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예산안등조정소위원회의 (사진=윤창원 기자/자료사진)
내년도 예산안 협상이 잇따라 파행을 겪으며 끝내 강행 처리에 이르는 상황에서도 여야 국회의원들은 '쪽지 예산' 관철에 성공한 모습이다.
각 지역구에 유리한 민원성 예산을 은밀하게 통과시키는 것만큼은 여야가 합심을 이룬 셈이다. 나라 가계부에 '사심'(私心)을 담는 고질적인 관행을 뿌리뽑기 위한 보완책이 나와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 예산안 강행 진통 속에도 관철된 여야 '쪽지 예산''4+1'(더불어민주당·바른미래당·정의당·민주평화당+대안신당) 협의체에서 마련한 513조5000억원 규모의 내년도 예산안이 지난 10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패싱' 당한 자유한국당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민주당 등 범여권은 한국당이 협상에 진정성이 없었다며 '추태'라고 비판했고, 한국당은 '날치기'라고 공세 수위를 높이며 정국은 또다시 격랑 속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이면에는 기쁜 속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도 있다. 여야 할 것 없이 지역구에 유리한 '쪽지 예산'을 밀어넣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쪽지 예산은 국회가 정부 예산안을 심사하는 과정에서 국회의원들이 지역구 민원성 예산을 예산결산특별위원들에게 쪽지나 문자 등으로 전달하는 것을 말한다.
여야 핵심 인사들을 살펴보면 더불어민주당의 경우 이해찬 대표가 지역구인 세종시에 교통안전환경개선 예산 5억1000만원을 증액했다. 윤호중 사무총장(경기 구리시)은 안성구리고속도로 460억원, 아천빗물펌프장 4억원 등을 늘렸다.
한국당은 예결위원장인 김재원 의원(경북 상주시군위군의성군청송군)이 구미군위IC국도건설 20억원, 군위의성국도건설 10억원, 위험도로개선 4억원 등을 확보했다. 예결위 간사인 한국당 이종배 의원은 국립충주박물관 건립 등 7억1000만원을 증액했다. 장석춘 의원(경북 구미시을)은 예산안이 통과 즉시 구미 로봇인력양성기관 295억원 예산 유치 보도자료를 내 눈총을 받았다.
바른미래당 김관영 의원은 새만금간척사박물관 건립 105억원, 군산대 노후화장실 개보수 9억원 등을 확보했다. 대안신당 박지원 의원은 호남고속철도 건설 등 목포 관련 국비 예산 1047억원을 증액했다고 자체 홍보했다. 유성엽 창당준비위원장은 고창 하수처리시설 증설 등 12억8000만원을 확보했다.
이밖에 민주평화당 조배숙 원내대표는 익산 세계유산 탐방 거점센터 등 56억7000만원을, 정의당 심상정 대표는 고양시 하수관로 정비에 5억원을 증액했다.
고루고루 밀어넣은 지역 민원성 예산으로 내년 SOC(사회간접자본) 예산은 기존 정부안 보다 9000억원 늘어난 23조2000억원을 기록했다.
정치권 한 관계자는 "국회의원은 참 아이러니한 부분이 있다"며 "지역을 기반으로 정치를 하다 보니 중앙에선 예산 낭비에 반대하면서도, 지역을 향해선 예산을 관철시켜야 한다. 양심은 찔리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 美 '방지책' 만들어…韓 쪽지 예산 방지법 표류이같은 '쪽지예산', '짬짬이 예산' 등의 관행을 고쳐야 한다는 지적은 계속해서 있어왔다.
앞서 국회 혁신자문위는 지난 5월 예결위 소(小)소위를 금지해 쪽지예산을 원천 차단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국회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예결위 여야 간사로만 구성되는 소소위 심사는 속기록 없는 '밀실' 심사의 온상이자 쪽지예산을 청탁하는 주요 통로로 악용돼온 측면이 있다. 하지만 개정안은 국회에서 표류하는 상태다.
해외 사례를 주목해야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은 의회 예산심사과정에서 의원들이 지역구 민원·선심성 예산을 예결위에 부탁하는 미국판 쪽지예산을 막기 위한 입법적 보완책을 만들었다.
미국 하원은 개별 프로젝트나 기구에 예산을 직접 배정하는 게 원칙적으로 금지돼 있다. 도로·다리, 박물관 건립 등 대표적인 쪽지예산이 거의 불가능한 셈이다.
이같은 제도는 알래스카 상·하원의원들이 50여명의 주민이 사는 작은 섬에 3000여억원 상당의 다리를 놓기 위한 예산을 배정하면서 논란이 커지자 나온 보완책이다.
특위로 운영되는 예산결산위원회를 상설화하고 결산위와 예산위를 분리하는 것도 오랫동안 거론되어 온 개선책이다.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김성수 교수는 "외부위원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별도로 구성해 예산 수정 과정에서 갑자기 늘어난 예산에 대해선 일정 기간 심의를 받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예산 심의는 국회의 고유 권한이지만, 사익과 공익 구분이 애매한 경우 외부위원이 심의하면 쪽지예산을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취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