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날에 황해도에 구월산 줄기가 바다를 향해 쭉 뻗다가, 뚝 끊어진 '장산곶'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산맥과 바닷가 맞부딛히는 곳이라 물살이 드세고 땅의 기운이 센 곳이었다. 헌데 이 곳은 땅의 기운이 하도 드세어서 약한 것들은 살아남질 못했다.
1974년, 마흔두 살. 박정희 정권 아래 긴급조치1호 위반으로 의형제를 맺고 박정희 타도 싸움을 명세하였던 독립군 출신 장준하(1918-1975)와 군법재판을 받는 장면 ⓒ통일문제연구소
1985년, 쉰세 살. 광주학살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집단 단식투쟁. 김대중 민추협공동의장이 발언하고 있다. 오른쪽 아래에 김영삼 민추협 공동의장, 문익환 목사가 보인다. ⓒ박용수
그 장산곶에 우람한 낙락장송이 우거진 숲이 있었는데, 그 숲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다가, 나쁜 놈들한테 쫒기는 사람들이 들어가곤 했다.
1987년, 고문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돼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자마자 유월항쟁의 거리에서 백기완은 지팡이를 짚으며 함께 했다. ⓒ박용수
1987년, 진압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진 연세대생 이한열(1966-1987) 열사의 범국민장례식. 최민화가 그린 ‘이한열부활도’ 뒤로 지팡이를 짚으며 행진하는 백기완이 보인다. ⓒ통일문제연구소
그 이유인즉, 나쁜 놈들이 칼을 들고 들어가면 그 칼에 금방 녹이 슬어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그 숲에 '장산곶 매'의 정기가 서려 있었기 때문이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 유세가 열린 서울 대학로 ⓒ통일문제연구소
1992년, 시위 도중 백골단의 구타에 숨진 명지대생 강경대(1972-1991) 열사 1주기 추모식 ⓒ민족사진연구회
이 장산곶 숲속에 날짐승 중 으뜸이라 할 수 있는 매가 살았는데 그 중 으뜸인 장수매를 일컬어 장산곶 매라 한다. 이놈은 주변의 약한 동물은 괴롭히지 않고 일년에 딱 두번 대륙으로 사냥을 나가는데 떠나기 전날 밤 부리질을 하며 자기 둥지를 부수어 낸다.
2000년, 예순여덟 살. 615남북정상 회담 뒤 북쪽 조선노동당 창건 55주년 기념식에 초청받아 방문한 평양 대동강변에서 눈물에 젖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장산곶 매가 한 번 사냥을 나선다는 건 생명을 건 혼신의 싸움이었으므로 그 부리질은 마지막 입질 연습이요, 또한 그것을 통해 자신의 마지막 안식처까지 부수어 내며 자신의 정신적 상황을 점검했던 것이다.
2011년 10월 28일 국회 앞에서 열린 한미FTA저지 범국민대회에 참가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연행되고 있다. 황진환 기자
2013년 3월 21일 헌법재판소 앞에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등이 박정희 전 대통령 재임시절 제정된 유신헌법 53조에 근거한 긴급조치 1,2,9호에 대한 헌재의 전원일치 위헌판정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
그래서 장산곶 사람들은 매가 부리질을 딱딱-- 시작하면 마음을 조이다가 드디어 사냥을 떠나면 바로 그 순간 봉화를 올리고 춤을 추며 기뻐하였던 것이다.
2013년 3월 26일 오전 용산구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고 장준하 선생 사인진상조사 공동위원회 주최 유해 정밀감식 결과 국민보고대회에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과 선생의 장남 장호권씨가 감식결과를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윤창원 기자
2014년 6월 30일 전국금속노동조합 삼성전자서비스지회의 '승리를 기원한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고 염호석(34) 양산센터 분회장의 장례식에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노컷뉴스 자료사진
그런데 하루는 큰 대륙에서, 우리집보다 더 큰 날개를 가진 독수리가 쳐들어와서 온 동네를 쑥밭으로 만들었다. 송아지도 잡아가고, 아기도 채 가고, 농사 지은 것도 다 망쳐버리고, 동네 사람들은 많이 다치고, 죽기도 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기운이 빠져 막 우는데 장산곶매가 날아올랐다.
2017년 4월 2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23차 범국민행동의 날’ 촛불집회에 참가한 세월호 희생자 단원고 고 오영석군 어머니 권미화씨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에게 담요를 덮어주고 있다. 황진환 기자
2019년 2월 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청년 노동자' 고 김용균(24) 씨의 민주사회장 영결식에서 어머니 김미숙 씨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다. 박종민 기자
동네 사람들은 징두 치구 꽹과리도 치면서 막 응원을 했다. 독수리는 그 큰 날개를 한 번 휘두르면 회오리가 일어날 지경이었고, 장산곶매는 그에 비하면 형편없이 작아 보였다.
15일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故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빈소에서 유가족이 영정에 절을 하고 있다. 이한형 기자
15일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故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빈소를 찾은 한 조문객이 눈물을 훔치고 있다. 이한형 기자
싸움은 밤새 계속되었다. 흰옷 입은 사람들의 옷에 꽃잎처럼 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번지기 시작했다. 장산곶매와 물 건너온 독수리는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18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시청 앞에 마련된 故 백기완 선생의 시민분향소를 찾은 시민들이 조문하고 있다. 이한형 기자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고(故)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운구차가 떠나고 있다. 이한형 기자
장산곶매는 용감히 싸웠다. 처음엔 그놈의 날개 바람에 휘청거리기도 했지만 싸우면서 그놈의 약점을 알았다. 날개가 아무리 커도 날갯죽지는 별거 아니었으므로 장산곶매는 단숨에 그놈의 가슴팍을 파고들어 있는 힘을 다해 날갯죽지를 쪼아버렸다. 그러자 그놈은 힘을 못쓰고 땅으로 곤두박질을 치고 말았다.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출발한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운구행렬이 노제가 열리는 대학로로 이동하고 있다. 이한형 기자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대학로 소나무길에서 고(故)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노제가 열리고 있다. 이한형 기자
싸움이 끝나고 난 후 장산곶매는 벼랑 위 낙락장송 위에 앉아 피투성이가 된 지친 몸을 쉬고 있을 때 피냄새를 맡은 큰 구렁이가 나타났다. 그리고는 장산곶매가 앉아 있는 나무를 감고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장산곶매더러 빨리 날아오르라고 막 소리를 지르며 꽹과리를 쳐댔으나, 장산곶매는 졸고만 있었다.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영결식이 엄수된 19일 오전 고인이 생전에 매일 찾아 커피를 마시며 사색했던 서울 종로구 학림다방에서 유가족이 영정 앞에 커피를 올리고 있다. 이한형 기자
고 백기완 선생의 사회장이 엄수된 19일 고인이 설립한 서울 대학로 통일문제연구소에서 노제가 열리고 있다. 이한형 기자
마을 사람들이 장산곶매 어릴 적에 마을을 지키는 새라고 발목에 끈을 매어 표시를 해 놓았었는데, 그게 나뭇가지에 걸렸다. 그런데 장산곶매는 너무 지쳐 그것을 끊을 수 없어서 날아오르지 못했던 것이다.
고 백기완 선생 영결식이 열린 19일 오전 서울 중구 대학로 통일문제연구소에서 노제를 지내며 영정이 연구소를 돌아보자 유족들이 오열하고 있다. 이한형 기자
19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故 백기완 선생의 영결식이 진행되고 있다. 이한형 기자
장산곶매는 한 쪽 발을 들고 졸고 있었는데 구렁이가 막 덤비는 순간 들고 있던 한쪽 발로 구렁이의 눈을 공격하고 그 놈이 휘청거릴 때 부리로 머리통을 쪼아 버렸다.
19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故 백기완 선생의 영결식이 진행되고 있다. 이한형 기자
마을 사람들이 기뻐 함성을 올리는 순간 장산곶매는 하늘로 힘차게 날아 올랐다. 그때 동편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며 마을에는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였다.
19일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에서 故 백기완 선생의 하관식이 엄수되고 있다. 박종민 기자
19일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에서 故 백기완 선생의 하관식이 엄수되고 있다. 박종민 기자
백기완 <장산곶매 이야기="">장산곶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