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는 전동휠체어를 타고 출퇴근하는 장애인 배재현(41)씨와의 인터뷰 및 동행취재를 바탕으로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됐습니다. 이 기사의 시점은 배씨의 전동휠체어입니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출근하는 배재현(41)씨. (사진=박고은 기자)
우리 주인님은 부지런합니다. 새벽 6시가 되기도 전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해요. 오전 9시 30분까지만 회사에 도착하면 되는데 말이죠. 회사가 멀리 있는 거 아니냐고요? 지하철로 딱 3정거장만 가면 돼요. 고개를 갸우뚱하고 계신가요?
사실 우리 주인님은 뇌병변 장애인입니다. 이전에는 목발을 사용해 길을 다녔지만 10여 년 전 출근을 하기 시작하면서 저와 함께하게 되었어요. 목발보다는 전동으로 가는 제가 더 빠르고 편리하니까요. 그런데도 주인님에게 출근길은 '전쟁'과 같습니다. 늘 고단하고, 위태롭기 때문이죠.
주인님이 부지런한 이유는 부지런할 수밖에 없어서입니다. 주인님이 저와 함께할 때는 제약이 많이 생기거든요. 저상버스가 아니면 버스에 타지도 못하고, 식당에 들어가기도 힘들죠. 어쩔 땐 길을 막는다고 한 소리 들을 때도 있답니다. 모두가 바쁜 출근길에는 더 부지런히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거죠.
저상마을버스가 부족한 탓에 전동휠체어를 타고 지하철역까지 가는 배씨. 마을버스를 타면 7분 만에 역에 도착하지만 전동휠체어로 달리면 20분 이상 걸린다. (사진=박고은 기자)
전동휠체어 탑승자에게는 위험한 인도. (사진=박고은 기자)
"덜컹 덜컹!"
오늘도 주인님의 출근길은 녹록지 않습니다. 울퉁불퉁 보도블록 탓에 주인님의 몸은 시도 때도 없이 흔들립니다. 앗, 방금은 보도블록이 빠진 곳을 피하지 못해 주인님을 태운 채로 고꾸라질 뻔 했네요. 사람이 다니라고 만든 길이 '인도'(人道)일 텐데 왜 우리 주인님에게는 차로보다 더 위험한 걸까요?
지난 겨울엔 안 그래도 비탈진 길이 꽁꽁 얼어서 큰 사고가 날 뻔 했다니까요. 비탈진 길에선 제가 헛돌기 쉽거든요. 저에게 울퉁불퉁하고 비탈진 길은 쥐약입니다. 평평한 길이 주인님 같은 교통약자에겐 '생존권'인 셈이죠. 그날 이후로 저와 주인님은 큰 길이 아닌 곳에선 인도보다는 차로의 갓길을 이용한답니다.
울퉁불퉁한 인도 대신 차로의 갓길을 이용하는 배씨. (사진=박고은 기자)
20분을 달려 겨우 도착한 지하철역. 주인님이 주로 이용하는 쌍문역에는 엘리베이터가 있어 참 다행입니다. 예전에 살던 곳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휠체어 리프트를 타야 했거든요.
휠체어 리프트가 얼마나 위험한지는 알고 계시죠? 저희 세계에선 악명 높은 역이 몇 군데 있는데요, 특히 신길역 지하철 1호선과 5호선 사이에 있는 휠체어 리프트는 높이가 어마어마합니다. 73개의 계단이 마치 절벽처럼 가파르게 있는데, 주인님과 같은 휠체어 이용자들은 그 위를 리프트로 이동해야 하는 거예요. 그곳에서 리프트를 타려다 주인과 함께 추락해 세상을 떠난 친구도 있답니다.
지하철역으로 들어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배씨. (사진=박고은 기자)
드디어 지하철이 들어오네요. 오늘은 지하철을 한 번에 탈 수 있어야 할 텐데…. 아, 무슨 얘기냐고요?
지하철 전동차에는 장애인 마크가 붙어있는 휠체어 전용공간이 있습니다. 주인님처럼 교통약자를 위해 마련된 공간인데요, 아침 시간대에는 휠체어 전용칸에도 출근하는 사람들로 가득 찰 때가 있어요. 지하철을 몇 대나 보내는 날도 있죠. 다들 너무 바빠서 휠체어 전용공간이란 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휠체어를 타는 사람도 아침에 출근할 수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으면 좋겠습니다.
비탈지고 막혀 있는 길을 앞에 두고 망설이는 배씨. (사진=박고은 기자)
오늘도 주인님은 출근길이라는 전쟁을 치른 뒤 하루를 시작합니다. 업무 시작도 전에 많이 지쳐 보이네요. 제가 주인님을 안전하고 편안하게 모실 수 있는 날도 언젠가 오겠죠? 여러분의 출근길은 안녕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