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설 '안' 사람들-시설 '밖' 사람들

'탈시설 성지' 스웨덴에서 찾는 장애인의 미래②-주거와 생활

  • 2020-11-11 04:45
문재인 정부는 출범 당시 장애인 탈(脫)시설 정책을 국정과제로 채택했다.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시설 중심의 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반면 유럽의 국가들은 일찍이 탈시설 자립 생활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특히 대표적 복지국가 스웨덴은 1997년 모든 장애인 수용 특수병원 및 요양 시설의 폐쇄를 결정하고 '탈시설 사회'로의 전환에 성공했다. 본 기획은 탈시설 이후의 삶을 살고 있는 스웨덴의 사례를 통해 장애인도 자립해 살 수 있으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려면 어떤 시스템이 구축돼야 하는지 제시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스웨덴에선 왜 어디서나 장애인을 볼 수 있을까
②시설 '안' 사람들-시설 '밖' 사람들
(계속)
나들이 나온 추경진씨. (사진=추경진씨 제공)

 

"하루를 살더라도 시설 밖에서 살아야겠다"
장애인 시설에서 15년 간 거주했던 추경진(52)씨가 '탈(脫)시설'을 결심했을 때의 심정이다. 추씨는 1997년 교통사고로 인해 척수손상 장애를 입게 됐다. 3년 간 병원 생활 이후 가족과 집에서 지내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설로 보내졌다.
그는 시설을 '감옥'이라고 정의했다. 먹으라면 먹고, 씻겨주면 씻고, 자라면 잤다. 밥맛이 없더라도 먹여줄 때 먹어야 했다. 저녁식사의 경우 때를 놓치면 12시간 이후(아침식사 주는 시간)에나 뭔가를 먹을 수 있어서다. 외출은 마치 이벤트 같았다. 1년에 두어 번 단체 영화관람 등을 하는 게 다였다. 추씨는 2001년 시설에 입소해 약 15년을 그렇게 살았다.
반면 태어날 때부터 탈시설 사회에서 살아온 스웨덴 장애인 사미라 메히디(Samira Mehidi)는 자유가 억압되는 기분을 잘 알지 못한다. 사미라는 척추파열과 간질이 있는 경증 발달장애인이다. 그런데도 그는 직장을 다니고, 취미생활을 즐기고, 크루즈 여행도 다닌다. 지역사회에서 비장애인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은 사미라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다.
그래픽=고경민 기자

 

◇시설 안, 그 무엇도 허락되지 않는…
시설 안의 일과는 단조롭다. 5시 30분 기상, 6시 아침식사, 12시 점심식사, 17시 저녁식사, 22시 취침. 나머지는 자유시간이다. 하지만 이름만 자유시간이라는 게 추씨의 증언이다. 식사 후 직원이 휠체어로 몸을 옮겨주면 멍하니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게 하루의 거의 전부다.
추씨는 "그냥 누워있기 싫으니까 휠체어에 앉아 있는 거다. 말상대가 있으면 그나마 얘기라도 하면서 말이다. 시설에 들어오고 나서부턴 추억이 없으니까 할 얘기도 옛날 얘기밖에 할 게 없다. 직원들은 저녁을 먹는 것을 도와준 뒤 퇴근한다. 그때 우리도 침대로 옮겨진다. 직원들이 출근하는 다음날 여섯시까지 침대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시설 안에선 인권침해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무시는 기본이고 언어폭력, 물리적 폭력까지 목격했다. '기저귀 값'이라며 돈을 갈취하는 시설장도 있었다. 추씨는 폐쇄적인 구조가 그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시설에만 처박혀 10~20년 살던 사람도 퇴소할 때 돈 한 푼 없이 나가는 경우를 많이 봤다"며 "그나마 장애인 연금이 (시설이 아닌) 장애인 앞으로 직접 들어오면서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시설 거주 당시 홍 할배라고 불리던 입소자가 있었다. 어느 날 홍 할배가 500원짜리 수 십 개를 쌓았다가 무너뜨리고, 쌓았다가 무너뜨리고를 반복하더라.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시설에서 30년 넘게 살면서 돈을 만지고 쓴 건 처음이라 너무 좋아서 그런다고 했다. 그만큼 시설에서 돈을 접할 기회는 없었다고 보면 된다"고 회상했다.
(사진=스마트이미지 제공)

 

시설에는 금기사항도 많았다. 남녀는 철저하게 분리됐다. 남녀가 잠깐 대화라도 나누면 시설장에게 즉각 보고됐다. 시설장은 해당 입소자에게 경고를 하거나 심하게는 휠체어도 타지 못하게 했다. 아예 움직이지 못하게 조치를 취한 것이다.
추씨가 시설에서 가장 분통이 터졌던 건 종교단체 등에서 단체 활동을 하러 올 때였다.
그는 "종교단체에서 기도를 하러 오는 날마다 우리는 동물원 속 원숭이가 돼야 했다"며 "시설장은 그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우리가 생활하는 곳곳을 구경시켰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손을 잡고 '불쌍해서 어떡하냐'며 대성통곡을 하기도 했다. 시설장의 목적은 뚜렷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단체들로부터 후원을 받는 것이었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그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2016년 1월 7일, 추씨는 시설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에게 이 날은 '자유를 되찾은 날'로 각인돼 있다. 그는 일정이 없는 날이면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골목 구석구석을 누빈다. 물론 휠체어에 몸을 싣고 말이다.
그는 "아직도 여기저기를 구경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원하는 곳으로 가고, 원하는 음식을 먹는 이런 일상이 내겐 너무 소중하다. 왜 그 오랜 시간 시설에 갇혀 있었을까 하는 후회도 가끔 든다"며 눈물을 삼켰다.
◇시설 밖,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이미 완전한 탈시설 사회에서 살고 있는 스웨덴 장애인들의 삶은 어떨까?
자폐증과 경증 발달장애를 앓고 있는 토비아스 앤더슨(Tobias Andersson)은 미디어5(Media5)라는 회사에서 예술 분야를 담당하고 있다. 그의 하루 일과는 비장애인들과 다르지 않다. 주중에는 회사로 출근하고, 휴일에는 친구들과 어울려 게임을 하거나 콘서트에 가기도 한다.
그는 "미술과 음악 작품 활동을 한다"며 "현재는 다른 사람의 음악을 연주하고 있지만 내 곡을 만드는 게 꿈"이라고 당찬 포부를 밝혔다.
토비아스가 일하는 '미디어5'라는 회사에서 진행 중인 예술 공연들. (사진=미디어5 제공)

 

척추 장애인 사미라 또한 일주일에 3회 출근을 하며 경제적 활동을 하고 있다. 퇴근 후엔 격일로 레저하우스에서 춤을 배운다. 휠체어를 탄 채로 춤을 추지만 그는 어느 누구보다 열정적이다. '불금'이면 밤 11시까지 갈고 닦은 춤 실력을 뽐내고 오는 경우도 있다.
휴가 때는 크루즈를 타고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사미라는 "크루즈 여행을 좋아한다"면서 "코로나 사태 이전에는 1박 2일로 핀란드 여행을 자주 갔다. 또 사촌이 살고 있는 아프리카 알제리에 비행기를 타고 가기도 했다. 물론 휴가 때마다 활동보조인도 함께 했는데 정부가 그들의 경비까지 모두 지원해준다"고 밝혔다.
이들이 이처럼 다채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건 장애인 서비스법(LSS)이 모든 일상을 뒷받침해줘서다. 이 법에는 주거시설, 고용 등과 관련된 지원뿐 아니라 개인적인 만남(친구와 동료), 산책·문화시설 방문, 여가 등과 같은 일상적 활동에 관한 도움 서비스까지 지원하도록 규정돼있다.
LSS가 지원하는 10가지 서비스의 목표는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등한 삶의 조건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자립생활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그래픽=고경민 기자

 

◇"옆집에 장애인이 사는 건 당연한 일"…장애인·비장애인 어우러져 사는 스웨덴
주거환경도 지역사회내 완전히 자리잡았다. 스웨덴 장애인들의 주거형태는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먼저 집단으로 거주하는 그룹홈(group residence), 장애인이 홀로 독립하여 생활하는 개인가정, 그룹홈과 개인가정 중간 형태인 서비스홈(service residence)이다.
한국에서도 볼 수 있는 그룹홈은 5명 내외의 장애인이 공동으로 생활하는 집이다. LSS법은 성인 장애인과 부모와 함께 살 수 없는 아동·청소년 장애인이 그룹홈에 거주할 수 있는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그룹홈 거주자들은 지자체로부터 경비를 지원받아 식사, 목욕, 청소, 이동, 조언 등과 같은 서비스를 받는다.
스웨덴의 그룹홈에는 활동보조 직원이 장애인 5명에 4명꼴로 상주한다. 한 그룹홈에 1~2명의 직원이 교대로 근무하는 한국의 상황과는 차이가 있다.
그룹홈에 거주하고 있는 사미라는 "스웨덴의 그룹홈에선 개인 활동이 가능하다. 장애인 1명 당 직원 1명이 붙는 것까진 아니지만 직원들과 조율만 하면 개인 활동도 문제없이 할 수 있다. 24시간 직원이 상주하고 있어 밤중에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인터뷰에 참여한 사미라. (사진=사미라 제공)

 

개인가정에 거주하는 장애인에게는 활동보조지원과 같은 요양 서비스를 제공한다. 장애인 1명 당 직원 1~2명이 붙으며, 장애인 당사자가 활동보조지원이 필요한 시간을 정부에 요청할 수 있다. 장애인에 대한 활동지원을 가족이나 친구가 제공하는 경우에도 지자체가 돈을 지불한다.
서비스홈은 개인가정과 그룹홈의 중간 형태다. 장애인들이 개인가정에서 거주하듯 홀로 독립해 살지만 이들을 돕는 직원이 구역별로 상주하고 있다. 장애인들은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전화를 하면 된다. 장애인 2명에 1명꼴로 직원이 배당돼있다. 서비스홈 거주자들은 상대적으로 도움이 덜 필요한 경증 장애인인 경우가 많다.
주목할 점은 그룹홈, 서비스홈, 개인가정 가릴 것 없이 모두 비장애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 곳곳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선 장애인, 노인 등 주거취약층을 대상으로 한 공공임대주택들은 주로 특정 지역의 특정 아파트, 그 중에서도 특정 동에 몰려 있는 경우가 대다수다.
시설 폐지 운동에 참여했던 인권운동가 리타 레나(Riitta-Leena Karlsson)는 "그룹홈이 처음 생길 때 어디에 지을지도 법에 명시돼 있었다"며 "사람들이 주로 모여 사는 곳이 그룹홈이 들어설 수 있는 조건이었고, 특정 지역이나 빌딩에 그룹홈을 몰아 짓지 못하도록 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우러져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스웨덴이 탈시설 사회를 택한 이유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화장실을 개조해 단 리프트. (사진=취재원 제공)

 

이외에도 스웨덴 정부는 장애인 주거지원을 위해 주택보조금(housing supplement), 주택수당(housing benefit) 등을 시행하고 있다.
주택보조금은 장애인의 개인 생활패턴에 맞게 주택을 개조할 수 있도록 보조금을 지원하는 제도다. 이 보조금은 장애인의 신체적 조건에 맞게 주택을 개조하는 것은 물론, 장애인의 건강을 고려해 보다 쾌적한 주택 만들기에도 쓸 수 있다.
한 장애인에 따르면 비장애인이던 시절 2층집에 살았는데 사고를 당해 장애인이 되자 정부가 주택보조금을 제공해 엘리베이터 설치 및 공사를 무료로 할 수 있었다.
주택수당은 자산에 따른 선별적 복지로 주거비용의 93%, 최대 월 5170크로나(약 70만 원)를 보장해주는 지원책이다.
보조금이나 수당 외에 중증 장애인을 대상으로 지원하는 공동주택도 마련돼 있다. 공동주택에 거주하는 중증 장애인들은 치료나 서비스가 필요한 경우 24시간 방문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다. 또한 소득조사를 통해 입주비가 소득의 20%를 초과하지 않도록 했다.
◇"시설에서 최고로 누릴 수 있는 건 생존뿐"
"시설에서 최고로 누릴 수 있는 건 생존뿐이다"
5년 간 시설 거주 경험이 있는 스웨덴 장애인 아돌프 락스카(Adolf Ratzka)의 증언이다. 그가 기억하는 시설은 진정한 삶(Real life)이란 존재할 수 없는 곳이다.
그는 "진정한 삶이란 내가 사랑하는 친구와 가족이 있는 곳에서 함께 어우러져 사는 것"이라며 "또 내 일상을 계획할 수 있는 삶, 사회에 무언가를 기여할 수 있는 삶, 원하는 관심사를 좇을 수 있는 삶이 진정한 삶"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시설에서는 생존할 뿐 살아있는 삶을 살 수 없다. 장애인에게도 의미 있고 풍부한 삶을 살 권리가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에서 탈시설을 택한 추경진씨도 "여전히 한국엔 '장애인은 시설 밖에서 자립할 수 없다'는 인식이 있다"며 "하지만 이는 기우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뿐이지 장애인도 지역사회에서 적응해 살아갈 수 있다. 나와 많은 장애인 동료들이 보여주고 있지 않느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우러져 사는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 본 기획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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