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작아지는 대한민국을 피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덜 작아지도록, 더딘 속도로 오도록 대비할 수는 있습니다. 초저출생은 여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남녀 모두의 일입니다. 국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개인, 모든 세대의 일입니다. CBS는 연중기획 '초저출생: 미래가 없다'를 통해 저출산 대책의 명암을 짚고, 대한민국의 미래와 공존을 모색합니다. ▶birth.nocutnews.co.kr
스마트이미지 제공 제도는 있는데…'못' 쓰는 육아휴직
"설마 우리에게 출산휴가나 육아휴직 급여를 준다고요? 우리와는 관계없는 정책인 줄 알았어요."
지난 2019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간담회에서 나온 대리기사의 발언입니다. 왜 이런 고충을 토로했을까요? 똑같은 출산과 육아라도,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누릴 수 있는 권리는 고용형태에 따라 차별적으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대리기사와 같은 플랫폼 종사자와 특수고용직 종사자는 고용보험에 가입할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고용보험에 가입한 임금 근로자에게만 지급되는 출산 전후휴가 급여와 육아휴직 급여를 받을 수 없었죠.
하지만 법적 사각지대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택배기사 등 12개 직종 특고 노동자가 지난 7월부터 고용보험에 편입됐고, 퀵서비스와 대리기사는 내년 1월 고용보험 가입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와는 별도로 고용보험에 가입하진 않았지만 소득활동을 하는 여성들의 경우 2019년 7월부터 월 50만 원씩 3개월간 출산급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은 출산 의향에 상당한 영향을 끼칩니다. 2018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출산 전후휴가 및 육아휴직 활용 가능성이 출산에 미치는 영향' 연구 결과를 보면, 혼인 당시를 기준으로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여성 임금 근로자의 출산 가능성은 각각 36.5%와 29.3%로, 그렇지 않은 여성 근로자에 비해 높았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땠을까요? 제도적 틀도 갖췄겠다 그저 잘만 활용하면 될 텐데, 우리나라 출산휴가와 육아휴직 사용률은 여전히 터무니없이 낮습니다.
2019년 고용노동부의 '일·가정 양립 실태조사'에 따르면 출산휴가를 '전혀 활용할 수 없다'고 응답한 경우가 24.9%에 달했습니다. 특히 5~9인 사업체 근로자의 34.3%는 출산휴가를, 39.5%는 육아휴직을 전혀 활용할 수 없다고 응답했습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아동가구 통계등록부'를 보더라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2019년 만 8세 이하 자녀를 양육하는 상용직 부모 중 육아휴직을 쓴 비율은 8.4%에 불과했죠. 여성이 육아휴직을 쓴 비율은 18.5%로, 남성(2.2%)보다 8배나 높았습니다.
소규모 회사일수록 육아휴직 사용률은 떨어졌는데요, 공공기관을 포함한 비영리기관의 육아휴직 사용률은 24.8%, 대기업 24.1%였던 반면 중소기업은 12.4%로 상대적으로 저조했습니다.
눈물 머금고 일터를 떠나는 여성들
우리나라가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려면 갈 길이 아득합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주요 20개국은 출생자 100명당 남녀 육아휴직 사용자가 여성 118.2명, 남성 43.4명인데 비해 우리나라는 여성 20.2명, 남성 1.9명으로 평균에도 한참 못 미칩니다.
여전히 현장에선 회사 눈치가 보인다는 이유 등으로 출산휴가나 육아휴직 권리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데요. 이에 감사원은 지난 8월 내놓은 보고서에서 "육아휴직 사용이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는데도 실제 사용 과정에서는 여전히 진입장벽이 높고 불이익이 발생할 우려가 있기 때문"으로 판단했습니다.
실제로 육아휴직을 쓴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은 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가 내놓은 '모성보호 갑질 보고서'를 보면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최근 3년간 전체 육아휴직자 31만여 명 중 36%가 퇴사를 했는데 자발적 퇴사보다는 권고사직일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육아휴직 불이익일 가능성이 높지만 정작 당국에 접수된 신고 건수는 겨우 108건에 불과했습니다.
보고서는 "육아휴직 후 복직을 이기적인 일이라고 비난하고, 어렵게 복직했더니 일하던 자리를 없애고 권고사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직장 내 괴롭힘으로 스스로 나가게 만든다"며 "약자인 직장인들은 신고조차 하지 못하고 눈물을 머금고 회사를 떠난다"고 지적했습니다.
고용현장에서 밀려난 여성들의 숫자는 통계에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2019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출산·양육기(35~39세)
남녀 고용 격차는
31.2%포인트로,
여성의 경력단절 현상은 심각한 수준입니다.
이른바 'M 커브.' 여성 고용률은 20대엔 남성과 비슷하지만 30대 출산·양육기 이후 급락하고, 40대 이후에 다시 상승하는 패턴을 보입니다.
그마저도 저임금이나 비정규직 등으로 재취업한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남녀가 버는 돈에도 불균형이 발생하게 되는데요,
2018년 우리나라의 성별 임금 격차는 34.1%로, OECD 평균(12.9%)에 훨씬 못 미치는 최하위 수준이었습니다.
"아이는 자라서 온 마을이 된다"
초저출생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른 만큼 이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비취업자에게도 부모수당을 지급하는 독일이나, 실업자에게도 육아휴직 수당을 지원하는 프랑스 등 육아휴직을 '보편적 권리'로 인식하는 해외 선진국들의 선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육아휴직이 여성만의 제도가 아니라 일하는 남녀 모두의 제도라는 인식, 더 나아가 육아휴직이 당사자 개인의 일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의 일이라는 인식개선이 필요합니다.
'가족친화 사회환경의 조성 촉진에 관한 법률(가족친화법)'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 법은 일과 가정생활을 조화롭게 병행할 수 있고, 아동양육 및 가족부양 등에 대한 책임을 사회적으로 분담할 수 있도록 사업주가 노력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는데요.
초저출생 문제를 해결하려면 사업주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수적입니다.
엔씨소프트 어린이집 '웃는땅콩'. 엔씨소프트 제공 그렇다고 경영 사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닙니다. 실제로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19년 일·가정 양립 실태조사를 벌였더니 상시근로자 5인 이상 사업체 5097곳의 인사담당자가
동료 및 관리자의 업무 과중(32%)과
대체인력 확보 곤란(20.6%) 등의 어려움으로 인해 육아휴직 제도 활용이 어렵다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인력 공백이 문제라면 정부의 대체인력 채용 지원금 제도를 활용해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정부는 출산육아기 대체인력 지원금으로 우선지원대상기업에 1인당 월 80만 원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또 내년부터 육아휴직을 허용한 우선지원대상기업 사업주에게 월 30만 원씩 육아휴직 지원금을 지급합니다. 생후 12개월 미만 자녀를 둔 직원에게 육아휴직을 3개월 이상 허용한 사업주에게는 초기 3개월간 월 200만 원까지 지원한다고 합니다.
정부가 적극적인 지원책을 마련하는 만큼 기업주도 사회적 책무를 다한다면 부모들이 회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육아휴직 권리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직장문화가 조성되지 않을까요?
잔존하는 돌봄 공백 문제도 간과해선 안 되겠죠. 육아휴직 후 일터에 돌아온 부모들이 마음 놓고 아이를 맡길 보육시설이 없으면 업무에 집중할 수 없으니까요.
이와 관련해 정부는 2019년 기준으로 전국 28.2%에 불과한 공보육 이용률을 2025년까지 50%까지 끌어올리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국공립 어린이집 550곳을 확충하기로 했죠.
또 초등돌봄 공백을 해소하고 사교육 수요를 줄이기 위해 온종일 돌봄도 확대하기로 했습니다.
돌봄을 사회적 책무로 인식하는 기업들도 점점 늘고 있는데요.
가족친화기업 인증을 받은
포스코는 지난해부터 협력사 직원의 자녀들도 다닐 수 있는 '상생형 공동 직장 어린이집'을,
엔씨소프트는 야근이 많은 IT 업무의 특성상 밤 9시까지 아이들을 돌봐주는 직장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관련기사
"아이 있어요? 두당 50콜!…양육지원금 주는 '요즘' 회사들")
아프리카 속담으로 유명한 말이 있죠. "아이 하나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
역으로 생각하면 이런 추론도 가능합니다. "그 아이는 자라서 모두의 마을이 된다." 우리나라 경제 구조의 특성상 후속세대는 윗세대를 떠받치니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한 아이의 출생이 사회 전반에 미칠 영향력을 어림잡아볼까요? 영유아 산업부터 시작해서 그 아이가 거쳐 갈 어린이집과 학교, 회사 등등 사회 전반에 뻗칠 영향력은 실로 어마어마합니다.
가정 내 성평등 이뤄지면 출산율도↑
사회적 제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여성의 가정 내 지위입니다. 조영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가 저서 '인구미래공존'에서 호주국립대 사회학과 피터 맥도널드 교수의 연구를 인용한 대목을 옮겨보겠습니다.
"가정에서의 지위가 높으면 출산율 하락이 정지하고 오히려 높아지는 경향이 나타난다. 결국 여성의 가정 내 지위가 중요한데, 사회적 지위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올릴 수 있지만 가정 내 지위는 그러기가 쉽지 않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살펴볼까요? 2019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맞벌이 부부의 주중 가사·육아시간은 아내가 181.7분, 남편이 32.2분이었습니다. 여성의 참여율이 5배 이상 압도적으로 높았죠.
더 황당한 지표도 있습니다. 2020년 통계청 사회조사에서 가사를 공평하게 분담해야 한다는 응답은 62.5%였지만, 정작 가사분담을 공평하게 하고 있는 남편은 20.7%에 불과했습니다. 인식과 현실이 따로 노는 겁니다.
'
일·지향 보수주의.' 한국인구학회는 여성의 경제활동은 인정하면서
양육과 돌봄은 여성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규범이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분석한 바 있습니다.
"떨어지는 출산율을 막아줄 수 있는 것이 바로 가정 내 성평등 수준이다." 인구학 권위자 맥도널드 교수의 결론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조 교수는 "지속적인 초저출산 현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현실에서 그것(가사분담)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은 것 같다"며 "이러한 현실은 여성, 특히 경제적 능력이 충분한 여성에게 비혼을 선택하게 하는 원인들 가운데 하나로 지목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이라는 제도적 장치와 더불어 가정 내 성평등이 실현된다면 지금의 소수점 출생률에 아주 조금은 변화가 오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끝으로 김소영 에세이 '어린이라는 세계'에 나온 구절을 인용합니다. 현재 세대(어른)와 미래 세대(어린이)를 바라보는 기자의 가치관을 함의하는 문장입니다.
"지금 어린이를 기다려 주면, 어린이들은 나중에 다른 어른이 될 것이다. (중략) 어린이와 어른은 함께 자랄 수 있다."
※ 참고문헌
- 인구미래공존 (조영태, 2021)
-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2020)
- 제4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2020)
- 인구구조 변화의 원인과 정책 대안에 관한 토론회 자료집(저출산위·한국인구학회, 2020)
- 육아휴직제도의 보편적 사용 확산을 위한 쟁점과 개편 방향(저출산위·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19)
- 아동가구 통계등록부(통계청, 2020)
- 저출산·고령화 대책 성과분석 감사 보고서 (감사원, 2021)
- 모성보호 갑질 보고서(직장갑질119,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