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6·25전쟁. 66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남북 분단 상황에서 아픔의 깊이는 오히려 더해지고 있습니다. 그 짙은 그늘 아래 사람들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는 수많은 비극이 여전히 살아 숨쉬는 까닭이겠죠. 그 중 하나가 바로 '국민보도연맹' 사건입니다. 6·25전쟁 발발 당시 이승만 정권 주도로 셀 수 없이 많은 민간인이 학살 당했던 참극이죠. 25일, 6·25전쟁 66주기를 맞아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할 뼈아픈 역사에 관한 증언을 전합니다. [편집자 주]
미국에서 공개된 6·25전쟁 당시 군경의 민간인 학살 현장(사진=온라인 커뮤니티 갈무리)
#1. "보도연맹 및 불순분자를 일제히 구속하라"는 내무부 치안국장의 지시에 따라, 1950년 6월 30일과 7월 8일 이틀간 충북 청원군 오창면과 진천군 진천면의 보도연맹원 400여 명이 오창양곡창고와 오창지서, 진천경찰서 사석출장소 등지에 강제 구금됐다.
당시 오창지서와 오창양곡창고 구금자 가운데 주동자로 분류된 주민 등 최소 6명 이상은 7월 10일 오창지서 창고·오창양곡창고에서 수도사단 헌병대와 진천지역에 투입된 국군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헌병과 경찰은 창고 안 구금자들도 전원 사살하려 했으나, 마을 유지들의 만류로 창고를 잠근 채 후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오창양곡창고에 구금된 최소 304명 이상의 보도연맹원들은 이튿날인 7월 11일 새벽 창고 앞을 지나가던 제6사단 헌병대와 후퇴하던 군인에 의해 사살 당했다. 군인들은 창고 자물쇠를 부순 뒤 구금자들의 신분이 보도연맹원임이 밝혀지자, 기관총과 M1소총 등으로 총격을 가하고 수류탄을 투척했다. 몇 시간이 지난 오전 8시 30분쯤에는 미군 전투기에 의해 창고 인근이 폭격을 당해 살아남은 사람들마저 희생됐다.
#2. 1947년 8월부터 1950년 9월까지 경남 통영·거제 일대 민간인들은 부역혐의, 국민보도연맹원 또는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경찰과 국군에 의해 집단희생됐다. 통영과 거제 지역에서만 각각 800~900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전해진다.
통영 지역에서는 한국전쟁기인 1950년 7월 중순부터 최소 110여 명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통영경찰서 유치장과 통영극장, 봉래극장에 연행됐고, 그해 7월 26일쯤 광도면 안정리 무지기고개에서 총살당했다. 거제 지역에서도 1950년 7월 15일쯤부터 24일까지 최소 260여 명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거제경찰서로 연행됐다가 일부는 석방되고 나머지는 그해 7월 26일부터 지심도 앞바다에서 수장 당했다.
희생자 가운데 일부 주민들은 보도연맹 가입 여부가 확인되지 않거나, 가입자라 해도 조직의 성격을 알지 못한 채 강제로 가입한 사람, 또는 분위기에 휩쓸려 이전에 좌익관련 단체에 가담했던 농민들이 대다수였다.
#3. 경북 영천 지역에서는 1950년 7월부터 9월까지 보도연맹원들과 전선 접경 지역 주민들이 인민군에 동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영천경찰서 경찰과 영천 지역 주둔 군대에 의해 집단 희생됐다. 이 지역은 6·25전쟁 당시 대구와 부산을 잇는 요충지로 국군과 인민군간의 전투가 격렬하게 벌어진 지역이라는 점에서, 다른 지역과 달리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보도연맹원에 대한 연행과 구금, 학살이 이뤄졌다.
낙동강 전선이 형성되던 1950년 8월 초에는 영천경찰서에 구금됐던 보도연맹원들과 경찰에 의해 소개된 전선 접경지역 주민 380여 명이 집단 학살됐다. 그해 9월 초순에는 영천경찰서에 장기 구금돼 있던 보도연맹원과 일부 피난민 등 17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경찰과 국군은 희생자들을 절벽 위로 끌고 간 뒤 총을 쏴 밑으로 떨어뜨리는가 하면, 손이 묶인 상태로 골짜기를 기어 올라가게 한 다음 등 뒤에서 총을 쏴 사살했다. 어린이와 임산부를 포함한 가족을 나무에 묶어 칼로 난자한 뒤 총살하기도 했다. 가족·친족 또는 마을 단위로 살해된 경우도 있었다. 한 유족은 "단지 탈영병과 같은 성이라는 이유로 형과 마을 형님들이 잡혀갔고, 고문을 받다가 나무에 묶여 칼로 난자당한 채 총살됐다"고 진술했다.
◇ 1980년대까지 연좌제 적용…정부, 유족들 취업에도 불이익 줘
6·25전쟁 당시 보도연맹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레드툼' 스틸컷(사진=구자환 감독 제공)
위의 사례는 지난 2005∼2010년 활동했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과거사위)에서 밝혀낸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의 일부다.
1950년 발발한 6·25전쟁을 전후로 최소 수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정부에 의해 집단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사위 활동 당시 신청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 7539건 가운데 보도연맹 사건은 2576건(34.2%)을 차지할 만큼 비중이 높다.
전시라는, 국민의 기본권이 제한되는 시기라 하더라도 군대와 경찰이 정당한 재판 절차 없이 민간인을 살해하는 행위는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국민생명에 대한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불법적 학살 행위라는 말이다.
과거사위 조사에 따르면,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5일부터 9월 중순까지 보도연맹원 등 주요시찰인물들은 육군본부 정보국(CIC)과 경찰, 헌병, 해군정보참모실, 공군정보처 소속 군인, 우익청년단원에 의해 소집·연행·구금된 뒤 집단학살 당했다. 이들 조직 가운데 경찰과 CIC가 실질적으로 모든 과정을 주도했으며, 검찰은 보도연맹 결성 등에 개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보도연맹 결성을 주도했던 당시 검찰·경찰 주요 간부들은 보도연맹원 규모가 약 30만 명에 달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청도·울산·김해 등 일부 지역의 경우 보도연맹원 중 30~70%가 학살된 것으로 나타났다. 각 군 단위에서 적게는 100여 명에서 많게는 1000여 명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과거사위 조사에서 확인된 희생자만 4934명이다.
보도연맹원 등에 대한 경찰의 연행·구금 조치는 전쟁 당일인 1950년 6월 25일부터 한강 이남에서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각 지역에서 소집·연행된 보도연맹원들은 각 경찰서 유치장이나 창고, 공회당, 연무장, 인근 지역 형무소 등에 짧게는 2, 3일에서 길게는 3개월 이상 갇혀 있었다. 구금된 보도연맹원 가운데 주요 간부로 분류된 이들은 대부분 7월 초에, 나머지 예비검속자들은 인민군이 점령하기 직전 군·경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희생됐다.
보도연맹 사건의 생존자들은 총상을 입고 노동 능력을 잃은 채 사고 당시의 충격으로 정신질환을 앓는 경우가 많았다. 과중한 치료비로 인해 생활고에 시달리기도 했다. 유가족 역시 갖은 고초를 겪었다. 이승만 정부 이후 1980년대까지 역대 정부는 보도연맹원으로 사망한 사람의 가족과 친척들까지 요시찰 대상으로 분류해 감시했으며, 연좌제를 적용해 취업 등에까지 불이익을 줬다.
당시 조사를 마친 과거사위 측은 "국민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에 대한 예비검속과 사살명령이 구체적으로 언제, 어떤 단위에서 결정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당시 군경 수사정보기관을 비롯해 여러 국가기관이 일사불란하게 동원됐다는 점에서 정부 최고위층의 결정과 명령에 의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