다는 얼굴, 옷, 몸매에 더 많은 정신적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중매체의 이미지들을 역으로 비웃고 조롱해야 한다. 지금의 젊은 여성들은 외모의 중요성 혹은 절대성을 강조하지 않는 대중매체 환경을 경험한 적이 없다. 여기서 여성들은 그 결과와 해악, 부당함 및 현실과의 괴리를 지적하며 대중매체에 반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여성혐오를 재생산하는 각종 제품과 활동을 불매하고, 성적으로 적극적인 여성은 난잡하지만 성적으로 적극적인 남성은 멋지다는 식의 각종 이중 잣대를 끊임없이 공격해야 한다. 육아, 임금 평등, 여성의 빈곤, 여성에 대한 폭력, 성차별주의의 용인 및 찬양과 같은 산재한 문제에 맞서, 여성운동은 다시금 거세게 시작되어야 한다. 슈퍼우먼이 되지 못해 홀로 자책하거나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몸을 저주하는 대신 모순된 요구, 권리의 박탈, 사회의 부당함 앞에 다시 뭉쳐서 목소리를 내는 일이,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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