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로몬은 쓸모있는 것만을 '즐겨찾기' 하는 사람들을 칭하는 '신조어' 입니다. 풍부한 맥락과 깊이있는 뉴스를 공유할게요. '쓸모 없는 뉴스'는 가라! [편집자 주]
스무고개 시작합니다. 지금부터 묘사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맞혀보세요. ①유신헌법의 초안을 만들고 간첩조작 사건을 주도했다 ②'우리가 남이가'라는 유행어의 장본인이다 ③'왕실장', '기춘대원군'으로 불린다 ④(대통령에게 한때) '사심 없는 분'으로 통했다 (이하 생략)
정답은 바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입니다. 올해 나이 77세. 서울대 법대에 재학 중이던 1960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이후 박정희·노태우 정권에서 관운이 트이더니 국회의원 내리 3선을 지내고 정권 2인자인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된 막후 실력자.
그가 최근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된 '피의자'가 됐습니다. 김 전 실장은 아마 격세지감을 느끼고 있을 겁니다.
■ '박정희 장학생'이 유신헌법 만들다5·16 장학회(현 정수장학회)의 1회 장학생 출신인 김 전 실장은 박정희 정권에서 요직을 맡았던 신직수 전 법무장관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했습니다. 1972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헌법을 제정할 때에는 실무를 맡아 초안을 만들었죠.
이듬해 김 전 실장은 그 공로를 인정 받아 법무부 과장(부장검사급)으로 특진했는데요, 이후 중앙정보부장으로 영전한 신직수 체제에서 보좌관으로 발탁되면서 중앙정보부에 첫발을 들여놓았습니다.
1974년은 개헌 논의만 나와도 붙잡혀갔던 서슬퍼런 시국이었습니다. 반유신체제운동을 벌이던 인사 180명이 내란죄로 사형·징역형 등을 선고 받은 '민청학련 사건'이 대표적이죠.
이처럼 군사독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는 체제 유지를 위해 2차 인민혁명당 사건과 장준하 선생 의문사 사건 등 수많은 사건들을 조작했습니다.
훗날 김 전 실장은 유신헌법 제정 당시 자신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검사들 이런 자료 좀 찾아오라, 검토해오라 하면 상관에게 보고하고 바치는 역할을 했어요. 좀 부끄럽지만 상사들이 어떻게 (나를) 예쁘게 봐서, 똑똑하다고 봤는지 이런저런 일들을, 심부름을 많이 시켰어요" (2005년 7월 12일 오마이뉴스 인터뷰)
다시 1974년으로 돌아가보죠. 육영수 여사 저격 용의자로 지목된 문세광씨가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김 전 실장이 '자칼의 날'이라는 소설을 읽어봤느냐고 물어보면서 그의 말문을 열었고, 문씨는 결국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고 합니다.
큰 영애였던 박근혜 대통령에게 '살인범'을 처벌하도록 해준 김 전 실장은 무척 고마운 존재였을 겁니다. 사건을 잘 마무리 지은 공로로 그는 35살의 나이에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 국장으로 영전했습니다.
■ 장관 눈에 띄려고 날마다 언덕 오르던 '정치 검찰'1979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 전 대통령을 암살한 이후 정권을 장악한 보안사는 중앙정보부 핵심 간부들을 상대로 혹독한 조사를 벌였습니다. 하지만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와중에도 김 전 실장은 꿋꿋이 살아남았죠.
청와대 비서관이었던 박철언을 통해 5공 실세 허화평에게 장문의 '충성맹세' 편지를 보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는데요, 당사자인 김 전 실장은 부인했어요. 그런데 '국민의 검사'로 불린 심재륜 전 고검장이 김 전 실장을 전형적인 정치 검찰의 사례로 꼽으면서 한 발언이 눈길을 끕니다.
"높이 평가할 만한 면이 있기는 하더라. 검사 때 법무부 장관 눈에 띄려고 날마다 장관 집 앞 언덕에 올랐던 노력, 남들 잠자는 시간에 일어나 하염없이 벌인 그 노력이 놀라웠다" (2016년 11월 8일 시사인 인터뷰)
법무연수원 원장이라는 '한직'에 머물다 화려하게 복귀한 것은 1988년 노태우 정권 때였습니다. 검찰총장에 임명된 그는 '5공 비리' 수사를 지휘했지만, 수사는 대부분 개인 비리 혐의로 종결됐죠. 어쨌거나 법무부 장관의 자리에까지 올라갔으니, 그의 관운은 정말 끝이 없었습니다.
1992년, 그에게도 일생일대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유행어를 낳은 '초원복집 사건'인데요. 12월 대선을 앞두고 부산시장과 검사장, 경찰청장 등 부산지역 기관장들을 모아놓고 민자당 김영삼 후보를 지원하자고 모의한 것이 국민당 정주영 후보쪽의 도청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겁니다.
당시 전직 장관 신분이었던 그의 말을 직접 살펴보시죠.
"안해봐서 그런거야. 장관이 얼마나 좋은지 아나, 모르지", "부산 경남 사람들 이번에 김대중이 정주영이 어쩌니 하면 영도다리에서 칵 빠져 죽자", "하여튼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좀 불러일으켜야 돼. 우리가 남이가"훗날 그는 '초원복집 사건'을 부끄러운 추억이라고 회상했습니다.
"잘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 생애에서 가장 부끄러운 추억 중 하나다. 지우고 싶은 것 중 하나다. 난 깨끗한 비단옷을 입고 달밤에 길을 가는 아낙네였는데, 구정물을 한 바가지 옷에 덮어쓴 것 같은 기분을 느껴요" (2005년 7월 12일 오마이뉴스 인터뷰)
김 전 실장은 15·16·17대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2004년에는 국회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가결된 뒤 헌법재판소에 제출할 때 선봉에 서기도 했죠.
■ '왕실장'으로 화려한 부활김 전 실장이 '왕실장'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것은 2013년 8월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한국에너지재단 이사장으로 사실상 정치적 야인이나 다름 없던 김 전 실장을 청와대 2인자로 불러들였습니다.
당시 박 대통령은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사건으로 궁지에 몰려 있었습니다. 검찰 특별수사팀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할 방침이었는데, 이럴 경우 박 대통령은 정권 출범 초기부터 동력을 잃게 될 위기였어요.
그런데 김 전 실장의 부임 직후 수사가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일보가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자 의혹을 최초로 보도하면서 국면이 전환된 겁니다. 파장이 커지면서 총장은 '찍어내기'를 당했고 특별수사팀은 사실상 공중분해가 됐습니다.
후임으로 임명된 김진태 전 검찰총장은 초원복집 사건 담당 검사였습니다. 김진태 총장 체제가 들어서면서 청와대에서 검찰로 내려보내는 '하명 수사'가 부쩍 늘었는데요, 2014년 가토 다쓰야 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이 '세월호 7시간 의혹'을 보도했다가 기소됐습니다.
같은 해 '정윤회 국정 개입 문건'이 세계일보에 보도되자 검찰은 정윤회씨 대신 문건 유출자로 지목된 조응천 당시 공직기강비서관 등을 재판에 넘겼는데요, "정윤회 문건은 허위"라는 '친절한' 설명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정윤회 문건에는 당사자인 김 전 실장의 이름도 등장해요. "김기춘 비서실장은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가 대통령께 추천해 비서실장이 됐다", "하지만 7인회 원로인 김용환도 최근 김기춘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정씨의 발언이 담겨 있었지만 청와대와 검찰 모두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했죠.
■ 최순실 모른다더니 거짓말?이랬던 왕실장이 '피의자'가 되는 날이 왔습니다. 현재 김 전 실장은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 등으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어요.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을 앞두고 2014년 10월 김희범 전 문체부 1차관에게 1급 공무원 6명으로부터 사표를 받아내라고 지시한 혐의라고 하네요. '비선실세' 최순실씨가 재단 설립을 위해 사전정지 작업을 벌이려던 것이었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김 전 실장이 자꾸 최씨를 모른다고 합니다. 최씨의 측근이었던 차은택씨가 "최순실 지시로 김기춘 비서실장을 만났다"고 폭로하자, 그제서야 김 전 실장은 "만난 것은 사실이지만 박 대통령의 지시였을 뿐 최씨와는 전혀 상관 없는 일"이라고 실토했어요.
김종 전 문체부 2차관도 검찰 조사에서 "김기춘 비서실장이 나가라고 한 자리에 최순실이 있었다"고 증언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 김 전 실장은 박 대통령과 최씨의 단골인 차움의원에서 세포치료를 받고 치료비를 할인 받았다는 의혹까지 받고 있어요.
김 전 실장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최순실씨의 국정개입을 까맣게 몰랐고, 그런 점에서 자괴감이 들 정도"라고 말했는데요,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이 됐나 자괴감이 든다'고 말했던 박 대통령의 발언이 오버랩 되지 않나요?
검찰 수사에 대비한 것으로 보이는 자필 메모를 찢어 쓰레기통에 내다버린 왕실장, 그도 지금 당황하고 있는 걸까요? 수사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국민들은 계속 지켜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