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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학술

    삼국유사, 일제시대에 조명받은 까닭은?

    신간 '삼국유사:우리 역사로 되살아난 신화와 전설'

     

    《삼국유사》가 재조명된 시기는 20세기 초였다. 1927년, 최남선은 일본 유학 때 처음 접한 《삼국유사》 임신본을 <계명>이라는 잡지에 소개하였는데, 사람들의 반응이 아주 좋았다. 오랫동안 외면 받던 《삼국유사》의 진가가 마침내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몽골의 침략과 간섭을 받던 13세기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던 20세기 초는 여러 모로 시대적 분위기가 비슷하였다. 일본의 침입에 저항하면서 민족의 자주의식이 높아져 갔고, 이렇게 고조된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국어학·민속학·국사학 등을 연구하는 민족주의자들의 정서는 고려 후기에 《삼국유사》를 편찬하던 일연과 어쩌면 일맥상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어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더불어 우리 민족의 고대사를 밝히는 중요한 역사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신간 '삼국유사:우리 역사로 되살아난 신화와 전설'은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춰 원문을 새로 번역하고 쉬운 해설을 넣어 재정리한 '청소년 철학창고'의 서른다섯 번째 고전이다.

    삼국유사는 고려 후기에 살았던 승려 일연이 고조선 이후부터 통일 신라 시대까지의 일들을 기록해 놓은 역사서다.

    이 책은 현재 남아 있는 역사서들 중 단군 신화가 수록된 최초의 책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며, 신라인의 노래라 할 수 있는 14수의 향가와 자칫 묻힐 뻔했던 가야 역사를 되살려 놓은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또한 삼국 특히 신라 사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서, 《삼국사기》와 비교했을 때 더 빛이 난다. ‘유사(遺事, 남아 있는 일)’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삼국유사》에는 《삼국사기》가 황당무계하다고 여겨 기록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유학자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삼국사기》와 달리 《삼국유사》는 일연 개인의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사사로이 저술된 책이어서 표현이나 내용 면에서 한결 자유롭다. 그래서 일연은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수많은 신화, 전설, 민담 등을 우리 역사로 받아들여 소개하였다. 거기엔 우리나라의 건국 신화는 물론이고 민간에서 널리 전해지던 설화들, 특히 불교 신앙과 관련된 고승 이야기와 사찰·불상·석탑 등에 얽힌 신비롭고 신령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무신 정권과 원(몽골)의 침략이라는 내우외환의 혼란기를 겪었던 일연은 민족의 자주의식을 추구함과 동시에 불교의 가르침이 세상에 널리 펼쳐지기를 염원하였다. 그리고 그 바람을 담아 말년에 인각사에서 《삼국유사》를 썼다. 오늘날 우리는 일연이 왜 설화와 전설을 우리 역사로 받아들여 기록해 놓았는지, 또 그 안에 깃든 역사적 진실은 무엇인지 고민해 보아야 한다. 합리적, 과학적 연구를 통해 고대 사회의 모습을 뚜렷이 밝혀내는 일은 이제 우리 모두의 과제일 것이다.

    《삼국유사》 1부는 <기이(紀異)> 편의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삼국사기》와 《고기》, 《향전》 같은 옛 기록에 담긴 내용을 함께 비교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왕들의 신비롭고 특이한 일에 대해 기록해 놓은 〈기이〉 편은 고조선의 단군 신화부터 부여와 고구려의 건국 신화, 그리고 신라의 왕들과 그 주변 인물들의 신이한 이야기, 백제와 가야의 왕들에 대한 신화 등이 주로 쓰여 있다. 이를 바탕으로 1부에는 건국 영웅과 시조의 탄생 설화, 그리고 비처왕·지증왕·진평왕 같은 신라 왕들과 김제상·김유신·장보고 같은 인물들의 신통한 이야기들이 펼쳐져 있다.

    2부는 《삼국유사》의 후반부, 즉 <흥법(興法)> <탑상(塔像)> <의해(義解)> <신주(神呪)> <감통(感通)> <피은(避隱)> <효선(孝善)> 편을 다루고 있는데, 그 중심엔 불교가 있다. 일연은 《삼국사기》가 제대로 다루지 않은 불교 이야기를 《삼국유사》에 담아내려 하였다. 그래서 2부에는 사찰, 고승, 사상(신앙) 등 불교의 다양한 모습들이 폭넓게 나타나 있다. 특히 불상과 불탑, 승려들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2부의 마지막 장은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노비 욱면 등 평범한 사람들이 보여 주는 감동적인 이야기, 즉 보통 사람들의 효도나 덕행 같은 미담들로 꾸며져 있다.

    일연은 유학자가 아니라 승려였다. 그래서 그는 부처님의 기적처럼, 세상에는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신비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역사는 신비롭고 경이로운 일들로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을 ‘신이사관’이라고 하는데, 《삼국유사》는 바로 불교적 신이사관에 입각해 저술되었다.

    이런 관점이었으므로 일연은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오던 수많은 설화들을 누군가가 지어낸 허황된 이야기라 여기지 않고, 우리 민족의 정신과 혼이 깃든 귀중한 자료라 보았다. 단군 신화를 비롯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의 건국 신화와 불교 관련 설화들은 일연의 상상력과 재해석이 더해져 민족의 자주의식을 높이는 이야기로 다시 태어났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과 일연은 관점이 서로 달랐다. 그 이유는 두 사람이 살았던 시대와 관련 있다. 김부식이 활동하던 고려 중기는 유학이 활짝 피어난 시기로, 많은 유학자들은 중국(당과 송)을 큰 나라로 섬기며 유교 정치 이념을 확립하였다. 당시 중국은 정치·군사적인 측면뿐 아니라 학문·정신적인 측면에서도 동아시아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김부식 등 유학자들은 사대주의, 중화주의 정신에 동화되어 《삼국사기》를 편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일연이 살던 고려 후기에 이르러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유학자들이 섬기던 송나라는 몽골에 패하였고, 고려 역시 몽골의 침략과 억압을 받으며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의 지식인들은 민족의식을 각성하게 되었고, 민족자존을 지키며 민족의 긍지를 드높이는 일이 당시의 시대정신으로 떠올랐다. 《삼국유사》는 바로 그러한 시대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삼국유사》는 편찬된 당시에는 큰 주목을 끌지 못하였다. 조선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성리학자들은 ‘허황된 책’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유학자들의 관점에서 《삼국유사》 속 많은 이야기들은 너무도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세종실록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 같은 인문지리서는 《삼국유사》의 내용을 많이 인용하였다. 지명이나 유적, 전설 등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삼국유사》만 한 자료가 없었다. 정약용도 고대 우리나라 지리와 관련해서는 《삼국유사》를 보아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한 정약용조차도 《삼국유사》의 전반적 내용에 대해서는 “황당하고 경전에 맞지 않아 믿을 바가 못 된다.”라고 혹평하였으며, 대다수 실학자들도 같은 의견이었다.

    고려 후기에 살았던 일연은 100여 권의 책을 저술한 학자이자 시인이었으며, 만년에는 불교계의 최고 명예직인 ‘국사(國師)’의 자리에 오른 덕망 높은 승려였다. 아쉽게도 현재까지 전해지는 그의 책은 역사서인 《삼국유사》와 불교서인 《중편조동오위》밖에 없다.

    일연은 최씨 무신 정권이 고려를 다스리던 시절에 태어나 성장했다. 그리고 스물두 살 때 승려들이 보는 과거 시험인 승과에 장원으로 합격한 뒤로 근 20여 년간을 홀로 수행에 힘쓴 그는 마흔네 살 때 비로소 세상으로 나왔다. 그 당시 고려는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몽골에 맞서던 시기였다. 일연은 남해 정림사, 포산 인흥사, 청도 운문사 주지로 있으면서 왕실 또는 최씨 정권과 직간접으로 인연을 맺을 만큼 학식과 명망이 높았다. 하지만 정치권력과 엮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성격 탓에 정치사회적인 문제나 불교계의 폐단 앞에서 목소리를 크게 내지는 않았다.

    일흔여덟 살 때 그는 나라의 정신적 지도자인 국사로 추대 받았지만, 곧 노모를 모셔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고향으로 내려갔다. 노모가 세상을 떠난 뒤엔 군위 인각사에 머물면서 오랫동안 수집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삼국유사》를 편찬하였다. 여든네 살 때 세상을 떠나자 충렬왕은 그에게 ‘보각’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일연의 《삼국유사》는 신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목만 봤을 때는 당연히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이야기가 고루 들어 있을 것 같지만, 140여 개의 항목 중 대다수는 신라와 관련된 내용이고, 이야기의 중심 무대 또한 경주(서라벌)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일연이 경주와 가까운 경산 지방 출신인데다 그 인근 지역에서 오랫동안 승려 생활을 했기 때문인 것 같다.

    또한 일연은 《삼국유사》를 쓰면서 130여 종이 넘는 국내외 서적들을 인용하였는데, 그중에는 《고기》와 《향전》처럼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서적들도 상당수 있다. 아울러 《삼국유사》에는 일연이 쓴 47편의 시가 소개되어 있다. 그는 어떤 의미 있는 역사적 사실이나 감동적인 설화를 소개한 다음, 글 끝부분에 “찬양(찬미)한다.”라는 말과 함께 자신의 느낌을 시로 표현해 놓았다.

    《삼국유사》의 가치와 특징은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그중에서 특히 다음의 세 가지는 아주 중요하다.

    첫째, 단군 신화다. 《삼국유사》는 현존하는 역사서들 중 단군 신화가 수록된 최초의 책이며, 다른 책에 등장하는 단군 신화는 《삼국유사》의 내용을 인용했거나 변형한 것이다. 원의 침략과 지배를 받으며 살았던 일연은 책 첫머리에 단군 신화를 내세워 우리 역사의 유구함과 민족의 자긍심을 드높였다.

    둘째, 14수의 향가다. 신라인들은 한자를 이용해 ‘이두’ 또는 ‘향찰’이라는 독자적인 기록 방식을 만들었는데, 향가는 이 향찰로 쓴 신라인들의 노래를 말한다. 하지만 현재까지 남아 있는 향가는 모두 25수밖에 안 되고, 그중 《삼국유사》에 실린 게 14수나 된다. 오늘날 우리는 일연이 남겨 준 <헌화가>, <처용가>, <서동요> 같은 아름다운 향가들을 통해 신라인들의 정신세계뿐만 아니라 신라인들의 언어 체계, 즉 우리말의 원형을 더 깊이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셋째, 《가락국기》의 내용이다. 지금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가락국기》의 내용을 요약해 실은 일연 덕분에 우리는 500년 가야 역사를 부분적으로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연은 몇 개의 가야 관련 기록들도 함께 소개함으로써 자칫 잊힐 뻔했던 가야 이야기를 되살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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