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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광로에 청년이 사라졌다, 그 쇳물은 쓰지마라"



책/학술

    "용광로에 청년이 사라졌다, 그 쇳물은 쓰지마라"

    댓글 시인 제퍼로의 신간 '그 쇳물 쓰지 마라'

     

    광염(狂焰)에 청년이 사그라졌다. / 그 쇳물은 쓰지 마라. // 자동차를 만들지 말 것이며 / 가로등도 만들지 말 것이며 / 철근도 만들지 말 것이며 / 바늘도 만들지 마라. // 한이고 눈물인데 어떻게 쓰나. // 그 쇳물 쓰지 말고 / 맘씨 좋은 조각가 불러 / 살았을 적 얼굴 흙으로 빚고 / 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 / 정성으로 다듬어 / 정문 앞에 세워주게. // 가끔 엄마 찾아와 / 내 새끼 얼굴 한번 만져보자, 하게.
    -〈그 쇳물 쓰지 마라〉 전문

    댓글시인 제페토를 아시나요? 2010년 한 철강업체에서 일하던 20대 청년이 용광로에 빠져 흔적도 없이 사망한 기사에 제페토는〈그 쇳물 쓰지 마라〉는 추모시를 남겼다. 그 시는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고 청년의 추모동상을 세우자는 움직임과 함께 이런 억울한 희생이 반복되지 않도록 사회적 각성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댓글 하나의 영향이었다. 글의 힘이었다.

    댓글시인 제페토는 이후 꾸준히 시 형식의 댓글을 남겼다. 누리꾼들은 그의 시를 캡처해 공유했고 일부러 그의 댓글을 찾아 들어가 읽었다. 그게 벌써 7년, 댓글시는 120여 편이 넘었다. 욕설과 비방이 난무하는 댓글 세상에서 그는 꿋꿋하게 자신의 사유를 아름답고 고통스럽게 풀어냈다. 그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작은 것들의 아픔과 고독, 소외받은 이들의 상처와 죽음에 집중했다. 댓글로 시작한 그의 글은 한 권의 책, 전례 없는 댓글시 모음집'그 쇳물 쓰지 마라'가 되었다.

    지난 글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는 그동안 우리 사는 세상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는가를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건물 외벽을 청소하던 중년 가장이 추락사하였는가 하면, 무명 시나리오 작가의 안타까운 죽음이 있었으며, 이제는 진부하기까지 한 유전무죄 무전유죄 판결과, 아이에게 먹일 체리를 훔쳤다가 체포된 가난한 엄마와, 구제역 파동 속에 무참히 생매장당한 가축들의 비명과, 임금을 체불당한 일용직 노동자의 무력한 고공 시위와, 그처럼 홀대받는 노동자를 위해 평생을 바치고 하늘로 돌아간 열사의 모친과, 배웅 없이 떠난 고독사와, 배가 가라앉은 지 2년이 지나도록 진실을 알 수 없는 300여 명의 죽음과…. 아, 그해 봄에 우리는 너무 많은 사랑을 잃었다.
    어디 그뿐인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신산한 삶과, 모래늪 같은 저임금의 수렁과, 저녁을 용납지 않는 노동시간과, 그 틈바구니에 버려지고 잊힌 아이들의 탈선과,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해 끝내 대물림되고 만 가난과, 그 와중에도 부를 독점한 이들의 끝 모를 횡포와, 아마도 우리를 미치게 할 요량으로 화려한 대저택을 앞다투어 자랑하는 스타들과, 심각하게 다루어져야 할 이슈가 얄팍한 이슈에 잡아먹히는 아이러니 속에서 매일 아침 인터넷 브라우저를 실행하는 일은 마치 판도라 상자를 여는 일 같았고, 눈앞에 펼쳐진 세계는 흡사 아수라장의 중심부처럼 느껴졌다.
    _서문 중에서

    이 책은 2010년부터 2015년까지 쓰인 그의 댓글시와 개인 블로그에 올린 시들로 엮었다. 그는 평범한 누리꾼으로서 지금까지 그래왔듯 꾸준히 댓글시를 쓰고자 한다.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지만 자신의 이름이나 직업 등을 밝히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도 그는 인터넷 뉴스기사에 댓글을 달고 있으며 블로그에서도 활동 중이다. 최근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건에 대해 그는 블로그에 ‘부디 살아갈 날들이 부끄럽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됩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올 때까지 조금 더 안달하고 조금 더 악을 쓰면서요’라고 심경을 남겼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며 세상의 쏟아지는 비극에 더 감정의 날을 세우는 제페토의 시는 무의미하게 앞만 보고 달려온 현대인들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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