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가야고분군'을 비롯해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석굴암, 팔만대장경, 직지심체요절(직지), 숭례문, 창덕궁, 훈민정음, 동의보감 등 선조들이 물려준 위대한 문화 유산들은 적지 않습니다. 이중 으뜸은 '훈민정음' 즉 한글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네. 오늘은 10월 9일 훈민정음 창제를 기리는 국경일 '한글날'입니다.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지배계층인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던 문자와 지식의 세계를 일반 백성에게 열어주기 위해 만든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표음문자입니다. 1443년에 창제하고 1446년에 반포했습니다.
1940년 경북 안동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면서 한글은 만든 인물·시기·목적·원리를 확실히 알 수 있는 문자입니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1894년 고종이 한글을 공식 문자로 선포한 '국문선포'로 인해 '한글'은 창제 이후 약 450년만에 나라의 공식 문자로 인정받게 됐습니다. 이후 한글 연구자들에 의해 가로쓰기, 띄어쓰기 등 한글 사용에 관한 여러 의견과 연구를 했습니다.
'한글'이라는 명칭은 1908년 주시경 선생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국어연구학회'가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조선언문회'(배달말글몯음)으로 이름을 고친 후 1913년에 다시 이름을 '한글모'로 고치면서 '한글'이라는 이름을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1927년 '한글'이라는 동인지를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됐습니다.
띄어쓰기를 처음으로 사용한 문헌은 1877년 영국인 목사 존 로스가 쓴 '조선어 첫걸음'(Corean Primer)입니다. 1896년에 주시경, 서재필, 미국인 선교사 허버트 등이 만든 '독립신문'이 간행물로는 한글 최초로 띄어쓰기를 사용했습니다. 이후 1933년 조선어학회(조선어연구회)가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하면서 띄어쓰기가 보편화 되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 자음 17자, 모음 11자로 모두 28자였는데 모음 'ㆍ'(아래아) 1개와 자음 'ㆁ'(옛이응), 'ㆆ'(여린히읗), 'ㅿ'(반치음) 3개가 사라지면서 현재 자모는 모두 24자입니다.
'ㆍ'(아래아)는 소실된 명확한 해설은 아직 없고 'ㆁ'(옛이응)은 소리는 그대로 남았지만 초성에 쓰이는 'ㅇ'과 별 구분이 없어 사라졌다고 추정됩니다. 'ㆆ'(여린히읗)은 훈민정음 창제 당시부터 거의 사라졌으며, 한자와의 연동을 위해서만 일부 사용됐고 'ㅿ'(반치음)은 'ㅅ'이나 'ㅇ'의 의미로 병합됐습니다.
자음의 기본 글자 'ㄱ', 'ㄴ', 'ㅁ', 'ㅇ', 'ㅅ'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는 점에서 한글은 과학적입니다.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 'ㄴ'은 혀가 윗잇몸에 닿는 모양, 'ㅁ'은 입술, 'ㅇ'은 목구멍, 'ㅅ'은 이빨 모양에서 본떠 만들었고 나머지는 그것을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체계적입니다. 즉 기본 자인 ㄱ에 획을 더해 ㅋ을 만드는 식입니다.
모음의 경우도 '하늘, 땅, 사람'을 형상화한 'ㆍ', 'ㅡ', 'ㅣ'를 기본 글자로 하고, 나머지는 기본 자에 획을 하나씩 더하거나 조합해서 만들었습니다.
한글은 자음과 모음 24자로 이루어진 음소 문자라 다양한 소리를 표기할 수 있어서 외국어와 자연의 소리를 적는 데에도 편리하고, 문자의 디지털화에도 유리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깨우치고, 어리석은 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고 정인지가 쓴 훈민정음 서문처럼 배우기 쉬운 한글 덕분에 문맹은 찾아보기 힘들고 산업과 문화가 크게 융성하는 대한민국이 되었습니다.
일제시대 초기 대한민국 문맹률은 90%가 넘었습니다. 광복 후 '우리나라 말과 글을 배우자'는 문맹 퇴치 운동으로 광복 직후 77.8%에 달했던 문맹률은 1970년에 7%로 급감했고 현재는 대한민국의 문맹률은 1%이하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한글을 못 읽고 쓰는 국민이 거의 없다는 소리입니다.
문해률은 교육부가 2021년에 발표한 제3차 성인문해능력조사 결과에 따르면 2020년 성인의 문해율은 79.8%로 2017년 대비 2.2% 상승했습니다. 연령이 높을수록, 월 가구소득이 낮을수록, 학력이 낮을수록, 농산어촌에 거주할수록 낮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런 한글의 우수성은 대한민국 국민이 인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언어학계에서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언어연구학으로 세계 최고인 영국 옥스퍼드대의 언어학대학에서 세계의 모든 문자를 놓고 합리성, 과학성, 독창성 등의 기준으로한 순위에서 한글이 당당히 1위를 차지했습니다. 또 유네스코가 1998년부터 2002년까지 말뿐인 언어 2900여 종에 가장 적합한 문자를 찾는 연구를 진행했는데, 최고의 평가를 받은 것 역시 한글이었습니다.
"한글은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이다" -영국의 문화학자 존맨-
'돌민정음'…한글은 쉽지만 한국어는 어려워
hey jude don't make it bad, take a sad song and make it better
(헤이 쥬~ 돈 메이킷 뱃~, 테이커 샛 쏭↗ 앤 메이킷 베러↘~~)
이 처럼 과거 우리는 팝송 가사를 한글 발음으로 적으며 외우던 시절을 지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나라의 문화 콘텐츠가 세계에 널리 알려짐에 따라 한글 역시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높아지고 드라마나 노래 가사를 해석하기 위해 한글을 배우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음악시장 분석업체 루미네이트가 발표한 2023년 중간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스트리밍(음원+영상) 상위 1만 곡 통계에서 한국어 음원 비중은 3.1%로 영어, 스페인어, 힌디어에 이어 4위를 기록했습니다.
세계 80억 인구 중 한국어를 쓰는 인구의 비율이 0.6%임을 감안하면 전세계 음악 시장에서 한국의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 가수의 팬덤들은 상당수의 한국 낱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를 아이돌(Idol)의 '돌(dol)'과 훈민정음을 합쳐 만든 합성어 '돌민정음'이라고 부릅니다.
돌민정음은 한국에서 통용되는 느낌을 살려 '오빠'(oppa), '언니'(unni), '애교'(aegyo), 'yeonseupseng'(연습생), '먹방'(mukbang), '치맥'(chimaek)등 영어 알파벳을 빌려 한국어 발음을 옮겨 적습니다.
이렇게 생존한 '팬덤 단어' 중 일부는 공식 단어로 등재되기도 합니다. 지난 2021년 옥스퍼드영어사전에 추가된 26개 단어를 살펴보면, '먹방'(mukbang)과 '치맥'(chimaek) 등과 같은 낱말은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등재돼 있지 않은 단어들입니다.
'먹방'은 국립국어원이 만든 로마자변환법을 따랐다면 'meokbang'로 표기되는 게 맞지만 외국인들이 발음하기 쉬운 철자로 썼습니다. '언니'(unni)와 '누나'(noona) 역시도 공식 표기법과는 거리가 떨어져 있습니다.
이 처럼 한류의 중심에 한글이 있습니다. 글로벌 언어 학습 애플리케이션 듀오링고의 '2022년 언어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6월 기준 한국어를 학습하는 이용자 수는 총 1070만여명으로, 전년 대비 29% 증가했습니다.
이는 듀오링고 내 5억여명의 학습자 중 7번째로 많은 수준입니다. 1위 영어에 이어 스페인어·프랑스어·독일어·일본어·이탈리아어 순이었습니다.
한국어 교육을 제공하는 국가도 해마다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2020년은 한국어가 해외 각지에서 제2외국어로 공식 채택되면서 관련 학습 수요가 증가했습니다. 인도를 비롯해 러시아 등 총 9개의 신흥국이 한국어를 현지 초·중학교 정규 교육과정에 포함했습니다.
교육부 자료에 따르면, 2021년말 현재 한국어를 선택 과목으로 채택한 곳은 총 42개국의 1806개 초·중학교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019년에 30개국에 불과 했지만 3년만에 40%나 증가했습니다.
올해 1월 기준으로 한국어를 대입시험의 외국어 선택 과목으로 도입한 나라는 일본, 프랑스, 호주, 뉴질랜드, 베트남, 태국, 스리랑카, 우즈베키스탄 등 총 8곳에 달합니다. 2025년에는 홍콩 대학 입학시험에 한국어 과목이 추가되고, 대입시험 성적으로 한국어능력시험(TOPIK) 성적이 처음으로 공식 활용될 예정입니다.
한국어능력시험 시행 국가와 지원자는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시행 국가는 2014년 66개국에서 지난해 81개국으로, 같은 기간 지원자는 20만여명에서 35만여명으로 15만명이 증가했습니다.
정부가 운영하는 세종학당은 처음 개설한 2007년에는 3개국, 13개소였지만 2023년 페루와 아이슬란드 등 16개국에 19곳을 신규 지정해 전 세계 85개국 248개소에서 한글과 한국어를 배울 수 있게 됐습니다.
첫 개설 당시 740여명의 학생을 가르쳤던 세종학당은 지난해 처음으로 10만명을 넘어 11만 7636명으로 집계됐습니다.
정부는 촘촘한 한국어 공급망 구축을 위해서 세종학당을 통해 권역별 세종학당 운영기관 발굴과 컨설팅 등을 지원하고 2027년까지 세종학당을 전 세계 350개소로 확대할 계획입니다.
한글은 한 두 시간이면 깨치지만 한국어는 쉽게 배울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한국어는 조사가 다양하고 어미 변화가 많은 데다 존대어법이 까다롭기 때문입니다.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은 하나같이 어렵다고 털어놓습니다. 서구 문화권 특히 미국 국무부 소속 외교연구원은 한국어와 중국어, 일본어, 아랍어를 가장 배우기 어려운 언어인 '난이도4'로 분류하기도 했습니다.
국어학자는 한국어 동사 변화가 무려 60~70가지나 돼 외국인들이 배울 때 큰 어려움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가령 '좋아하다'라는 동사는 좋아해, 좋아하니, 좋아하네, 좋아하겠어, 좋아하시네 등으로 어미가 변화무쌍해 배우기 어렵다고 합니다. 또 한국어에 한자나 일본식 표현이 많은 것들도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신조어' 세종대왕님이 보시면 정말 노하실까?
1990년대에 나온 '오렌지족', '야타족', '명태', 2000년 초반에 나온 '방가방가', '하이루', '캡짱', '깜놀' 등 여러분들은 어떤 신조어에 멈춰있나요?
2017년쯤에 유행했던 '댕댕이'(멍멍이), '머통령'(대통령), '커여워'(귀여워), '머전팡역시'(대전광역시), '세종머앟'(세종대왕) 등 같이 비슷한 모양의 한글 자모를 이용해 단어를 조합하는 방식인 일명 '야민정음'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SNS 등에서 많이 쓰였습니다.
이용자가 늘면서 야민정음의 일부 단어는 번역 서비스도 인식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구글 번역기에 '댕댕이'을 입력하면 'dog'로 '머통령'을 입력하면 'president'로 올바르게 번역이 됩니다.
또한 온라인을 통한 의사소통이 확대되면서 의미를 전하는 데 드는 시간과 에너지를 줄이기 위해 '줄임말'도 우후죽순 생겼습니다. '별다줄'(별 것을 다 줄인다)이란 말까지 생길 정도입니다.
동영상 플랫폼과 SNS가 유행의 트렌드를 주도하는 만큼 이곳에서 신조어가 빠르게 생성되고 전파되고 있습니다. 순발력 있는 표현과 재미를 주며 직관적인 소통을 원하는 신세대들에게 신조어는 가장 좋은 소통의 언어들입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변화와 새로움을 추구하는 신세대는 늘 있었기 때문에 신조어는 지금도 생기고 사라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신조어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어제의 신조어는 흥미와 재미를 잃어 서서히 소멸합니다.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2005~2006년 사용됐던 신조어 938개 중 10년 뒤인 2015년까지 총 20회 이상, 연평균 1회 이상 매체에서 여전히 사용되는 단어는 250개(26.6%)에 불과했습니다. 신조어 10개 중 7개는 10년 안에 소멸한 것입니다.
신조어 대부분이 특정 연령층(10~20대)이 사용하는 언어로 세대 단절 현상, 부모와 자녀간 언어장벽을 만든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신조어 뜻 대부분을 모르는 기성세대의 경우 젊은 세대보다 더 부정적으로 인식했습니다.
과거 온라인설문조사업체 두잇서베이가 조사한 결과 신조어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진 응답자가 전체의 64.8%에 달했습니다.
연령대를 교차분석한 결과, 신조어를 긍정적으로 인식한 세대는 20대와 30대인 반면, 부정적으로 보는 세대는 40대, 50대, 60대 이상 등으로 집계됐습니다.
이처럼 신조어들을 많이 사용하고 즐기는 젊은 세대와 달리 기성세대는 한글과 한국어를 파괴하고 있다는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도 합니다.
흔히 '세종대왕이 하늘에서 보시면 노하신다'라고 말하면서요.
하지만 문화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신조어는 시대흐름에 따라 생기고 사라집니다. 이를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겁니다.
과거 유행했던 '방가방가', '캡짱', '안습' 등은 지금에는 사용하는 사람들이 매우 드물어졌고 '댕댕이'(멍멍이), '띵작'(명작) 등 '야민정음'처럼 표기하는 데 제한이 없고 응용이 가능하다는 건 한글의 우수함 때문이란 시각도 있습니다.
물론 '○○충', '○○녀', '○○한' 등 혐오표현과 비속어, 남녀·세대비하 언어들을 쓰는 것은 지양해야 합니다. 그리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않고 무분별하게 신조어 남용 또한 자제해야 합니다.
디지털 시대 키패드에 적합한 글자로 한글이 꼽히는 이유 또한 자모의 조합으로 글자를 만들어내는 표음문자인 한글의 편리함 덕분입니다. 자음만 따서 사용하는 'ㅇㅇ', 'ㅇㅋ', 'ㅋㅋ' 등은 빠르게 돌아가는 디지털시대, SNS에서 빠른 속도로 말을 전달할 수 있도록 편리함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한글을 도구삼아 이리저리 줄이고 붙이고 조합하며 흥미를 갖고 만든 신조어는 오히려 한글의 아름다움을 존속시키는 데 일조할 수 있습니다.
세종대왕님의 눈에는 아이들이 한글의 유연한 특성을 이용해 재미있는 놀이를 하며 한글을 널리 알리는 것으로 보고 하늘에서 '한글을 재미있게 즐기고 있구나'라고 흐뭇한 미소를 띄고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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