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한국당 정우택 원내대표가 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당 의원총회에 굳은 표정으로 참석하고 있다. (사진=윤창원 기자)
자유한국당이 예산안 잠정 합의안을 놓고 '혼란의 늪'에 빠진 모양새다. 공무원 증원과 법인세 인상에 한국당의 유보입장을 단 애매한 3당 원내대표 합의문이 도출되자 소속 의원들이 강하게 반대하면서 스텝이 꼬였다. 일단 합의는 했지만 반대 입장을 표명해야 하는, 그렇다고 예산안 처리를 사실상 막을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에 놓인 셈이다.
자유한국당은 잠정합의안 도출 하루 뒤인 5일 오전부터 점심시간까지 쪼개가며 의원총회를 열었다. 의원들은 정우택 원내대표가 들고 온 잠정합의안을 두고 '추인 불가' 입장을 밝혔다. 공무원 증원·법인세 인상 반대 등을 줄곧 주장해왔는데, 이번 합의안은 당의 입장과 전면 배치된다는 논리로 반대 당론이 모아진 것이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협상 주체인 정 원내대표 책임론도 거론됐다. 이에 대해 정 원내대표는 "물러나라면 물러나겠다. 하지만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직을 내려놓는 것은 쇼로 비춰질 것"이라며 불쾌함을 표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 원내대표의 임기는 오는 15일로, 불과 열흘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다.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경선에 출마한 유기준 의원(좌측)과 이주영 의원이 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당 의원총회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진=윤창원 기자)
합의안을 무효로 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한 의원은 "'잠정' 합의안이기 때문에 뒤집는 데에는 문제가 될 게 없다"고 했다. 본회의 보이콧에 이은 장외투쟁 방안도 거론됐지만, 한국당의 딜레마는 반대해도 사실상 예산안 처리를 막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두 당 만의 합의로 수정된 예산안일지라도 국회법에 따라 의원 50인의 동의만 얻으면 본회의에 상정할 수 있다. 상정 뒤에도 양당의 의석수 총합인 161석이 과반에 충족하기 때문에 한국당으로선 막을 방법이 없는 셈이다.
정 원내대표도 이날 기자들과 만나 "어떤 방법을 택하든 소위 수정안이 통과되면 우리는 제1야당의 한계를 다시 느끼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설사 강경투쟁을 택한다고 해도 '합의한 예산안에 반대한다' 식의 여론 역풍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는 대목이다. 한 의원은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본회의 보이콧 방안에 대해 "지금은 민주당이 1조 원이 넘는 돈으로 호남선 KTX 사업을 추진하기로 해 국민의당의 표를 산 격이다. 국민의당과 정의당이 표결에 들어가고, 바른정당도 들어가면 한국당이 왕따가 되는 셈"이라며 "보이콧은 국민 동의를 얻기 힘들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그만큼 당이 궁색하고 옹색한 상황에 처해있는 것이다. 그걸 도무지 인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렇게 인정해 줘야 하느냐는 울분이 표출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한 상황에서 합리적 전략을 찾기란 어렵다는 것이다.
실제 의총에서는 본회의에서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로 예산안 표결을 지연시켜야 한다는 의견도 제안됐다가 금세 철회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국회법 106조의2 10항에 예산안 관련 필리버스터는 지난 1일 자정까지로 규정돼 있음을 확인하고 서로 황당해했다는 후문이다.
'합법적 의사방해'가 어려워지자 물리력을 동원해 막아야 한다는 강경론도 등장했다. 의장석을 점거해서라도 예산안 처리를 막아야 한다는 얘기다. '불법 의사방해론'에 한 의원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면서도 "현실적으로 우리 상황이 얼마나 어려워졌는지를 파악하지 못한 주장"이라고 밝혔다.
한편 한국당은 본회의 전 다시한 번 의원총회를 열어 반대 의견 표출 방안을 결정하기로 했다. 현재로선 본회의장에 들어가 반대토론을 한 뒤 반대표를 던지고 나오는 것이 현실적 안으로 거론된다.
한편 한국당은 민주당·국민의당이 선거구제 개편 등에 따로 합의했다는 논란을 토대로 이번 예산안은 야합에 의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한국당 장제원 수석대변인은 논평에서 "민주당과 국민의당 간에 내년도 예산안을 둘러싸고 추악한 뒷거래가 있었다는 사실이 민주당 박홍근 수석부대표의 '카톡' 사진에 의해 사실로 드러났다"며 "국회의 막중한 책무인 예산안 심의와는 아무 상관 없는 선거구제 개편과 같은 정당 간의 이해득실을 서로 주고 받는 밀실 야합을 했다"고 비판했다.{RELNEWS:right}
그러면서 "한국당은 국민과 함께 당리당략에 빠져 밀실야합을 통한 추악한 뒷거래 예산안 저지를 위해 당력을 총 결집해 투쟁하고, 응징하고 막아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