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노인이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의 길목에 쪼그린 채 앉아 있다.(사진=박하얀 기자)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 허름한 집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 85개 동에 737개 쪽방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546명이 거주하는데 대부분(60%)이 기초생활수급자다. 나머지는 일용직이거나 공공근로, 자활근로 등을 한다.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쪽방촌에 입성한 사람들이다.
◇가족과 연락 끊긴 지 오래…TV가 유일한 벗
좁다란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한 층에 작은 방 대여섯 개가 보인다. 한 방은 보통 1평 남짓. 조 할머니(77)와 김 할아버지(74)는 2층 6번 방에 산다. 쪽방촌에 거주한 지 근 4년. 노부부는 1평이 채 안 되는 방에 몸을 구겨 넣는다. 20여 년 전 재산이 압류돼 자식들이 미국으로 떠나면서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는 게 노부부의 전언이다.
"아들이 보고 싶으면 상담소 선생님 얼굴을 한 번 봐. 눈썹이며, 목소리며 둘째 아들을 닮아서. 그러면 마음이 좀 풀려"
조씨의 깊게 진 주름위로 자식에 대한 그리움이 서려 있다. 추석을 어떻게 지내냐는 기자의 물음에 조 할머니는 "TV 보는 거지, 뭐"라며 "아무와도 연락 안 해. 어디 가는 사람들이 부럽긴 하지…"라고 말끝을 흐렸다. 자식들의 전화번호를 적어둔 수첩을 김 할아버지가 잃어버려 가족과 수십 년 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다고 할머니는 토로했다.
돈의동 쪽방 상담소 봉사자들의 도움으로 부부는 올 초 말소된 주민등록을 되살려 매달 노령연금을 받게 됐다. 조 할머니는 "처음에 돈을 받았을 때 퍽 주저앉았다"며 "약값 아까워서 파스 하나도 못 산다"고 말했다. 복지관에서 주는 무료 진통제로 통증을 근근이 견딜 뿐이다. 4년째 이곳에 사는 부부는 "내가 이런 데서 살아야 하나 싶을 때도 있다"며 "음식을 하기도 힘들고, 속상한 일도 많지만 참고 넘어간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김 할아버지는 말을 하다 몇 번이고 눈물을 훔쳤다.
김모 할아버지가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 자신의 방 안에 앉아 있다(왼쪽) 이모 할아버지가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사진=박하얀 기자)
◇명절이면 더 짙어지는 쓸쓸함…"아파도 부를 사람 없어"조 할머니 부부 같은 2인 가구는 돈의동 쪽방촌에서 네 집뿐이다. 대부분 혼자 거주한다. 이모(84)할아버지는 혼자 지낸 지 40년이 돼 간다. 한때 노숙 생활을 전전하다가 쪽방촌에 자리를 잡았다.
이씨는 "가족들은 없고 이 몸뚱이 혼자 남았다"며 "명절 때면 쓸쓸하고 서운하다"고 말했다. 부모, 형제들은 모두 세상을 떴다. 이씨는 명절마다 쪽방촌에서 치르는 공동 차례상 행사에 가서 차례를 지낸다. 명절만 되면 떠오르는 부모님 생각을 이웃들 틈에서 조금이라도 지워보기 위해서다.
노숙 생활을 하던 때와 비교하면 자기만의 공간이 생긴 셈이지만, 웅크리고 자야 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같다. 1평도 되지 않는 방에 물건들을 놓고 나니 몸을 누일 공간이 충분하지 않다. 당뇨병을 앓고 있는 이씨는 명절 때 위급상황이라도 발생하면 도움을 요청할 곳이 없다. 이씨는 "봐달라고 할 사람도 없고…바깥을 기어나가서 사람들한테 구급차 불러 달라고 해야지"라며 담담하게 말할 뿐이었다.
◇'그래도 달은 밝다'…고통도, 정도 함께 나누는 쪽방촌
쪽방촌 사람들도 명절을 맞아 한데 모였다. 서울시 지원을 받는 돈의동, 창신동 쪽방 상담소는 명절 때마다 공동 차례상 행사를 한다. 함께 차례를 지내고 음식을 나눠 먹는다. 행사에서 만난 김모(63)씨는 20년 넘게 쪽방촌에서 살고 있다. 김씨는 수년 전 사업에 실패한 후, 가족과 떨어져 살고 있다. 김씨는 "명절이 다가오면 쓸쓸하고 외롭다"며 "그래도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들끼리 어울려 살다 보니 공감하고 서로 이해하려고 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지난 설에도 김씨는 쪽방촌 사람들과 차례를 지낸 뒤 홀로 등산길에 올랐다.
얼마 전 강타한 태풍은 쪽방촌 사람들을 떨게 했다. 김씨는 "태풍 통과하는 날 많이 무서웠다"며 "슬레이트 지붕 파편이 튀어서 지나가던 사람이 얼굴을 좀 다쳤다"고 말했다.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다. 이번 명절에도 김씨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산에 갈 계획이다.
돈의동 쪽방 상담소 최선관 실장은 "쪽방촌 월세가 25만원~30만원대로 사람들 생각보다 높은 편"이라며 "그래서 대부분 집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무료 행사를 찾아다니며 시간을 때운다"고 설명했다.
제일 먼저 만난 조 할머니는 "또 오면 좋겠다"며 기자의 손을 꼭 잡았다. 때마침 상담소 봉사자가 포장해온 고깃국에 할머니는 "정말 감사하다"며 환한 웃음을 보였다. 이웃들의 온정이 스며들며 쪽방촌에 오랜만에 온기가 흘렀다. {RELNEWS: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