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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관주의에서 이야기하는 희망은 희망이 아니다"



책/학술

    "낙관주의에서 이야기하는 희망은 희망이 아니다"

    신간 '낙관하지 않는 희망', 테리 이글턴 지음

     

    우리는 흔히 낙관주의적인 관점에서 희망을 이야기한다. '지금 비록 힘들고 어렵지만 앞으로는 잘 될거야', '희망을 갖는다면 언젠가는 이루어질거야', '희망은 맨 마지막까지 사는 법이야' 그리고 노력한다, 맹목적으로 아무런 근거도 없이. 또는 기적을 이야기하면서 내게도 기적이 올 것이라고 희망을 한다. '로또가 맞을 것이다'라고 희망한다. 과연 이것이 희망일까?

    신간 '낙관하지 않는 희망'의 저자 테리 이글턴은 이런 절망적인 희망을 허울에 싸인 희망이라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정확하게 이야기해서 희망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희망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우리는 희망을 소홀하게 다뤄왔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희망을 비굴하게 포기해왔기 때문이다. 희망을 포기하는 방법은 다양하였다. 그 중의 하나는 낙관주의라는 허울을 씌워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낙관주의에서 이야기하는 희망은 희망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괴롭히는 절망의 다른 형태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낙관주의에서 이야기하는 희망은 실현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희망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낙관적이다라고 이야기할 때 그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장미빛 안경을 쓰고 사물을 바라보고 장미빛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기대를 달성하기 위해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 또는 노력을 해도 전혀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낙관주의로 포장된 희망은 근거 없는 희망, 즉 절망이기 때문이다.

    알랭 바디우는 '비난을 불허하는 신학의 정통학설에서 희망은 확실성과 연관되며 신앙은 확신과 연관된다'고 말한다. 제인 오스틴이 소설 '설득'에서 희망을 "미래를 믿는 명랑한 확신"으로 지칭한 것도 그런 희망을 재현하는 것이다. 기독교 경전 '시편'은 '희망은 꺾이지 않으리라'고 장담하고 사도 바울은 '희망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어느 해설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관점에서 희망은 경솔한 낙관주의와 동떨어진 "확고부당한 신념과 설레는 확신"을 수반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희망이 '기원祈願하는 성질' 뿐 아니라 '실행하는 성질'도 겸비한다. 어느 현대 사상가는 희망을 "어떤 목적의 바람직함과 실현 가능성에 능동적으로 기여하는 헌신"으로 보면서 심리상태의 일종으로 간주하기보다는 오히려 활동의 일종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면 진정한 만족이 가능할 수 있다. 실행불가능한 것을 희망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파멸을 예방할 수 있다. 희망의 반대는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용감한 체념정신일 수 있다. 그렇게 때문에 쇼펜하우어는 '희망은 거짓 기대감들로써 평정심을 교란하는 악의 근원이다'고 생각한다. 만약 인간이 완벽해질 때까지 영생할 수 있다면 모든 결핍에서 해방되면서 모든 희망에서도 해방될 것이고 종국에는 모든 실망에서도 해방될 것이다.

    희망은 단순히 목적론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이 희망을 상실할 수 있다고 절망을 상실할 수는 없다. 비극과 마찬가지로 희망은 '인간이 짊어져야 할 운명'의 문제일 뿐 아니라 '인간이 운명과 맺어야 할 관계'의 문제이기도 하다. 인간은 적어도 '타인들이 나의 곤경을 보면서 교훈을 배울 수 있기'를 기대하는 희망을 언제나 미미하게라도 품을 수 있다. 더구나 희망은 문화나 교육 같아서 비록 희망을 상실한 인간도 자손에게 유산을 물려주듯이 희망을 물려줄 수 있다.

    결국 테리 이글턴이 감지하는 희망은 경박한 낙관주의에 오염된 희망을 정련하고 제련하는 것으로서 '희망과 욕망의 비극적 관계'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저평가되어온 희망의 가치를 상승시켜서 '희망과 절망의 역리적 관계'를 교차하고 융합한다. 그렇게 했을 때에만 이글턴이 이야기하는 "진정한 희망"의 여건을 조성하고 에른스트 블로흐의 허망과 낙관적인 희망에 대항하는 '값지고 현실적인 희망'의 조건을 구성할 것이다. 그렇게 생성되는 희망은 욕망과 비극과 절망을 엄밀하게 직시하면서 낙관하지도 절망하지도 않는 희망이 될 것이다.

    책 속으로

    대체로 희망은 욕망과 예상을 겸비한다. 인간은 욕망하지 않으면서 예상할 수는 있어도 욕망하지 않으면서 희망할 수는 없다. 훌륭하면서도 탐탁찮은 것(예컨대, 자신이 응원하는 최우수선수가 승리할지라도 그 승리가 분명히 응원하는 자신의 것은 아닌 것)을 희망할 수 있는 사람도 있고 유쾌하면서도 불쾌한 것(예컨대, 범죄자들에게 부과되는 형벌)을 희망할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욕망을 결여한 희망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절망은 희망을 부정해도 욕망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왜냐면, 제인 워터워스가 강조하다시피, 절망에 휩싸인 사람은 먼저 죽은 벗을 재회하고파서 현생을 포기하고 죽기를 열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125쪽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셸링이 비극적 희망에 관해 쓰듯이, "한 가지 할 일이 아직 남아있는데, 그것은 '어떤 객관적 세력이 우리의 자유를 파괴하려고 위협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서, 우리의 가슴에 이토록 견고하고 명확한 확신을 품고, 그런 세력에 대항하여 싸우며, 우리의 모든 자유를 발휘하여 그런 세력을 괴멸시키는 일이다."
    -256쪽

    설령 향후에 어떤 유토피아도 존재하지 않을 지라도, 유토피아가 '불화와 불만이 깨끗이 일소된 세계'를 의미한다면, 냉정한 현실주의는 '우리의 여건은 대폭적으로 개선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다. 그런 현실주의는 '만사형통하리라'고 믿기보다는 '만사는 충분히 형통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261쪽

    테리 이글턴 지음/ 김성균 옮김/ 우물이 있는 집/288쪽/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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