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작아지는 대한민국을 피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덜 작아지도록, 더딘 속도로 오도록 대비할 수는 있습니다. 초저출생은 여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남녀 모두의 일입니다. 국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개인, 모든 세대의 일입니다. CBS는 연중기획 '초저출생: 미래가 없다'를 통해 저출산 대책의 명암을 짚고, 대한민국의 미래와 공존을 모색합니다. ▶birth.nocutnews.co.kr
이한형 기자
청년들이 '좋은 일자리'를 갖지 못하고 좌절 속에서 아이 낳기를 포기하는 현실을 지난달에 전해드린 바 있는데요.
이번엔 현실을 180도 뒤집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만약 좋은 일자리를 갖는다면 청년들은 다시 아이를 낳아 키우는 희망을 품어볼 수 있을까요?
물론 일자리 문제만 해결된다고 해서 초저출생이 바로 극복되지는 않습니다. 앞선 기획보도에서 지적했듯 초저출생 문제는 일자리와 주거, 경쟁 사회, 만혼과 비혼, 가구의 분화 등 다양한 요인에서 비롯됐으니까요. 다만 소득과 직결된 일자리는 저출생 문제를 해소할 근원적인 해법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돈이 있어야 아이를 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늙은 나라' 日, 출산율 반등한 이유는?
저출생 문제와 일자리의 관계를 이해하기에 좋은 사례가 마침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빨리 늙어가는 나라'인 우리나라 바로 옆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늙은 나라' 일본입니다.
1970년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일본은 1994년 '고령 사회'를 지나 2005년 이미 '초고령 사회'로 진입했습니다. 국제연합(UN)의 분류 기준에 따르면 65세 이상 인구비중이 7%를 넘을 때 '고령화 사회', 14%를 넘으면 '고령 사회', 20%를 넘으면 '초고령 사회'로 나뉩니다.
한국은 2017년 고령 인구 비중이 14.2%를 차지해 고령 사회로 들어섰고, 2025년이면 초고령 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고령화 과정을 약 20년 정도 일찍 경험했기 때문에 저출생 고령화의 원인이 무엇인지, 어떤 정책을 펼쳤는지, 해당 정책의 효과는 어땠는지 등에 대한 유의미한 답을 갖고 있습니다.
흔히 일본의 '저출생 충격'이 정점에 달했던 때를 90년대 말~2000년대 초라고 말합니다. 일본의 합계출산율은 1999년 시작된 1.3명의 늪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 헤어 나오지 못했고, 특히 2003~2005년에는 1.2명대까지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2010년대 전후로 반등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2012년 1.4명을 넘어서더니 2018년까지 1.4명대를 유지했습니다. 비결이 뭐였을까요?
일본이 저출생 문제를 특히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계기는 합계출산율이 1.57명에 달했던 1989년, 이른바 '1.57쇼크'였습니다. 이후 관련 대책을 꾸준히 추진했던 결과가 한 세대 가까이 지난 20여 년이 지나자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본이 추진했던 대책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일본은 지난해에도 '저출산사회대책기본계획'을 발표했는데, 그 핵심 중점 과제는 바로 청년이 미래의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고용환경을 정비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국회예산정책처는 지난 8월 발표한 '저출산 대응 사업 분석·평가' 보고서에서 일본의 청년 실업률과 합계출산율을 비교해 볼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합계출산율이 회복되는 동안 25~34세 실업률은 2011년 5.8%에서 2020년 3.9%로, 35~44세 실업률은 4.1%에서 2.5%로 각각 1.9%p, 1.6%p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를 살펴볼까요? 같은 기간 한국의 30~39세 실업률은 3.4%에서 3.5%로 큰 변화가 없었지만, 20~29세 실업률은 7.4%에서 9.0%로 1.6%p 증가했습니다. 반대로 합계출산율은 1.24명에서 0.84명으로 추락했습니다. 이같은 수치는 일자리 여부가 출산율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합니다.
괜찮은 일자리란? 정규직·중위소득·4대보험 보장
스마트이미지 제공 그렇다면
아이를 낳아 키울 만한 '괜찮은 일자리'란 어떤 일자리일까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지난해 내놓은 '일자리 안정과 저출산 대응 방안 연구' 보고서에서 ①
정규직이면서 ②
중위소득 이상의 소득을 얻고 ③
4대 보험이 보장되는 직업을 아이 낳기에 괜찮은 일자리라고 정의 내렸습니다.
'정규직'이라는 단어는 무엇과 비교하느냐에 따라 강조하는 의미가 다를 수 있는데요. 이 보고서에서는 주로 고용 안정성에 주목해 사용됐습니다.
'중위소득'은 모든 노동자를 소득 순서대로 한 줄로 세웠을 때 가장 가운데 있는 노동자의 소득을 뜻합니다. 중위소득 이상의 소득을 얻어야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중위소득에 못 미치는 노동자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정리하자면 괜찮은 일자리는 ①직장을 잃을 걱정 없이 안정적으로 일하면서 ②아주 부유하지는 않아도 평균 이상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소득을 벌면서 ③만약 직장을 잃거나 크게 다치는 등 어려운 상황에 놓여도 정부와 사회가 고용 안전의 울타리를 제공하는 일자리로 볼 수 있겠습니다.
사견을 덧붙이자면, 세 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하지 못하더라도 언제든 노력하면 더 좋은 직장으로 옮길 수 있다는 믿음과 가능성이 있다면 괜찮은 일자리에 근접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지금껏 정부가 추진했던 노동 정책들은 괜찮은 일자리를 늘려보려는 시도로 해석됩니다.
고용 안정에 초점을 맞췄던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필두로 최저시급 1만 원 달성, 전 국민 고용보험 및 산재보험 적용대상 확대, 실업자 재취업 등을 돕는 국민취업지원제도 등은 모두 위의 세 가지 요건에 딱 들어맞는 정책들이죠. 이에 더해 주 52시간제 정책은 개인이 자신의 시간을 확보하고 자기계발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정책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지난 대선을 돌이켜보면 여야 후보 모두 큰 틀에서는 정규직 확대와 최저임금 인상, 고용안전망 강화, 노동시간 감축 등을 지향점으로 삼았습니다. 소득이 보장된 정규직을 늘리자는 것은 5년 전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공감했던 목표였던 셈입니다.
정규직-비정규직 이분법 옛말…코로나19로 뒤집힌 노동시장
연합뉴스 그렇다면 새로운 대선을 눈앞에 둔 지금, 우리는 여전히 같은 지향점을 바라보고 있을까요?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분명히 예전보다 한발 앞선 진보적인 대안이었습니다. 단순히 노동시간, 고용기간 등 단순한 기준을 넘어 정규직화가 꼭 필요한 상시·지속적 업무를 중심으로, 특히 생명·안전 업무는 반드시 정규직을 채용하도록 업무의 질적 측면까지 들여다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노동시장에서 정규직 아니면 비정규직이라는 식의 이분법적 구분은 현실성이 떨어집니다. 법적 사각지대에 놓인 특수고용직(특고) 노동자와 플랫폼 종사자, 프리랜서 등 다양한 형태의 노동자들이 급증했기 때문입니다. 영세 자영업자 문제도 심각합니다.
현재 특고는 전국적으로 약 230만 명, 프리랜서는 약 400만 명 규모로 추정됩니다. 이 둘을 합하면 지난 8월 기준 1인 이상 사업체 종사자 수인 1885만여 명의 3분의 1에 달합니다. 어마어마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특고 노동자 등에 관한 정의와 규모는 여전히 불명확합니다.
특히 코로나19 장기화에 따른 경기 침체와 실업률 급증으로 인해 플랫폼 종사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점을 고려하면 정부의 관련 대책 마련이 시급해 보입니다.
지난해 12월 정부 발표에 따르면 전국 플랫폼 종사자는 단순히 플랫폼을 이용해 일한다는 넓은 의미로 해석했을 때 179만 명(취업자의 7.4%), 실제로 플랫폼에서 일거리를 받아 일한다는 좁은 의미로는 22만 명(취업자의 0.9%)으로 집계됐습니다.
또 지난 7월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이 통계청 자료를 분석했더니 본업 외의 일을 하는 '부업자' 수는 56만 6천 명으로 전년보다 19.1%나 급증한 것으로 드러났는데요, 이는 두 가지 이상 일을 병행하는 'N잡러'가 새로운 시대적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1인 영세 자영업자 중 부업을 가진 사람이 전년 대비 17.4%나 증가한 15만 5천 명으로 집계된 점도 눈여겨볼만합니다.
코로나19로 노동 시장 판도가 완전히 뒤집힌 상황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갈 지점이 있습니다. 플랫폼 종사자 등과 같은 새로운 일자리는 과연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있는 '괜찮은 일자리'에 해당하는가 여부입니다.
정규직? 당연히 아닙니다. 그럼 중위소득 이상의 소득을 올릴까요? 얼마나 많은 시간 일하느냐에 따라 소득이 갈릴 겁니다. 그래서 소득을 정형화할 수 없습니다. 4대 보험은 보장될까요? 전 국민 고용보험 로드맵에 따라 내년부터 퀵서비스와 대리기사 등 일부 플랫폼 종사자는 고용보험에 가입할 수 있지만 나머지 플랫폼 종사자는 여전히 4대 보험의 울타리 밖에 있습니다.
"노동 정책, 하던 대로 하면 망한다…확 바꿔야"
이한형 기자 이런 변화 속에 정부도 대응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지난 9월 제3기 인구정책 TF가 발표한 '다양한 고용형태 보호 방안'에는 지난 5년 동안 빠르게 변한 노동시장의 트렌드에 발맞춰 대응할 뿐 아니라, 아예 그동안의 고용·노동정책의 틀을 대폭 바꾸려는 계획이 담겼습니다.
예를 들어 우선 첫머리로 '플랫폼 종사자 보호법' 등 플랫폼 4법을 올해 안에 입법하겠다는 목표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그동안 외면받았던 청소년 노동자나 가사서비스 노동자, 특고로 분류되는 마트 배송기사, 택배기사 등을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도 제시됐습니다.
좀 더 야심찬 과제들도 눈길을 끄는데요. 예를 들어 산재보험 보호 대상을 '노동자'를 넘어 '일하는 사람'으로 확장해 그동안 산재보험 사각지대에 있던 사람들까지 아우를 수 있도록 관련 요건을 대폭 손 보기로 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동안 단순히 '임금근로자'와 '비임금근로자'로만 구분했던 종사상 지위 분류도 오는 12월쯤 바꾸고, 다양한 고용형태를 포용하도록 노동자 보호체계도 개편할 계획입니다. 업무 지휘 권한을 기준으로 독립 취업자(고용주)와 의존 취업자로 구분하는데, 이렇게 되면 기존의 특고와 플랫폼 종사자 등도 다른 노동자와 함께 의존 취업자로 묶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정부가 이처럼 특고, 플랫폼 종사자들을 고용·노동 정책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인 일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로 전환하면서 그동안 학계나 노동계에서 시급한 문제라고 강조했던 새로운 고용형태의 문제가 드디어 법과 제도의 테두리 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종진 선임연구위원은 "이제 일자리의 안정성은 한 회사에서 계속 일하는 '고용의 안정성' 범위를 벗어나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느냐'를 따지는 '직업의 안정성'을 묻도록 바뀌고 있다"며 "기존의 근로기준법 체계로 포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고, 학계나 대선 후보들도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일하는 사람'을 위한 새로운 정책, 제도, 법률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다만 이제 남은 관건은 이 대책이 정말 효과를 거둘 수 있냐는 것입니다. 김 선임연구위원은 "정부는 정책의 경로 의존성이 매우 심해서 과거 기준을 끌고 오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초단시간 노동자, 플랫폼 종사자를 과거 소득 기준으로 지원하는 등 기존 방식대로 준비하면 기존의 문제를 반복할 수 있다"며 "지금 변화한 고용 형태와 정책 취지에 맞게 원칙을 명확히 정하고 사회적 안전망, 사회보험 등의 체계를 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어 "특히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재난지원금을 지급할 때 건강보험을 기준으로 소득을 파악한 기준에 대해 상당한 논란이 일었는데, 이를 반복하면 안 된다"라며 "정부가 근거와 예산, 인력을 투입해 실시간으로 소득을 확인하고, 국민들 스스로 필요한 서비스 등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