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이는 왜 양부모 학대를 벗어나지 못했나

4일 경기도 양평군 하이패밀리 안데르센 공원묘지에 안치된 정인이의 묘지에 시민들의 추모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이한형 기자

 

'걸어봐'
사망 하루 전인 지난해 10월 12일. 피멍이 든 정인이의 작은 다리는 이미 골절된 상태로 부들거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양부는 어린이집 선생님들을 의식이라도 한 듯 걸음마를 요구했다. 몇 개월전 학대의심 신고를 한 선생님들 앞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마치 '정인이는 괜찮다'는 무언의 시위로도 보였다.
하루종일 선생님들 품안에서 밥도 먹지 않고 축쳐져만 있던 정인이는 양부의 요구에 힘없이 걸어가 품에 안겨 집으로 돌아갔다. 양부에게 몸을 맡긴 정인이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4일 경기도 양평군 하이패밀리 안데르센 공원묘지에 안치된 정인이의 묘지에 시민들의 추모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이한형 기자

 

자신이 활동하는 온라인 카페에 '전 둘째를 방치합니다'는 글을 올렸던 양모는 정인이 사망 당일 이미 심정지 상태인 아이를 병원에 데려간다며 구급차 대신 배차가 어려운 콜밴을 불러 시간을 지체했다.
특히 심폐소생술을 하는 사이 어묵을 공구(공동구매)하는 글에 '입금완료'라는 댓글을 달았고, 정인이 사망 이틀 뒤 식기세척기 설치를 문의하는 등 이중성을 보이기도 했다.
아이가 췌장이 끊어지는 고통 속에 사망했지만, 의혹해명에 급급한 나머지 슬퍼보이지는 않았던 양부모들. 정인이는 왜 그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을까.
◇아이 살릴 3번의 기회 날린 경찰…전문성 부족 이유는?
황진환 기자

 

'5월 25일, 6월 29일, 9월 23일'
정인이에겐 3번의 골든타임이 있었다. 아동학대를 의심했던 선생님들과 시민, 소아과 의사의 신고가 바로 그것이다.
신고는 그러나 모두 묵살됐다. 특히 3차례나 아동학대 신고가 있었음에도 수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학대 증거를 찾지 못하고 매번 정인이를 양부모에게 돌려보냈던 경찰에 대한 비판이 매서운 까닭이다.
양모 장모씨가 지난해 11월 19일 서울 양천경찰서에서 검찰로 이송되고 있다. 박종민 기자

 

일각에선 아동학대 사건을 직접 조사하는 학대예방경찰관(APO)의 전문성이 부족했던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번 사건의 경우에도 정인이를 양부모에게 돌려보낸 것은 APO와 아동보호기관의 조치였다.
경찰조직 내에서 APO는 대표적인 기피보직이다. 아동학대 사건은 피해자가 의사표현을 못하는 경우가 많아 증거수집부터 까다롭기 때문이다.
연합뉴스

 

아울러 APO는 노인과 장애인 학대 사건까지 함께 처리하고 있어 업무피로도가 상당하다는 점도 기피보직으로 꼽히는 배경이다.
경찰청에 따르면 전국의 APO는 669명으로 경찰서마다 평균 2~3명 배치돼 있는데, 고질적인 인력난으로 한 명당 가정 40~50곳을 도맡을 만큼 업무가 과중하다.
경찰 관계자는 "기피보직인만큼 APO 대다수는 1년가량만 지나면 다른 보직으로 옮기는 것 같다"며 "보직을 맡더라도 주로 순경, 경장 등 막내급이 보직을 맡는 경우가 많다. 업무피로도가 높은데 이번처럼 국민적 질타를 받을 수 있는 보직을 누가 선뜻 맡으려 하겠나"고 전했다.
◇격리가 됐어도…다시 집으로 돌아갔을 정인이
그래픽=고경민 기자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지난해 1월 계모 B(당시 31세)씨는 언어장애 2급 장애를 갖고 있던 A군(당시 9세)이 시끄럽게 돌아다닌다는 이유로 찬물이 담긴 욕조에 1시간동안 앉아있게 하는 등 학대를 해 숨지게 했다.
A군 사망 1주일 전 아동보호전문기관 관계자가 이 집을 방문했지만 아이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앞서 A군은 지난 2016년 2월과 5월 학대를 당해 부모와 격리된 바 있었다. 그러나 2년뒤 초등학교 입학시기가 되자 "학교에 보낼 나이가 됐으니 잘 키워보겠다"는 부모에게 인계됐고 결국 짧은 생을 거뒀다.
그래픽=안나경 기자

 

정인이 사건 이전 아동학대로 국민적 공분을 샀던 인천시 미추홀구 계부의 의붓아들 살해사건도 마찬가지다. 계부 C씨(당시 27세)는 의붓아들인 D군(당시 5세)의 손발을 케이블로 묶고 20시간 넘게 얼굴과 팔다리 등 온몸을 목검으로 때려 숨지게 했다.
과거 학대로 인해 2년 넘게 보육원에서 생활하던 D군을 집으로 데리고 온 지 한 달 만에 살해한 것이다.
4일 경기도 양평군 하이패밀리 안데르센 공원묘지에 안치된 정인이의 묘지에 시민들의 추모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이한형 기자

 

이처럼 격리가 됐어도 시간이 흐른 뒤 학대 피해 아동들이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근본 이유는 뭘까. 바로 '아동을 가정에서 분리해 보호할 경우 신속히 가정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현행법(아동복지법 제4조) 때문이다.
아동이 되도록 가정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는 법이 되레 아이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셈이다.
그래픽=고경민 기자

 

보건복지부의 '2019 아동학대 연차보고서'에 따르면, 일년간 접수된 아동학대 사례는 3만 45건으로 전년보다 22.2%나 증가했다.
학대로 인해 일년간 사망한 아동은 총 42명이었다. 사망 아동이 가장 많은 연령대는 0~1세(45.2%)로 신생아·영아가 가장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동학대의 75.6%는 양부모와 계부모를 포함한 부모에게서, 79.5%는 '가정 안'에서 발생했다. 그럼에도 학대를 당한 아동이 가정에서 분리되는 사례는 12.2%에 그쳤고, 83.9%는 원래의 가정에서 계속 생활했다.
이러다보니 재학대 사례는 3431건으로 전체의 11.4%에 달했다. 건조한 숫자들의 뒤편에서 제2, 제3의 정인이가 지금 이 순간도 울며 신음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4일 경기도 양평군 하이패밀리 안데르센 공원묘지에 안치된 정인이의 묘지에 시민들의 추모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이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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