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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공군지원 없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라고?"



책/학술

    "소련의 공군지원 없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라고?"

    [임기상의 역사산책 87]중공군, 소련의 측면 지원 없이 압록강을 건너다

    ◈ 북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주년에 축전 대신 참전을 요청하는 친서를 보내다

    1950년 10월 5일에 열린 중국 공산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팽덕회(서있는 인물)가 한반도 출병을 주장하고 있다. (사진=중국 군사박물관 제공)

     

    1950년 10월 1일 북한의 김일성과 박헌영은 모택동에게 친서를 보냈다.

    뜯어보니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주년을 축하한다는 축전이 아니라 다급하게 중공군의 참전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이들은 "38선이 위험하다. 우리 힘으로는 위기를 극복할 능력이 없다. 조선 땅에 들어와 작전을 펴달라"고 애걸했다.

    같은 날 동해안에 있는 국군 제3사단의 23연대가 38선을 돌파하고 북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날 맥아더 사령관은 북한에 사실상의 무조건 항복을 권고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다음날 속개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모택동은 "조선의 형세가 이토록 엄중한 때에 이제 출병을 할 것인지 안 할 것인지가 문제가 아니라 출병 시각과 누구를 사령관으로 삼을 것인가가 문제"라고 말했다.

    사실상 한국전쟁에 참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미 해군 전함 미주리함이 1951년 함흥 해역에서 함포를 발사하고 있다. 해·공군이 없는 인민군과 중공군은 속절없이 당해야 했다. (사진=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제공)

     

    그러나 이들 중국 수뇌부의 결정은 대다수 공산당 지도자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10월 4일~5일 열린 중국공산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대부분의 정치국원들은 "신중국이 수립된 지 얼마 안된 만큼 국내건설에 몰두해야 하고, 또 적은 강대한 미국인 만큼 대외전쟁은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참전할 지원군 사령관으로 내정돼 급거 소환된 팽덕회 장군의 격렬한 주장이 분위기를 바꿨다.

    그는 "적이 조선반도 전체를 점령한다면 그것은 우리나라에 막대한 위협이 된다"며, "패할 경우 기껏해야 해방전쟁의 승리를 몇 년 늦춘 셈으로 치자"고 역설했다.

    결국 중국 지도자들은 북조선에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모택동은 "3일 낮밤에 걸쳐 방안을 오락가락하면서 사색했다"고 회고할 정도로 고민을 거듭했다고 한다.

    중공군 참전의 주역인 팽덕회(왼쪽)와 모택동

     

    일단 결정이 내려지자 중국은 즉각 행동에 들어갔다.

    모택동은 팽덕회에게 10월 15일 압록강을 건너갈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는 스탈린과 김일성에게 전보를 보내 이같은 결정을 통보하면서 비밀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주은래와 임표가 스탈린이 머물고 있는 흑해 연안의 휴양지 소치로 출발한다고 통보했다.

    주은래의 비밀 업무란 미군과의 전쟁에서 꼭 필요한 무기 제공과 공군을 동원한 지원을 약속받기 위한 것이었다.

    ◈ 스탈린, 중공군에 대한 공군 지원을 사실상 거절하다

    1950년 2월 스탈린과 모택동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은래 중국 총리 겸 외교부장이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에 서명하고 있다. 이날이 스탈린과 모택동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스탈린은 인민군이 패퇴를 거듭하자 3가지 일을 동시에 벌인다.

    한편으로는 북한에 있는 소련 군사고문단 등 모든 소련인들에게 철수할 것을 명령하고, 김일성에게는 강력히 맞서 싸우라고 종용했다.

    동시에 중국 정부에 계속 전문을 보내 한국전쟁에 참전하라고 강권했다.

    소련이 참전해서 북한을 도울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참모들이 북한에게 뭔가 지원을 해야 하지 않느냐고 건의하자 스탈린은 이렇게 답했다.

    "김일성이 패배한다고 해도 우리 군대를 참전시키지 않을 것이오. (망하더라도) 내버려두시오. 이제 미국이 극동에서 우리의 이웃이 되게 합시다"

    그리고는 "김일성 동지는 장래 중국 국경 부근에 망명정부를 수립할 것"이라고 중국에 통보했다.

    전쟁을 벌이도록 충동질 해놓고도 북한이 위기에 처하자 곤경 속에 버려두겠다는 계산이다.

    만일 모택동의 최종적인 참전결정이 없었으면 스탈린은 1950년 가을 김일성을 버렸을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던 날 천안문 광장을 행진하는 인민해방군 대공포부대. 이들은 모두 압록강을 건너 미군기에게 대공포를 발사한다.

     

    1950년 10월 11일 스탈린을 만나러 흑해 연안에 있는 스탈린의 별장으로 간 주은래로부터 모택동에게 급전이 왔다.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소련 공군이 아직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에 당분간 출동할 수 없으며, 따라서 중국과 소련 모두 잠시 병력을 출동하지 않고, 김일성에게 압록강 이북으로 철수하라고 요구한다"는 요지였다.

    중소 간의 회담이 결렬됐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공산주의 국가들간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가?

    이번 회담은 시종 중국의 참전을 강력하게 종용하는 스탈린과 소련 공군의 지원을 확약받으려는 주은래 사이에 밀고 당기는 공방전이 계속됐다.

    둘의 대화 내용을 들어보자.

    "우리 소련 공군은 출동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단 비행기가 하늘로 떠오르면 국경이 애매해집니다. 자칫 우리와 미국간에 충돌 사태가 벌어질 수 있습니다" (스탈린)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소련 조종사들이 중국지원군의 복장을 하고 참전하는 겁니다. 그러면 제공권의 문제나 소미간의 군사충돌도 피할 수 있습니다" (임표)

    "하지만 조종사가 포로로 잡힐 경우 그의 몸에 걸쳐진 중국 인민지원군 복장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당신들의 이번 모스크바 방문은 한국전쟁 참전 유보를 통보하기 위해서입니까?" (스탈린)

    "그렇습니다. 소련 공군의 측면 지원이 없다면 우리는 출병을 보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은래)

    "그렇다면 좋습니다. 이 사실을 김일성에게 통보해주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울러 동북지구 통화에 망명정부를 세우라고 권할 수도 있겠지요" (스탈린)

    이념이고 나발이고 자국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려는 공산주의자들의 속셈을 엿볼 수 있다.

    중국 공산당은 충격에 빠졌다.

    한반도에서 중공군이 전투를 벌일 때 소련 공군의 엄호 제공을 기대했는데, 스탈린이 거절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것이다.

    10월 13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다시 소집되었다.

    결론은 소련 공군의 지원이 없더라도 즉각 지원군을 출동시켜야 한다는 쪽으로 모아졌다.

    당시 모택동은 '피를 말리는 심사숙고 끝에' 결단을 내렸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대한민국에게 단 한번 찾아온 통일의 꿈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압록강을 건너가는 자칭 '중국인민지원군'. 해·공군과 중포도 없이 유엔군의 현대식 화력에 맞선다.

     

    같은 날 김일성과 박헌영은 스탈린으로부터 절망적인 내용의 전문을 받았다.

    "저항을 계속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중국 동지들은 군사 개입을 거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귀하는 중국과 소련으로 완전 철수를 준비해야 한다. 모든 병력과 군사장비를 갖고 나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낙담에 빠진 김일성과 박헌영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공만 바라보고 있을 때 전혀 다른 내용의 전문이 스탈린으로부터 날아왔다.

    "중국군 참전에 관한 최종 결정이 이루어졌다. 중국 동지들을 만나 중국군 참전에 관한 구체적인 문제들을 상의해라. 중국군에게 필요한 무기는 소련이 제공한다"

    김일성은 지옥에서 천당을 오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중공군은 1950년 10월 19일부터 압록강을 넘기 시작했다.

    그리고 6일이 지난 25일 첫 전투에 돌입했다.

    ◈ 감격한 스탈린, 소련 공군과 막대한 전쟁물자를 중국에게 보내주다

    북한으로 출격하고 있는 미군 함정과 전투기. 곧 소련 미그기와의 공중전에 휘말린다.

     

    중국이 소련의 공군 지원 없이 북조선을 구하겠다며 전격 참전을 결정하자, 스탈린은 중국에 대한 모든 의심을 버렸다.

    그는 즉시 명령을 내려 곧바로 소련 공군이 중공군의 후방과 보급로를 엄호하라고 지시했다.

    단동에 기지를 둔 소련 공군의 미그-15기가 11월 1일 북한 상공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11월 8일부터 미군 전투기와의 공중전에 돌입했다.

    소련 비행기는 중국 공군기의 색칠을 하고, 조종사는 중국군 복장을 했으며, 중국어를 쓰도록 교육받았다.

    작전 범위도 평양-원산 라인, 즉 북위 39도선 이남으로 적기를 추격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렇게 해서 한국전쟁 기간에 7만 2,000명에 달하는 소련 공군이 비밀리에 참전했다.

    소련 공군이 참전하고 지원군이 유엔군을 격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흐뭇해하던 모택동에게 비보가 날아왔다.

    그의 큰 아들 모안영이 11월 25일 미군기의 지원군 사령부 폭격 때 전사했다는 것이다.

    28세의 젊은 나이였다.

    모택동과 그의 첫째 아들 모안영. 그의 시신은 북한에 묻혔다.

     

    모안영의 참전을 결정한 것은 모택동이었다.

    주변에서 그의 참전을 만류할 때 모택동은 이렇게 말했다.

    "안영은 모택동의 아들이다. 그가 죽음이 무서워 가지 않는다면 어느 누군들 가겠는가?"

    모안영은 참전 후 중국 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의 비서 겸 러시아어 번역, 사령부 작전처 참모를 지냈다.

    그의 사망 보고를 받은 주은래는 차마 모택동에게 알리지 못했다.

    한참 시간이 지난후 이 사실을 알렸을 때 모택동은 담배 2대를 피우고는 한숨을 쉬면서 중얼거렸다.

    "그 놈은 모택동 아들이니까…"

    그러나 모택동은 울지 않았다.

    모택동의 지시로 모안영의 시신은 중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평안남도 양덕군에 있는 중국인 묘지에 다른 중공군과 함께 묻혔다.

    포로가 된 중공군. 이들 가운데 1만 4천여 명이 중국 송환을 거부하고 대만으로 건너간다.

     

    중국은 형제국가인 북조선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참전했지만 그 댓가는 컸다.

    중공군 21만 명이 죽거나 실종됐으며, 38만 명이 부상을 입었다.

    특히 중국이 정치적으로 패배당한 것은 중국군 포로 가운데 1만 4,227명이 중국으로의 송환을 거부하고 대만으로 간 것이었다.

    특이하게 12명이 중국이나 대만행 모두 거부하고 제3국행(인도행)을 택했다.

    한반도에서 포성이 멎은 지 40년 가까이 된 1992년, 중국의 실력자 등소평이 외교부에 지시를 내렸다.

    "대한민국의 노태우 정부와 협상해서 우리와 수교하는 방안을 추진하라"

    "북조선은 어떻게 합니까?"

    "내버려둬라. 우리에게 실익이 없다"

    국가 관계란 이렇게 비정한 것이고, 영원한 적, 영원한 아군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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