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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장사? 이젠 마돈나죠" 모래판 뒤흔드는 女風



스포츠일반

    "천하장사? 이젠 마돈나죠" 모래판 뒤흔드는 女風

    '꽃가마는 여자가 제격이죠' 24일 '2017 천하장사씨름대축제'에서 여자 2부 매화장사, 국화장사, 무궁화장사에 오른 김은별(왼쪽부터), 이서우, 양현수 씨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나주=대한씨름협회)

     

    최근 모래판에 불고 있는 여풍(女風)이 대단하다. 덩치 큰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씨름에 다부진 여자 장사들이 점점 기세를 올리고 있다. 아직 남자 씨름의 인프라, 인기와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차츰 나름의 영역을 구축하며 전성기를 예고하고 있다.

    지난 20일부터 전남 나주스포츠파크에서 진행 중인 'IBK기업은행 2017 천하장사씨름대축제'에는 92명의 여자 선수들이 출전했다. 여자천하장사의 영예를 안기 위해 도전장을 내밀었다. 스페인과 몽골, 캄보디아 등 외국 선수 12명을 빼도 80명이다.

    이들은 남자 선수 못지 않은 힘과 기술로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펼치며 모래판을 후끈 달구고 있다. 24일 예선에서는 '여자 이만기'로 군림 중인 임수정(콜핑)과 '여자 이봉걸'로 뜨고 있는 정지원(거제시청)이 그야말로 혈투를 펼치며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여기에 여자 선수다운 외모와 특유의 섬세한 면도 있어 투박한 남자 선수들과는 또 다른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대한씨름협회 박문수 상벌위원장은 "여자 씨름도 중계 시청률이 꽤 나온다"면서 "홍보 효과도 크기 때문에 최근 신생팀이 창단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귀띔했다. 강광훈 협회 비디오판독위원도 "이미 경기도 안산과 화성시가 창단을 위한 예산을 확보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거들었다. 그러면 실업, 지자체팀이 6개로 늘어난다.

    인기가 높아지면서 주가도 상승하고 있다. 여자천하장사에 오르면 경기력향상지원금 2000만 원을 받는다. 남자의 1억 원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일주일 정도 대회를 치르고 받는 액수임을 감안하면 큰 돈이다. 최강으로 꼽히는 임수정은 지금까지 1억 원이 넘는 상금을 벌었다. 임수정은 한 예능 프로그램에도 나온 유명인이기도 하다.

    현재 여자 씨름 최강으로 평가받는 임수정(오른쪽)과 최근 강력한 대항마로 떠오르는 정지원의 경기 모습.(사진=대한씨름협회)

     

    여기에 안정적인 수입도 있다. 한 씨름계 관계자는 "콜핑 선수들은 회사 정직원"이라면서 "은퇴를 하면 일반 직원처럼 근무할 수 있는데 예전 남자 실업 선수와 같은 셈"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방자치단체 선수들도 계약금과 연봉을 받는데 일반 회사원 수준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때문에 최근 여자 씨름 선수를 꿈꾸는 이들도 늘고 있다. 이번 대회 동호인들이 나서는 2부 장사 타이틀을 얻은 선수들이 대표적이다. 지인의 권유로, 취미로 우연히 시작했지만 천직으로 삼겠다는 이들이다.

    이번 대회 2부 매화장사(60kg 이하)에 오른 김은별(23 · 경기도)도 전문 선수의 꿈을 키우고 있다. 김은별은 태권도 4단의 유단자였으나 중학교까지만 도복을 입었다. 이에 씨름을 틈틈이 하던 어머니 등의 권유로 15살에 모래판에 발을 들였다.

    제법 재미를 느꼈지만 씨름이 싫기도 했다. 김은별은 "여자애가 씨름을 한다고, 또 뚱뚱한 거 아니냐고 놀리더라"면서 "성적이 잘 안 나오기도 해서 중간에 씨름을 그만두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전통의 민속 스포츠지만 옛날 경기라는 인식이 강했던 것.

    하지만 한번 맛들인 씨름에 대한 열정을 포기할 수 없었다. 김은별은 "대학에서 스포츠를 전공해 장래 트레이너를 생각 중이었는데 '씨름을 다시 해볼 생각 없느냐'고 주위에서 권했다"면서 "예전 2부 대회에서 3등까지 했는데 1등은 한번 해보고 끝내자는 오기로 다시 샅바를 잡았다"고 말했다.

    제대로 훈련을 하면서 목표했던 1등도 해냈다. 이달 초 대장사대회 2부 매화장사에 오른 것. 그랬더니 더 욕심이 생겼다. 김은별은 "콜핑에서 연습생으로 지냈는데 이번 대회 1등을 하면 정식 계약을 해주겠다고 하더라"면서 웃었다. 김은별은 결승에서 무서운 17살 여고생 이정수(서울씨름사랑회)를 눌렀다.

    씨름에 대한 선입견도 사라졌다. 김은별은 "체형이 호리호리한 편이라 보통 내가 열세일 것이라 예상하는데 이기면 쾌감이 장난 아니다"면서 "목욕탕에 가면 아주머니들이 '너처럼 마른 애도 씨름을 하느냐'고 묻는데 씨름은 의외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남자 친구도 오히려 씨름을 한다니까 관심을 갖고 오히려 더 빠졌다"면서 "그러나 남친과 다툴 때는 힘을 쓰진 않는다"고 내숭(?)을 떨기도 했다.

    '엄마 나 생애 첫 1등 먹었어' 김은별이 이달 초 여자대장사씨름대회 2부 매화장사에 오른 뒤 포즈를 취한 모습.(자료사진=대한씨름협회)

     

    아직까지 여자 선수들 중 상당수는 유도 출신이다. 임수정도 유도 출신인 데다 그의 아성을 위협하는 정지원은 올해 씨름에 입문했는데도 정상권 기량을 보이는 것은 국가대표 유도 선수 출신이기 때문이다. '털보' 이승삼 협회 심판위원장은 "아무래도 두 종목이 비슷한 점이 많은 데다 힘을 쓰는 종목이라 유리하다"고 짚었다.

    2부 국화장사(70kg 이하)에 오른 이서우(24 · 전남 고흥군)도 올해에야 씨름을 시작했다. 결승에서 만난 이유빈(20 · 전남 고흥군)도 씨름 4개월 차다. 이들은 각각 5, 6년의 유도 선수 경력이 있어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씨름의 매력에 푹 빠져 제 2의 인생을 설계하고 있다. 이서우는 "유도는 서서도, 누워서도 할 수 있지만 씨름은 손톱만 모래에 닿아도 결판이 나기 때문에 긴장할 수밖에 없다"면서 "또 힘 대 힘으로 맞서는 승부가 짜릿하다"고 매력을 어필했다. 이서우는 "유도 선수의 꿈은 접었지만 씨름 선수의 꿈은 키워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은별처럼 연습생인 이서우는 기량과 경험을 끌어올려 1부, 즉 전문 선수로 도약을 노린다. 이서우는 "원래 이름이 이혜미였는데 매번 첫 판에 탈락해서 개명했다"면서 "그런데 첫 대회에서 우승까지 해서 기분이 좋다"고 웃었다.

    그러나 천하장사 예선에서 임수정에 호되게 당했다. 이서우는 "실력이 천지차이"라면서 "이다현(구례군청) 언니가 롤모델이지만 앞으로는 매화급(60kg 이하)으로 나서기 때문에 같은 체급의 이연우(구례군청), 한유란(거제시청) 언니처럼 되고 싶다"고 당찬 포부를 밝혔다.

    '이서우의 우상' 이다현이 이달 초 대장사씨름대회에서 여자 대장사에 오른 뒤 황소 트로피에 입을 맞추는 모습.(사진=대한씨름협회)

     

    전문 선수로 도약만 노리는 것은 아니다. 취미로, 건강을 지키기 위한 운동으로, 재미로 씨름을 즐기는 이들도 적잖다. 이날 무궁화장사(80kg 이하)에 오른 양현수(34 · 경남) 씨다. 양 씨 역시 14살부터 9년 동안 유도를 했던 실력자, 9월 첫 대회인 구례여자대회에서 곧바로 2부 무궁화장사에 올랐다.

    하지만 전문 선수로 나서고 싶진 않다. 양 씨는 "정지원과 협회 이진아 심판이 유도를 하며 부대꼈던 친구들이고 권유로 시작하게 됐다"면서도 "그러나 친구들처럼 직업으로 삼을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아직 시작한 지 2개월 남짓밖에 되지 않은 데다 남편과 자영업을 하는 만큼 시간적인 여유도 충분하지 않다.

    그래도 행복하다. 양 씨는 "일주일에 한번 운동하는데 즐겁고 씨름에 매료됐다"고 말했다. 아이들도 좋아한다. 양 씨는 "장사가 돼서 곤룡포를 입은 모습을 보더니 9살, 7살 딸들이 '엄마 옷 너무 예뻐'라고 하더라"고 귀띔했다. 일상의 스트레스를 터는 데 씨름 만한 게 없다는 양 씨다.

    이번 대회에도 양 씨와 같은 가정주부들이 있다. 양 씨가 결승에서 만난 황순남 씨(44 · 경북)는 19살, 16살 딸을 둔 보험설계사다. 지역 씨름대회 현수막을 보고 무작정 시작한 씨름인데 천하장사 대회까지 나왔다. 딸들에게 더 멋진 엄마가 되고 싶다는 황 씨다.

    매화급의 권윤영 씨(25 ·경북)도 간호사로 "상대를 넘기는 짜릿함이 좋다"며 씨름에 빠졌다. 일반인들도 충분히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종목이다.

    필드 하키 선수 출신 양윤서가 이달 초 대장사대회 매화급 결승에서 우승한 뒤 기뻐하는 모습.(사진=대한씨름협회)

     

    현재 여자 씨름은 높아지는 인기에 비해 아직 선수층이 얇다. 앞서 언급한 임수정, 이다현, 정지원을 비롯해 베테랑 송송화(콜핑), 조현주(구례군청), 양윤서(콜핑) 등 특급 선수들은 손에 꼽는다. 남자부 17개 팀에 비하면 6개 팀은 적지만 선수는 더 적다.

    때문에 1부 선수를 두고 다른 팀들의 빼내기 등 치열한 스카우트 경쟁이 펼쳐진다. 천하장사 출신 황규연 전남협회 홍보이사는 "최근 여자 씨름이 각광을 받는데 선수가 부족한 게 현실"이라면서 "2부에서 실력을 쌓아 올라와야 하지만 쉽지 않다"고 말했다. 황 위원은 "여자 씨름이 전국체전 종목이 돼야 학교 씨름부가 생겨 선수들이 육성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단 협회는 여자부에 한해 외국인 선수 제도 도입을 검토 중이다. 박문수 위원장은 "스페인이나 몽골 등 씨름과 유사한 경기가 있는 나라의 선수들은 재능이 있다"면서 "어느 정도 한국 씨름에 익숙해지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외인 제도가 시행되면 선수 수급이 원활해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흥행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80~9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해 2000년 중반까지도 건재를 과시했던 씨름. 그러나 최근에는 경제 위기와 종합 격투기 등 외부적 요인에 위기감이 감돈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민속 스포츠로서 명맥을 확실하게 이어온 가운데 스포츠 인기의 척도라 할 수 있는 여성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과연 불어온 여풍으로 한국 씨름이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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