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는 어쩌다 박근혜 정권의 탄생을 허락했을까요. 촛불항쟁으로 새 세상을 향한 열망이 불타오르는 지금, 심리학자 김태형(심리연구소 함께) 소장을 만나 기로에 선 한국 사회를 진단했습니다. 그와 가진 심층 인터뷰를 3회에 걸쳐 전합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최순실, 딸 정유라 학대했다"② "박근혜 탄생, 나치 히틀러와 닮았다"③ "대선주자들 심리 분석해보니 '선구자' 있다"<끝>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다음날인 지난해 12월 10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촛불을 밝히며 '박근혜 대통령 즉각 퇴진' 구호를 외치고 있는 가운데 멀리 보이는 청와대가 적막감에 휩싸여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헌정사상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를 부른 박근혜 대통령 탄핵정국으로 조기대선이 가시화 하면서, 세간에 회자되는 유력 대선주자들의 행보가 바빠지고 있다. 수렁에 빠진 지금 한국 사회에는 어떠한 지도자가 필요할까. 대선주자들의 심리를 분석한 책을 준비 중이라는 김태형 소장은 "'시대정신'을 자신의 '내적 동기'와 일체화시킬 수 있는 사람"을 꼽았다.
"촛불항쟁으로 끓어오른 광장의 목소리를 받아들이고,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인물이죠. 제가 심리적으로 분석한 바에 의하면, 그럴 수 있는 후보도 있고 그렇지 않은 후보도 있어요. 개인적인 성향, 성장 배경, 현재 행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내적 동기가 시대정신을 받아들일 만한 심리 상태를 갖춘 사람이 있습니다. 그냥 떠밀려서 도전하는 분들도 있고요."
'내적 동기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는 요청에 그는 "대통령이 된 뒤 열심히 일할 수 있는 동력"이라고 답했다.
"심리 상태를 보면, 시대의 요구를 내적 동기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물들이 있어요. 이런 경우 겉돌기 마련이죠. 의식적인 차원의 행동은 대권을 잡아야겠다는 의지를 나타내지만, 내적으로는 그다지 절박하지 않은 겁니다. 이 점이 대권주자로서의 자질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어요. 결국 시대정신과 내적 동기가 일치해야만 지도자로서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김 소장은 "최상의 정치 지도자는 광장 정치를 이끄는 사람"이라며 "지도자는 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뚫어 놓은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광장으로 사람들을 불러낼 수 있는 존재"라고 강조했다. "대한민국에는 아직 그러한 지도자가 없었다고 본다"는 견해도 덧붙였다.
"국민들은 이미 광장을 점거했어요. 그러면 그 현장에 나와서 국민들에게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데, 지금 정치인들은 국민들 뒤를 따라오면서 제 잇속만 차리는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 인물들이 단기적으로는 호응을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시간이 흐르는 와중에 검증이 되면서 결국 민심의 버림을 받게 될 겁니다."
그는 세계사 흐름 안에서 시대정신과 내적 동기를 일체화시킨 지도자로 마오쩌둥(중국·1893~1976), 피델 카스트로(1926~2016)와 같은 혁명가를 꼽았다. 한국사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을 이끈 전봉준(1855~1895), 임진왜란 당시 불리한 전세를 뒤집은 이순신(1545~1598) 등을 지목했다.
"이들은 일단 시대의 아픔에 공감했고 '세상을 바꾸겠다'는 내적 동기가 확실합니다. 시대적 소명을 자기 것으로 소화한 거죠. 그들은 공통적으로 누가 봐도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같은 뜻을 지닌 소수를 이끌고 끝내 변화를 만들어냈어요. 여기에 주목해야 합니다. 결국 그러한 지도자들이 세상을 바꾸는 것 아닐까요."
◇ "'우린 같은 처지'라는 공동체 의식, 공포 떨쳐내고 저항 의지 끌어올리는 첫걸음"
'심리연구소 함께' 김태형 소장(사진=이진욱 기자)
사회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미국·1933~1984)의 '복종' 실험(
☞참고 기사)은 '참가자 가운데 65% 정도가 권력자의 불합리한 명령에 따랐다'는 결과를 내놨다. 이는 뒤집어 말하면 '35%가량은 권력자에게 저항했다'는 의미가 된다. 김 소장은 "밀그램 실험의 문제점은 강력한 시스템과 약자인 개인을 고립된 상태에서 대결시켰다는 데 있다"며 말을 이었다.
"만약 밀그램 실험에 참가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행위를 관찰할 수 있었다면, 그러니까 옆에서 똑같은 실험에 임하는 사람이 '나는 전기 충격을 주지 않겠다'고 저항하는 광경을 봤다면 어땠을까요. 이것이 사회심리학자 솔로몬 애시(미국·1907~1996)의 '동조' 실험에서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압력 때문에 불합리한 요구에 동조하게 되는데, 단 한 명이라도 다수 의견과 다른 이야기를 하면 동조하는 정도가 확 떨어집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를 '선구자 효과'라 부르는데, 자기 주변에 단 한 명이라도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러니까 공동체 의식을 갖게 되면 저항 의지를 확 끌어올릴 수 있다는 의미죠."
그는 "지금 한국 사회에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우리는 같은 처지'라는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공동체의식"이라며 "개인들이 운명공동체를 인식하는 만큼 권위에 대한 저항도 커진다. 촛불항쟁이 그 역할을 했고 시민들이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같은 뜻을 확인하면서 싸움이 시작됐다"고 분석했다.
"권위자의 불합리한 압력이나 극한의 공포 상황에서도 저항하는 자질을 갖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심리는 대단히 안정돼 있는데, 어릴 때부터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란 덕에 불안이 적죠. 불안이 적다는 말은 내적인 두려움이 적다는 뜻이에요. 사실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외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내적인 불안이죠. 밖에 무서운 적이 있을 때 내부 불안이 크면 훨씬 무섭게 느껴질 테고, 내적 불안이 적으면 '한 번 싸워보자'며 의지를 다지는 겁니다."
결국 "심리적으로 어릴 때부터 사랑을 많이 받으며 건강하게 자란 사람, 또는 자라면서 사회적 약자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우수한 경험을 지닌 사람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합리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힘을 지녔다"는 것이 김 소장의 지론이다.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을 이끈 체 게바라(1928~1967)의 경우 널리 알려졌듯이 젊은 시절 모터사이클을 타고 남미를 일주하면서 시대의 모순에 눈떴잖아요. 이런 우수한 경험들이 그 사람의 내적 자질과 결합하면 상당히 위력적인 지도자로 등장하는 겁니다. 노예 검투사 신분으로 로마제국을 뒤흔든 스파르타쿠스도 그런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그는 "이렇듯 건강한 정신을 지닌 이들은 난세에도 커다란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며 "이러한 사람들의 비율이 많을수록 그 사회는 건강하다"고 역설했다.
"결국 건강한 사회를 위한 최우선 과제는 정의 실현입니다. 사회 정의가 실현되면 개개인의 불안은 줄어듭니다. 그러면 경제적 불이익 등에 대한 두려움을 걱정하면서 살지 않고 양심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요. 사회 구성원들의 내적 불안이 줄어들면 부모들도 자식을 건강하게 키울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의 부모들이 사교육 등으로 아이들을 괴롭히는 데는 내적 불안이 크게 작용하고 있어요. '너 나중에 돈 못 벌면 큰일난다'는 부모의 불안이 자녀들의 정신을 파괴하고, 사랑 못 받는 아이들을 양산하면서 병든 사회를 만들고 있습니다. 내적 불안이 적은 부모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들은 나빠질 수가 없어요. 한국 사회에서 정의와 평등이 실현되면 부모들의 양육태도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아이들도 건강하게 자랄 거예요. 이것이 우리 사회를 되살리는 첫걸음입니다."
◇ "타오르는 '촛불'…바닥 치고 처참한 고통 경험한 사람들의 '회복'은 무섭다"
지난 11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위한 15차 범국민대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박 대통령의 탄핵과 특검 연장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이한형 기자)
정의 평등 자유 평화…. 촛불항쟁으로 타오르는 국민들의 열망이 있다. 박근혜 정권이 이어져 온 지난 4년간 권력층의 몰상식한 행태에 맞서는 수많은 저항이 있었다. 하지만 이 정권은 주권자들의 외침을 끊임없이 외면하고 부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이미 곳곳에서 싹트고 있었다.
앞서 '선구자 효과'를 언급했던 김 소장은 "곳곳에서 벌어진 저항이 누적돼 온 끝에 촛불항쟁으로 타올랐다. 특히 세월호 참사의 경우 국민들의 정신적인 충격이 워낙에 컸음에도 불구하고 유족들이 굴하지 않고 줄기차게 싸웠다"며 "이러한 모습이 사람들에게 '저렇게 싸우는 사람도 있다'는, 상당히 긍정적인 심리효과를 줬다"고 설명했다.
"한국 사람들이 오랜 기간 민주화 투쟁을 잘 치러 왔다는 점은 자타가 공인합니다. 외국에서도 널리 인정하고 있잖아요. 민주화의 목표는 초창기에 군부독재 퇴진으로 설정됐고, 이를 실현했는데도 사회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신자유주의라는 세계사적 변화에 휩쓸린 우리네 내적 욕망은 '돈' '물질'에 집착하는 방향으로 변질됐어요. 우리가 민주화로 염원했던 것은 '사람 사는 세상'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었는데도 '나는 돈이 없어 불행하다'는 식으로 인식이 왜곡된 겁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진정으로 원했던 바를 추구하지 않으면 세상이 얼마나 끔찍해질 수 있는가'를 경험했어요. 이를 통해 다시 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의지가 모이고 있는 겁니다."
지금 정치권은 조기대선이 가시화 했다는 판단 아래, 대권의 향방에만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정작 광장의 목소리에는 귀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김 소장은 "한국 사회의 야당은 기본적으로 파시즘 체제 안에서의 야당"이라고 규정하면서 "야당 자체도 이제는 쇄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지금의 야당은 본질적으로 '사상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아요. 그랬다면 예전에 통합진보당이 해산될 때 그렇게 묵인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심지어 동조해 놓고는, 이제 와서 비겁하게 '최순실이 그랬다'고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있어요. 야당으로서 결사항전의 의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본 계급에 튼튼하게 뿌리내린 정당도 아니고, 이념적인 좌표도 보수에 가까운 것이 사실입니다."
김 소장의 이러한 비판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70여 년간 한국 사회는 파시즘 체제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회 인식에 토대를 두고 있다. 즉 "한국 현대사를 보면 국민들의 위대한 저항이 계속되면서, 권력층이 일제시대처럼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모습을 바꿔 왔을 뿐 파시즘적 기득권 체제는 계속 유지됐다"는 것이다.
"지금의 야당은 지난 70여 년간 이어진 파시즘 체제에서는 존립할 수 있을지언정,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체제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역량이 안 돼요. 따라서 저는 촛불항쟁이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야당의 한계가 폭로되고 재구성될 것으로 봅니다. 대통령 탄핵소추안의 국회 가결 등을 이끌어낸 촛불항쟁은 새로운 정치세력이 탄생하게끔 만드는 행위로까지 발전할 수 있어요. 그 연장선상에서 만약 헌재 탄핵이 기각됐을 때, 야당이 이에 승복한다면 강력한 저항이 있을 겁니다. 기존 야당을 부정하고 새로운 대안 정치 세력을 요구하는 목소리로 급반전 될 가능성이 커요."
그는 지금의 촛불항쟁을 이끄는 국민들을 두고 "계속 잘 나가던 사람이 아니라, 잘 나가다가 바닥까지 치고 처참한 고통을 경험한 뒤 다시 올라오고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더이상 바닥에 머물 수는 없다'는 점을 뼈저리게 자각하면서 회복하는 만큼, 그 저항은 이제 멈추거나 되돌릴 수 없다"는 얘기다.
"그간 '각자도생해야 한다'는 왜곡된 신념을 갖고 파편화 됐던 개인들이, 촛불항쟁을 통해 '우리는 같은 운명'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지 않으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믿음 속에서 서로 일치하는 뜻을 확인했고, 그것이 모아지고 있는 거죠. 이제 관건은 공동체의 부활에 있다고 봅니다. 노동 현장에서는 더이상 사측이 던지는 떡고물 갖고 싸우지 말고, 비정규직까지 포용하고 연대하면서 노동자 권리 강화로 회사 경영에 영향을 미쳐야죠. 최근 디지텍고교 사태에서도 봤듯이, 학교 현장 역시 재단이 전횡을 휘두르지 못하도록 교사·학생·학부모 대표가 함께 운영하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합니다. '내 돈으로 회사·학교 세웠으니 내가 왕'이라는 식의, 민주주의에 반하는 저급한 인식은 이제 사라져야 해요. 따라서 각자 삶의 현장에서 극단적인 갈등과 대립을 줄이고 수평적인 조직 문화를 정착시킬 수 있는 '기층 민주화'가 굉장히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습니다. 이젠 어쩔 수 없이 그 방향으로 갈 겁니다. 바닥을 친 자의 '회복'은 그래서 무섭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