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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개 정류장 지나는 83분, 청각장애인은 쉴 수 없는 이유



인권/복지

    36개 정류장 지나는 83분, 청각장애인은 쉴 수 없는 이유

    [4.20 장애인의 날]열차역·버스정류장 극심한 소음에 보청기도 안 통해
    전광판 등 시각 정보만 의존하면 내릴 역도 놓치기 일쑤
    시끄러운 곳에서도 안내방송 들려주는 보청기기 보조장치 '히어링 루프'
    미국은 일정 규모 시설에는 의무화…우리나라는 이제 시범 도입 수준

    지하철 1번칸 출입문 앞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난청인 김재호씨. 안내방송이 무용지물인 김씨로서는 열차가 들어오는 모습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1번칸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다. 나채영 기자지하철 1번칸 출입문 앞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난청인 김재호씨. 안내방송이 무용지물인 김씨로서는 열차가 들어오는 모습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1번칸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다. 나채영 기자'지잉'

    김재호(66)씨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한다. 도착 직전 내릴 역에 가까이 왔다고 알리는 진동음이다. "언제 내려야 하는지 몰라서, 앱을 새로 깔았어요. 지하철 안은 너무 시끄러우니까 저에게 방송안내 소리는 참고조차 할 수 없는 소음일 뿐이에요" 김씨는 '지하철 알림' 애플리케이션을 열며 설명했다.

    지난 16일 오전 9시 40분. 한국청각장애인협회장과 대한난청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씨는 기자와 함께 경기 부천 송내역에서 서울 도봉역까지 함께 이동했다. 석계역에서 만난 김씨의 지인이자 '농인'인 이원영씨도 동행했다.

    열차 출발 10분 전. 김씨는 승강장 제일 앞에 있는 1번칸 출입구로 가서 선로를 향해 목을 빼고 바라본다. 선로를 따라 들어오는 열차를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이 자리에 김씨는 단골 손님이나 다름없다. 승강장 곳곳에 지하철 정차 정보를 알리는 전광판이 있지만, 김씨가 있는 자리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작은 글씨까지 읽기는 쉽지 않다.

    열차에 올라탄 김씨는 곧장 안내 전광판이 잘 보이는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부터 김씨는 36개 역을 지나는 83분 동안 잠시라도 눈을 붙여 쉴 수도, 휴대전화로 인터넷을 볼 수도 없다.

    "지금 열차 안이 웅웅거리는 소리로 가득해요. 앱으로 알림을 예약해두기는 했는데, 혹시 지금 무슨 역인가요?" 역에서 사람들이 타고 내리며 전광판이 가려질 때마다 기자는 김씨에게 입을 크게 벌려 정차역을 알려줘야 했다. 주변에 앉은 시민들은 휴대전화로 영상 등을 보거나 쪽잠을 청하는 동안, 김씨만은 긴장된 표정으로 83분간 휴대전화와 전광판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경기 부천 송내역에서 서울 도봉역으로 지하철을 타고 가는 김재호씨. 난청인인 김씨가 36개 역을 지나는 83분 동안, 내릴 역을 놓칠세라 그의 눈은 잠시도 쉴 수 없다. 나채영 기자경기 부천 송내역에서 서울 도봉역으로 지하철을 타고 가는 김재호씨. 난청인인 김씨가 36개 역을 지나는 83분 동안, 내릴 역을 놓칠세라 그의 눈은 잠시도 쉴 수 없다. 나채영 기자김씨는 수화언어와 음성언어를 함께 사용하는 '난청인'이다. 만 9살에 청력을 잃었지만 2001년 인공와우 수술로 오른쪽 귀의 청력을 회복했다. 보건복지부는 김씨처럼 청력을 완전히 상실하지는 않았지만, 보청기 없이는 의사소통하기 힘든 경증 청각장애인을 난청인으로 분류한다.

    복지부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청각장애인 수는 꾸준히 증가했다. 2019년 37만여 명이었던 청각장애인 수는 지난해 43만여 명으로 증가했다. 난청 진료인원 역시 2018년 58만여 명에서 2022년 73만여 명으로 24% 늘었다. 복지부의 '2023년도 등록장애인 현황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새로 등록한 장애인 8만여 명 중 청각장애 비중은 31.2%로 가장 크다.

    청각장애인은 대부분 보청기기와 인공와우를 사용한다. 2020년 복지부가 실시한 장애인실태조사에 따르면 전체 청각장애인의 74%가 보청기기를 사용하고 있다. 문제는 보청기기를 사용하는 이들은 시끄러운 공공장소에서 소음까지 과도하게 증폭되기 때문에 음성정보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청각장애인 단체들은 20대 국회부터 주변 소음에 구애받지 않고 안내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돕는 보청기기 보조장치 '히어링 루프'를 설치해달라고 요구해왔다. 복지부는 21대 국회 들어 히어링 루프를 설치하기 위해 연구를 진행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현재까지 도입 검토는커녕 관련 연구를 시작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서울시 성동구와 경기 과천시의 일부 버스정류장에 히어링 루프가 설치되어 있지만, 버스정류장보다 소음이 더 큰 지하철역에는 히어링 루프가 설치된 곳이 없다. 다만 서울시가 오는 5월부터 지하철 4호선의 신규 전동차에 히어링 루프를 시범 도입할 예정이다.

    미국의 경우 일정 크기 이상의 시설 등에는 히어링 루프와 같은 청각 보조장치를 설치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국내에도 점자 표기, 경사로 설치 등 장애인 편의시설을 반드시 설치하도록 법에 명시돼 있지만, 보청기기를 위한 보조장치는 아직 장애인 편의시설에 포함되지 않는다.

    서울 성동구 버스정류장에 설치된 보청기기 보조장치 '히어링 루프'. 붉은 상자 안의 장치가 히어링 루프다. 나채영 기자서울 성동구 버스정류장에 설치된 보청기기 보조장치 '히어링 루프'. 붉은 상자 안의 장치가 히어링 루프다. 나채영 기자"히어링 루프요? 저희 농인 사회가 매우 좁아서 그걸 알았다면 활성화됐을거예요. 그런데 저보다도 기자님이 더 잘 알고 계시네요?"

    청각장애 유튜버 하개월(본명:김하정)은 5살때부터 귀가 잘 들리지 않기 시작해 7살 무렵부터 보청기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보청기를 착용한 지 몇십 년이 지났고 서울에 거주하고 있지만, 히어링 루프가 성동구에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은 기자에게 처음 들었다고 한다.
     
    하개월은 "열차 전광판에 현재 내릴 곳과 다음 정거장 안내가 잘못 뜰 경우도 많다"며 "홍보가 미비한 것인지는 몰라도 설치된 히어링 루프를 이용하는 청각장애인들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지난 16일 오후 김재호씨와 함께 찾은 성동구 버스정류장. 보청기에서 방송 안내 소리만 키우는 'T모드'로 전환한 뒤 버스 도착 알림을 기다렸지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히어링 루프에 있는 '도움이 필요하세요?' 벨을 누르고, 민원센터에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말한 뒤에야 음량이 커졌다. 이마저도 버스 정차 안내 방송은 한 차례만 재생됐다.

    "히어링 루프를 이용해보면 관리 상태가 엉망인 경우가 많다"는 김씨는 이번에는 알림 음량을 너무 키웠다며 "귀가 아파 T모드를 해제했다"고 말했다.

    서울 성동구 버스정류장에 설치된 히어링루프를 이용하는 난청인 김재호씨. 하지만 안내 방송의 음량이 너무 작거나 커서 결국 김씨는 이날 히어링 루프의 도움을 받기를 포기했다. 나채영 기자서울 성동구 버스정류장에 설치된 히어링 루프를 이용하는 난청인 김재호씨. 하지만 안내 방송의 음량이 너무 작거나 커서 결국 김씨는 이날 히어링 루프의 도움을 받기를 포기했다. 나채영 기자대구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조한진 교수는 "청각장애인은 지체장애처럼 시설 자체에 대한 물리적 접근이 어렵다기보다는 정보에 대한 접근에 어려움이 있다"며 "(시각 등) 한 가지 감각에만 의존해 정보를 얻기는 너무 어려우니 대중교통시설에 보조장치가 설치되는 것도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물론 민간 시설에도 설치가 되면 좋겠지만, 최소한 공공시설이나 대중교통시설에는 보청기기 보조장치를 설치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 아니냐"고 지적했다.

    서울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이봉주 교수는 "장애 등급을 받은 분이 아니라도, 노인이나 일시적인 청각 신경 이상을 앓아 보청기가 필요하신 분들이 상당히 많다"며 "이런 분들도 공공시설에서 제공하는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도록 지원 범위를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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