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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국 시집 <눈먼 자의 동쪽>



책/학술

    오정국 시집 <눈먼 자의 동쪽>

     

    오정국 시인의 새 시집 <눈먼 자의="" 동쪽="">이 출간되었다. 시인은 내설악의 적막함과 비슈케크의 고독감, 제주의 쓸쓸함을 맹목과 적빈의 길항 속에서 시집에 새긴다. 눈먼 자의 동쪽은 이미지나 상상 속 동쪽이 아닌, 시인의 체화 속에 마련된 공간이며 모종의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오정국 시인이 내밀하게 촬영하고 오래 다듬은 ‘숲의 다큐멘터리’에 독자를 초대한다.

    강줄기 한복판의 얼음장이 가장 시퍼렜다 거기서 누가 수심을 잰 듯, 나무 막대기가 수직으로 꽂혀 있었고, 그걸 꽂아 둔 이는 보이지 않았다

    모서리 없는 햇빛의 책방이었다
    -「햇빛의 책방-내설악일기(日記) 13」에서

    눈먼 자에게 동쪽은 시각을 제외한 이미지로 존재할 것이다. 시집의 초반부에 동쪽은 ‘내설악’을 대표로 하는, 강원도 인제 곳곳으로 그려진다. 그것은 눈먼 자로 믿겨지지 않을 만큼 회화적이나, 눈이 아닌 다른 감각기관을 살아나게 할 만큼 비회화적이기도 하다. ‘혹한기 훈련의 콧김’부터 ‘죽을힘 다해 부릅뜬 삵의/ 눈동자’에 이르기까지 눈먼 자의 눈은 산간지방의 겨울을 매섭게 훑어 내린다. 이는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 이야기’여서 눈보다는 피부에 가까운 감각이다. 맹렬한 한파는 눈보다는 몸에 바로 닿으며, 오정국의 시는 휘몰아치는 바람 혹은 얼어 버린 강의 표면에 가깝다. 감당할 수 없는 시의 냉기 앞에 우리는 모든 감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내설악부터 오정국의 여행은 시작되며, 독자는 스무 편에 이르는 내설악일기 연작을 다 읽고 나서야, 그러니까 외투를 단단히 여미고, 스노체인까지 마련한 후에야 본격적으로 눈 위에 놓인 시인의 발자국을 따라나설 수 있는 것이다.

    검은 암벽을 흘러내리는 희고 붉은 흙모레들, 돌산 봉우리가 적빈(赤貧)의 고요를 견디지 못한 탓이리라 내 몸의 허기도 저 골짜기 어디쯤에서 굶어 죽기를 바라는데
    -「가시덤불의 비닐봉지-비슈케크일기(日記)2」에서

    내설악을 떠난 시인은 중앙아시아의 설산으로, 제주도의 찬 벼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의 행로는 흡사 홀로 촬영 중인 다큐멘터리 감독과 같다.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찍듯 건조한 언어를 구사하며 촬영의 결과를 재배치하는 편집자가 되어 시집의 구성을 처연히 마무리한다. 다큐멘터리의 공간은 결국 숲이었으며, 시인은 숲을 이루는 나무와 나무를 파먹는 짐승과, 그 짐승을 쫓는 또 다른 짐승을 오랜 시간 탐구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어느 생의 언젠가를 통과했던/ 길목들’이고 ‘내 캄캄한 후생의 얼굴들이/ 겹겹의 파도로 떠밀려 왔’던 곳이며 그곳의 감독 혹은 시인은 ‘뜻밖의 장소에 떨어진 운석’과도 같은 존재가 된다. 시인이 장구한 다큐멘터리로서 시를 완성한 동력은 결국 감옥에 갇힌 것 같은 고독의 힘이었다. 그 고독의 처연함 속에서 눈사람의 먼눈은 동쪽을 향해 그 빛을 발하고 있다.

    책 속으로

    동해안 해맞이 관광버스 행렬들,
    승객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을 때도 있었건만
    이리저리 밀려다니며 더럽혀지는
    눈송이들, 질척한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앉았는데
    가드레일 너머의 눈밭은 소담스럽다 눈은 저렇듯
    공터에서 빛나고, 낚시터의 수초 구멍 같은 게
    뿅뿅뿅뿅 뚫려 있다 꼿꼿하게 몸을 세운
    갈대들, 가느다란 열선(熱線)들이
    오늘 하루 햇볕의 혈당치를
    땅 밑으로 깊숙이 찔러 넣는다 눈밭은
    저렇게 녹아 가는 것인데, 저런 불한당 같은
    트럭들, 화물칸을 기우뚱거리며 달려오더니
    꼬리에 꼬리를 물고 헐떡이더니
    왕방울 같은 눈알을 번쩍이더니
    미시령 터널로 사라져 갔다 개울로 물 마시러 왔다가
    짐승에게 쫓기는 짐승처럼

    -「짐승에게 쫓기는 짐승처럼-내설악일기(日記)5」

    평생토록 흙먼지 속을 떠돌던
    눈먼 사람들, 헐벗고 헐벗어 돌무덤이 되었다
    이젠 돌문을 열어젖히라고 하였지만
    설산 봉우리만 햇빛에 번쩍이고
    돌 속으로 뿌리를 감추는
    비바람의 얼룩들, 내 살갗처럼 붉으랴
    그 누구에게도 눈길 한 번 준 적 없는
    적빈의 주검들, 만년설의 흰빛을
    수의(壽衣)처럼 감고 있다 골짜기 눈구덩이가
    산봉우리로 밀려 올라가고, 그만큼 그만큼씩
    산기슭을 내려오는 초록빛 융단들
    제비꽃을 올망졸망 흔들어 주더니
    협곡의 평원으로 달려 나갔다
    평생토록 풀을 뜯는 양 떼가 흘러갔다

    -「만년설의 흰빛을 수의처럼-비슈케크일기(日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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