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환 기자
검경수사권 조정과 경찰개혁에 따라 신년 맞이 '잔치상'을 차렸던 경찰이 새해 초입부터 삐걱대는 모양새다. 정인이 사건, 이용구 사건, 박원순 사건까지 최근 여론의 관심이 집중된 수사들이 줄줄이 '부실' 논란에 휩싸이면서 새롭게 내세웠던 '책임수사'와 '국민신뢰'가 무색한 분위기가 됐기 때문이다.
1차 수사종결권 확보와 국가수사본부 신설 등으로 수사 역량이 시험대에 오른 상황에서 신뢰 회복을 위한 내부 체질개선과 강도 높은 쇄신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수사권조정·경찰개혁 자축한 경찰…'정인이 사건' 여론 공분 직격타"범죄 피해의 최소화와 회복에 방점을 두는 국민중심 책임수사를 경찰 수사의 정체성으로 삼아 공감·공정·인권 수사를 체질화해 나간다면 국민은 수사권 개혁의 혜택을 피부로 실감하며 아낌없는 박수와 신뢰를 보내줄 것입니다."김창룡 경찰청장은 지난 1일 새해 인사를 통해 수사권조정과 경찰개혁을 맞는 '원년'을 이같이 평가했다. 올해부터 시행된 수사권조정에 따라 경찰은 1차 수사종결권을 얻는 등 힘이 강화됐다. 아울러 경찰개혁으로 국가수사본부, 자치경찰제가 도입되며 덩치 역시 불어났다.
김창룡 경찰청장이 11월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제2세미나실에서 열린자치경찰제 도입방안 국회토론회에 참석해 개회사를 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
자축 분위기로 경찰의 신년이 시작됐지만, 여론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다. 지난해 말부터 주요 사안에 대한 경찰 수사가 잇따라 '부실' 논란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특히 16개월 영아인 '정인이' 학대 사망 사건이 여론의 공분을 사며 경찰 신뢰를 저해시킨 결정타가 됐다.
경찰은 정인이 학대 신고를 지난해 5월과 6월, 9월까지 세차례나 접수했으나 그때마다 내사종결이나 혐의없음으로 처분한 것으로 드러났다. 1차 신고가 있었던 5월 당시 정인이가 다녔던 어린이집 측에서 멍과 상처 등 학대 정황이 담긴 다수 사진을 증거자료를 제출했지만, 경찰은 양부모의 말을 믿고 사건을 마무리한 것으로 파악됐다.
2차 신고가 들어왔던 6월 말에는 '양모가 피해아동을 차량에 방치하는 것 같다'는 증언이 있었다. 하지만 경찰은 차량위치를 파악한다며 14일을 보냈다. 7월 말 발생장소 인근 학원 방문조사에 나섰지만 폐쇄회로TV(CCTV) 등 증거확보엔 실패했다. 결국 사건은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됐다.
3차 신고가 있었던 9월 말에는 정인이를 진찰한 소아과 의사가 입 안 상처 등 학대 정황을 파악하고 경찰에 알렸다. 하지만 경찰은 "신체의 상처 등 학대 정황을 발견할 수 없다"며 아동보호전문기관(아보전)에 다른 병원에 데려가 진찰을 받게 했다. 아보전은 양부와 함께 다른 소아과에 방문했고, 해당 병원은 '구내염'으로 상처를 판단했다. 경찰은 양부모가 격한 반응을 보인다며 '분리 조치'도 하지 못하고, 학대로도 보기 어렵다며 사건을 종결했다.
그리고 약 보름이 지난 10월 13일 정인이는 서울 양천구의 한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추후 수사 결과, 정인이는 입양 한 달 뒤부터 학대를 당한 것으로 조사됐으며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부검 결과, 췌장절단 등 복부 손상, 전신 피하출혈, 7군데 이상의 골절 흔적 등이 드러났다.
4일 경기도 양평군 하이패밀리 안데르센 공원묘지에 안치된 정인이의 묘지에 시민들의 추모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이한형 기자
경찰은 양부모에 대한 수사에 나서 양모 장모씨를 아동학대처벌법상 아동학대치사 등의 혐의로, 양부 안모씨를 방임 등의 혐의로 기소의견을 달아 각각 구속‧불구속 송치했다. 또 사건을 담당한 경찰관들을 대상으로 '주의', '경고' 등의 징계를 내렸다.
지난해 뒤늦게라도 조치를 취했다며 '한숨'을 돌린 경찰 내부에선 연초 이 사건이 다시 논란이 되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당시 여론의 뭇매를 맞은 뒤, 수사와 감찰을 통해 옷깃을 다시 여미고 제대로 해보려고 하는데 굉장히 당황스러운 입장"이라며 "예방 활동과 보호 지원 체계, 경찰과 아보전, 지자체와의 연계 시스템 마련, 입법 부분을 종합적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김창룡 청장은 사안의 심각성을 인식한 듯 최근 내부 회의에서 "사건 하나하나를 정말 정성되게, 국민의 눈높이에서 성의있게 대응해야 한다"며 "아니면 이런 사고가 바로 터져버린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경찰은 사태 진정을 위해 여러 대책을 모색하고 있지만, 여론의 공분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아동학대 방조한 양천경찰서장 및 담당경찰관 파면을 요구합니다'라는 청원 동의는 5일 하루만에 20만명을 돌파했다.
◇이용구, 박원순 수사까지 '부실' 논란…"강도 높은 쇄신해야'
이용구 법무부차관이 5일 국회에서 열린 법안심사제1소위원회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
경찰 수사에 대한 여론의 비판은 '정인이 사건'으로 폭발한 모양새지만, 앞서 신뢰 하락에 대한 조짐은 여럿 포착됐다. 이용구 법무부 차관의 택시기사 폭행 사건에 대한 '봐주기' 의혹이 불거진 것이 대표적이다.
앞서 이 차관은 변호사 시절인 지난해 11월 6일 서울 서초구 아파트 자택 앞에서 택시 기사가 술에 취한 자신을 깨우자 멱살을 잡아 폭행했지만, 경찰은 입건하지 않고 '내사종결' 처리해 논란이 일었다.
경찰은 택시 기사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전했고 폭행 혐의가 반의사불벌죄이기에 이 같이 마무리했다고 해명했지만, 운전 중인 자동차 운전자 폭행을 가중처벌하는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5조 10항'을 적용하지 않아 '봐주기'를 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지난해 한국 사회를 뒤흔든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에 대한 경찰 수사도 '부실' 논란이 일기는 마찬가지다.
전담 TF를 꾸려 수사관 46명을 투입해 5개월 간 5개 혐의를 수사했지만, 성추행 의혹은 '공소권 없음'으로 서울시 관계자 방조 의혹은 '불기소(혐의없음)' 등으로 마무리하며 총 '2장'의 처분 결과를 발표했다. 다음날 검찰이 박 전 시장 '성추행 피소 유출 의혹'에 대해서만 '6장'의 수사 결과를 공개한 것과 대조를 이루며 미흡한 수사라는 지적이 나왔다. 검찰 발표에는 또 박 전 시장이 피소 사실을 접한 당시 일부 반응도 포함되며 경찰 수사보다 한 발 더 나아갔다.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발인식이 열린 지난해 7월 13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운구 차량이 서울시청으로 향하고 있다. 박종민 기자
정인이 사건과 이용구 사건, 박원순 사건까지 공통점은 검찰 수사를 쳐다볼 수밖에 없게 스스로 상황을 끌고 갔다는 점이다. 검찰은 정인이 사건의 경우 양부모에 대한 살인죄 적용을 검토하고 있다. 이용구 사건은 재수사 및 사건 담당 경찰 수사까지 검찰이 키를 잡고 있어, 경찰은 자체 감찰이나 재수사를 보류하고 있다. 박원순 사건의 진상규명은 검찰 몫으로 남았다. 수사권 조정 국면에서 검찰과 동등한 협력 관계를 자신했던 경찰로서는 뼈 아픈 대목이다.
◇"지휘관 믿고 적극적으로 일할 수 있는 책임수사 여건 필요"경찰 신뢰 하락과 수사권 조정에 대한 우려에 대해 김 청장은 "이의신청, 재수사요청 등 사건관계인과 검사가 경찰수사를 통제할 수 있는 여러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며 "경찰은 수사권 개혁 입법 및 내‧외부 통제장치 마련을 통해 앞으로 경찰 종결사건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더욱 강도 높은 내부 체질 개선과 쇄신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건국대 한상희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기존부터 경찰 조직 규모는 상당했기 때문에 시민사회의 견제, 견고한 통제 시스템 마련은 항상 대두돼 왔다"며 "이것이 계속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어중간한 상태라 정인이, 이용구 사건 등 문제가 불거져 나온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앞으로 경찰 조직과 권력은 더욱 커질텐데, 이제라도 제대로 된 통제장치 등 시스템 마련이 필요하다'라고 덧붙였다.
연합뉴스
한편 조직 내부의 비리 등 잡음은 수사권 조정 국면에서도 계속 불거져왔다. 울산경찰서 간부 경찰관은 지역 전세버스업체 수사와 관련, 수사 상황을 지인에게 알려 준 혐의(공무상비밀누설)로 지난 4일 재판에 넘겨졌다. 앞서 지난해 10월에는 협력업체 대표에게 수사 기밀을 누설한 혐의로 고위직을 포함한 경찰 간부 4명이 불구속 기소되기도 했다.
사건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려는 조직 분위기, 적극성을 띄었다가 오히려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인식, 책임을 지지 않고 떠넘기려는 지휘 체계 등도 점검해봐야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인이 사건'을 본 한 아동학대 사건 담당 경찰관이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올린 글은 화제가 됐다. 이 경찰관은 "학대로 판단해 부모와 아이를 분리했는데 민원과 고소 남발로 2년을 쉬게 됐다"며 "그때 나를 감싸주는 윗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밝혔다.
또 다른 경찰 관계자는 "일선에서는 적극성 있게 수사를 하고 싶어도 혹시 모를 피해를 고스란히 볼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기 마련"이라며 "지휘관을 믿고 일할 수 있는, 경찰 개개인이 책임수사를 구현할 수 있는 조직 문화가 자리잡혀야 한다"고 밝혔다.{RELNEWS: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