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는 출범 당시 장애인 탈(脫)시설 정책을 국정과제로 채택했다.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시설 중심의 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반면 유럽의 국가들은 일찍이 탈시설 자립 생활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특히 대표적 복지국가 스웨덴은 1997년 모든 장애인 수용 특수병원 및 요양 시설의 폐쇄를 결정하고 '탈시설 사회'로의 전환에 성공했다. 본 기획은 탈시설 이후의 삶을 살고 있는 스웨덴의 사례를 통해 장애인도 자립해 살 수 있으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려면 어떤 시스템이 구축돼야 하는지 제시한다. [편집자 주]
척수 장애인 안나 에크룬드가 휠체어에 앉아 요가 강습을 하고 있다. (사진=안나 제공)
척수 장애인 안나 에크룬드(Anna Eklund)가 오랜만에 라자 룬드 요가 강습실로 돌아왔다. 6개월 전만 해도 그는 비장애인이었다. 주말마다 요가 강습을 했던 안나는 척수경색으로 하지마비를 겪은 후에도 '휠체어를 탄 채' 사고 이전과 다름없이 수업을 진행했다.
그는 '나처럼 휠체어를 사용하거나 신체가 절단된 혹은 외상을 입은 장애인을 위해 수업을 하고 싶다'고 마음먹었다. 5개월의 준비 기간을 거친 뒤 그는 장애인을 위한 맞춤 요가(Adaptive Yoga)강사로 변신했다.
안나는 통증을 호소하거나 손상을 입은 많은 이들을 수강생으로 만났다. 누구나 접근 가능한 공간에 모여 어떤 사람은 휠체어에서, 또 다른 사람은 바닥에서 요가에 집중했다.
안나는 "제 학생들 절반 이상이 휠체어를 탄다"며 "각자 다양한 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매수업마다 워크숍 같다. 우리는 서로의 역량에 도전하고 기운을 북돋아 준다"고 말했다.
장애인을 위한 맞춤 요가(Adaptive Yoga) 수업을 듣는 사람들 (사진=안나 제공)
스웨덴에서는 어떤 직장이든 모든 고용주가 장애인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안나가 장애를 가지게 된 이후 휠체어를 타고도 평소처럼 수업을 맡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사업장에 장애인 직원을 위한 환경을 구축하는 것도 당연한 의무다.
장애인이 일하는 사업장에 문턱이 있다면 문턱을 없애고, 계단만 있다면 엘리베이터를 설치해야 한다. 시각장애인이 불편함 없이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비전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것도 같은 예다. 물론 이 비용은 정부와 지자체가 비용을 보조해준다.
◇일자리, 장애인 자립생활의 기본 조건...고용률은 '절반'
탈시설 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장애인 일자리 문제 해소는 필수다. 주체적인 삶의 조건에서 경제적 활동을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스웨덴 탈시설 운동가 리타 레나(Riitta-Leena Karlsson)는 "시설에서 나온다고 자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비장애인에게 돈을 벌고 쓰는 일이 당연하듯 장애인에게도 경제적 활동은 너무나 중요한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얘기할 때 가장 첨예한 갈등이 드러나는 분야가 바로 '일자리' 문제다. 비용과 효율성이란 자본주의 속성 안에서 장애인은 쓸모없는 존재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이같은 차별은 한국 장애인 고용 현황을 들여다보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래픽=고경민 기자)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장애인의 고용률은 전체 고용률(60.9%)의 절반 수준인 34.9%에 그친다.
장애인의 취업상 지위도 불안정하다. 상용근로자는 38.7%뿐이고 나머지는 일용 또는 임시 근로자(29%)이거나 무급가족 종사자(4.5%)다. 고용원이 없는 1인 자영업자는 21.8%다. 이처럼 질 낮은 일자리마저 '보호 고용(장애인을 배려한 고용의 형태)'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픽=고경민 기자)
반면 스웨덴은 장애인의 경제활동 참여율이 매우 높은 나라 중 하나다. 스웨덴 통계청은 지난해 기준 스웨덴의 장애인 인구 75%가 경제활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이 비율은 2013년부터 매년 높아지고 있다고 밝혔다.
◇장애인 '특별한 사람' 아냐…"'실력'으로 승부한다"
스웨덴의 고용정책을 이해하기 위해선 장애를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스웨덴에선 장애인을 '기능적 손상을 입은 사람'으로 여긴다. 장애가 그저 한 사람이 가진 손상 정도라는 사회적 인식이 전반적으로 형성돼 있기 때문에 장애인을 '특별 취급'하지 않는다.
스톡홀름에서 활동하는 기업 '미디어5(Medis5)'는 24명의 지적장애인이 모여 연극, 음악, 미술, 사진, 영화 등을 제작하는 예술 단체다. 각자가 가진 재능으로 작품을 만들어 무대를 꾸리거나 미술·영화 전시회를 열기도 한다.
미디어5의 마츠 에릭슨(Mats Eriksson) 대표는 CBS노컷뉴스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얼마 전 전시회를 마친 소속 예술인 페테 리그스타(Petter Wrigstad)의 그림을 소개했다.
미디어5 소속 작가 페테의 그림 (사진=미디어5 제공)
그는 "우리가 정한 원칙이 하나 있다"며 "작품을 공개하거나 대회에 출품할 때 절대 '장애인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밝혔다.
이어 "우리를 알릴 때 그냥 우리 공연을 보여주면 된다. 사람들도 우리 작품을 즐긴다. '장애인 단체'임을 내세울 필요가 전혀 없다"라고 강조했다. 그래야 관객 역시 시혜나 동정의 시선으로 자신들을 보지 않는다는 게 마츠의 설명이다.
미디어5 소속 직원들 (사진=미디어5 제공)
최근 이들은 스웨덴 공영방송사 SVT에 작품을 출품해 대중상을 받았다. 2016년에는 가장 우수한 성인교육 기관에게 준다는 '베스트 성인 교육상'을 타기도 했다. 두 상 모두 장애인 팀이라는 이유로 받은 상이 아니다. 오직 실력으로 탄 상이다.
미디어5의 비장애인 직원 마리타 조놀스(Marita Jonols)는 장애인 동료들과 협업하는 것에 대해 "나는 장애는 없지만 모든 걸 잘하는 사람은 아니다. 장애가 있는 나의 동료들 중 내가 못하는 걸 잘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에게 조언도 구한다. 장애인, 비장애인 할 것 없이 서로 도우면서 일하고 있다"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장애인·비장애인 함께 일할 수 있어야 좋은 사회"
(그래픽=고경민 기자)
스웨덴에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통합'된 사회를 구축하고자 노력한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인을 분리하거나 특별대우하지 않고, 일반 고용시장에 진입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1999년 스웨덴에서는 차별금지법을 제정해 노동시장에서 장애인이 차별당하지 않을 권리를 법제화했다. 이후 장애가 있는 노동자들도 비장애인 노동자와 함께 통합돼 같은 위치에서 일하는 문화가 형성됐다.
한국과 스웨덴 고용 정책의 큰 차이는 여기서 발생한다. 한국에서는 고용주나 기업에 할당된 장애인을 고용하도록 강제하고 이를 어길 경우 부담금을 물리는 '네거티브' 방식이다.
반면 스웨덴에는 '할당'처럼 선을 긋는 장벽 개념 자체가 없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경계 없는 채용 환경에서 어우러진다. 나중에 보니 장애인 채용이 많았을 경우 해당 기업에 추가적으로 고용보조금을 지원하는 '포지티브' 방식이어서 대비를 이룬다.
(그래픽=고경민 기자)
2006년 제정된 유엔 장애인권리협약(CRPD)에도 장애인의 노동에 대한 권리가 명시돼있다. 세계노동기구(ILO) 역시 장애인의 노동권을 강조한 바 있다.
스웨덴은 이들 조약에서 인정한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고용정책을 펴고 있다. 또 장애인 옴부즈만 제도를 통해 장애인 권리·이익과 관련된 이슈를 감시하고, 법률의 취약한 부분을 고치기 위해 로비활동을 하기도 한다.
◇장애인 고용 늘리려면?…'채찍'보단 '당근'
(그래픽=고경민 기자)
한국에서는 장애인 고용률을 높이기 위해 '의무(할당) 고용제'를 시행한 지 올해로 30년을 맞이했다. 의무고용제는 기업이 전체 인력 중 일정 비율 의무적으로 장애인을 고용하도록 강제한 제도다.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벌금 성격의 부담금을 내야 한다. 하지만 다수의 기업들은 장애인을 고용하기보단 부담금을 내는 쪽을 택한다.
(그래픽=고경민 기자)
반면 한국과 정반대 정책인 '비할당 고용제'를 펼치고 있는 스웨덴에선 의무고용제 같은 '채찍'을 쓰지 않고도 높은 장애인 고용률을 유지한다.
스톡홀롬시 노동시장청 라세 알레니우스(Lars Ahlenius) 부국장은 "스웨덴 정부는 장애인 고용을 이끌어내기 위해 '당근' 정책을 제시한다"고 했다. 사업주나 기업이 장애인을 채용하면 임금의 일정 부분을 보조해주는 '고용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고용 후 첫 1년은 고용주 부담을 없애기 위해 정부와 지자체가 임금을 전부 부담한다. 2년 차부턴 장애인 직원의 임금 50%를 국가나 지자체가 책임지고, 고용주는 나머지 50%만 내면 된다.
고용주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정책도 있다. 장애인 직원이 숙련될 때까지 시간이 걸리는 경우 그 시간에 대한 보상을 고용주에게 해주는 것이다. 장애인이 일할 때 필요한 기기나 부대비용도 지원해준다.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노동시장에 기여할 수 있다"
스웨덴 최대 국영기업 삼할의 직원들. (사진=삼할 제공)
장애인 고용 영역에서도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이 있다. 바로 중증 장애인이다. 스웨덴은 장애 정도가 심한 장애인들을 위해 보호 고용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이 보호 고용의 일환으로 설립된 '삼할'(SAMHALL)은 정부에 의해 세워진 국영기업으로, 소속 직원수는 스웨덴 내 기업 중 가장 많은 수준인 2만 6천 명이다.
국영기업이지만 민간기업과 운영방식이 같다. 장애인을 삼할 소속으로 고용 후 취업교육을 통해 다른 기업에 연계한다. 해당 장애인이 적응을 잘하면 1년 이후 삼할을 떠날 수 있다.
중증장애인을 고용해 취업교육과 일자리를 제공하는 스웨덴 국영그룹 삼할(사진=삼할 제공)
스웨덴 장애인 아크메드는 노인 요양원에서 일한다. 과거 자폐 스펙트럼 장애 탓에 구직에 실패했던 그는 이제 이 요양원에서 없어선 안 되는 존재가 됐다. 섬세한 감각과 뛰어난 기억력으로 요양원 내 모든 환자들의 약을 일일이 챙기고 있기 때문이다.
또 경찰서에서 근무하는 한 시각 장애인의 경우 상대적으로 예민한 청각 덕분에 속기 보고서 접수라는 천직을 찾게 됐다. 이 모든 사례는 스웨덴 국영기업 삼할의 수많은 취업 스토리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삼할은 버거킹, 이케아, DHL, 볼보 등 기업과 계약을 맺고 서비스를 제공한다.(사진=삼할 제공)
지난해 삼할에는 8193명이 취업했고, 1500명이 새로운 직장을 찾아 떠났다. 매년 수많은 장애인들이 삼할을 발판 삼아 새로운 직장으로 떠나고, 또 그만큼 많은 이들이 삼할을 다시 찾는다.
이런 선순환 구조 덕분에 유럽에서 '가장 지속 가능한 사업체(Europe's most sustainable business)'로 선정되기도 했다.
삼할의 알빈 팔크모어(Albin Falkmer) 홍보국장은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는 '이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이다. 이 사람이 어떤 장애가 있는지 혹은 무엇을 못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로 삼할은 입사시 장애인에게 어떤 문서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장애나 병명 등이 등록되면 이 사람의 가능성을 제한하게 되고, 편견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삼할 소속으로 고용된 장애인들은 더뎌도 계속해서 재교육을 받을 수 있고, 연계해줄 직장이 없더라도 해고되지 않는다"며 "우리의 운영 철학은 '모든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노동시장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 본 기획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